청도 유천마을은 민족 고유의 정한(情恨)을 빼어난 시조로 엮은 이호우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유천마을을 두고 일부에서는 시인의 마을로 부르고 있다. 오누이인 이호우와 이영도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이호우 시인은 지난 1955년 제1회 경북문학상을 수상했다. 유천마을 거리는 1960~70년대 거리모습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특히 70여년이 지난 정미소와 폐관된 영화관, 소리사, 약방 등 근대문화유산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경북도의 남서쪽 끝단 청도읍 유천은 밀양과 얼굴을 맞댄 마을이다. 동쪽의 매전 지역과 남서쪽의 밀양 그리고 북쪽의 청도가
서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다. 조선시대 귀경길의 조선통신사는 이 길을 서부산에서 한양으로 북상하는 요로로 삼기도
하였다.
매전에서 흘러드는 비파강(동창천)과 청도천이 합쳐 밀양강을 만드는 유천은 물산이 풍부하고 번잡한 곳이었다. 80년대 중반
까지만 하여도 장터를 비롯한 골목길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갖가지 농산물을 내다 팔고 알곡을 도정하는 정미소의 탁탁이가
밤새 쉬지 않고 돌아갔다.
“그 시절, 참 좋았지요. 유호리와 내호리를 합한 유천은 3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어요. 인근 지역에서 가장 큰 장이 섰고 소문난
한의원과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먹거리가 풍성하고 사람들의 인심이 넉넉한 살기 좋은 곳이었지요. 청정한 산천의 기운을 받아서
유명한 남매 시인이 탄생하기도 했고요”
나이 지긋한 토박이 어르신이 자랑하는 남매 시인이란 곧 시조 시인 이호우와 이영도를 말한다.
오빠 이호우 보다 네 살 아래의 정운 이영도는 1916년에 태어났다.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스무 살이 되자 시집을 갔지만 정운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8년 남짓, 그것마저도 오랜 병고에 시달리던 남편과 사별한다. 스무 여덟의 정운에게 운명은 너무 가혹
했다. 그해 해방을 맞은 정운은 기쁨도 뒤로 한 채 아린 가슴을 쓸어안고 경남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옮겨 간다. 교무실 한 켠,
옆자리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책상이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청마의 시를 읊조리고 그의 시작 노트를 엿보곤 한
정운은 시 쓰기에 맘을 붙이면서 새로운 삶의 기운을 채워나간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
1910년께 건축된 이호우, 이영도 오누이 시인의 생가는 단층 한옥구조로 ‘ㄱ’자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이곳은 향토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돼 있다.
교실 창문을 열면 푸르다 못해 하얀 파도가 학교 운동장까지 밀려들었고 때로는 바다 속으로 무지개 같은 붉은 노을이
드리워졌다. 오빠를 쫓아 시인을 꿈꾸던 정운은 다행히 가까이에 있는 청마와 아낌없이 시정을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런 사이 두 사람은 풀씨 같은 연정을 잉태한 것일까.
‘빈 학교 창문으로 바라봅니다. 푸른 숲과 바다와 밝은 햇빛과 흰 구름, 지극히 평화롭고 충족한 조망입니다. 어쩌면 잊을
수 없는 이 하늘을 나는 능히 운(정운)과 바꿀 수 있다고 스스로 깨닫습니다…. 당신은 나의 하늘과도 바꿀 수 있는 나의
보배이기에, 당신의 자랑이 나의 자랑이기에, 당신의 자랑을 끝까지 당신이 자랑할 수 있도록 나는 운(정운)을 다치지
않으렵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다. 청마는 곁에 있는 정운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운은 자신의 얼굴 빛
같은 뽀얀 한복을 차려입고 반듯한 가르마에 쪽진 머리를 하고 다녔다. 맑은 얼굴 속으로 깊은 외로움 혹은 슬픔이 묻은 듯
하지만 쉽게 범할 수 없는 귀품을 풍기는 여인이었다.
청마는 통영여자중학교의 교사로 있던 1946년부터 사망하던 1967년까지 정운과 5,000여 통의 편지를 교환한다. 절절이 그리움
으로 쓴 연서다. 스무 해가 넘도록 정운에 대한 청마의 한결 같은 사랑은 열렬한 고백이었다. 그칠 새 없이 흘러내리는 한 줄기
깊은 샘이었다.
날이 갈수록 정운의 마음도 봄눈 녹듯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가슴을 여민 옷고름 타래 같이 청마가 단단하게 자리
하고 있었다. 비릿한 바다 내음을 실은 봄바람이 지나간 자락에 그리움이 아침 안개처럼 번지고 갔다. 정운은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청마가 멀고 먼 곳에 있는 사람마냥 더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갔다. 행여 그의 모습이, 그의 목소리가 들리려나 귀
기울여보다가도 정작 마주 앉으면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날갯짓 같은 너울을 그리고 사라져가는 산등성이를 쳐다보는 것 같은
자신의 맘을 아련하게 숨기면서 살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청마를 그리워한 정운은 시로 자신을 삭였다. 그러다 홀연히 청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석 달이 지난 1967년 6월, 정운은
청마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글에서 200여 통을 골라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세상에 내놓는다. 문단은 말
할 것 없고 나라 안이 떠들썩했다. 유부남 청마와 홀로 사는 정운의 길고 긴 사랑 이야기였기에. 두 사람의 더운 가슴을 묶어
놓은 연서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더러는 불륜으로, 세간의 인구에 오른 풍성한 이야기꺼리가 되었다.
◆붉은 댓돌에 새긴 그리움
오누이공원은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강 언덕에 세워져 있다. (사진 왼쪽 이호우 시비, 오른쪽 이영도 시비)
정운 이영도가 태어나고 유년을 보낸 유천마을의 옛 집은 자물쇠가 물려 있다. 키 높이만 한 입간판만 문간에 둔 그 집에도
봄빛이 찾아들었다. 용각산에 등을 기대고 햇살 바르게 앉은 나지막한 기와집은 정운의 그리움과 시심이 자란 곳이다. 오랫동안
발길이 끊긴 듯 낮은 흙담이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이호우와 이영도 남매 시인을 기리는 청동의 비판이 섬돌처럼 놓인 마당가에는 봄을 삼킬 듯 벙그진 동백꽃이 붉은 잎새를 뚝뚝
흘리고 있다. 안채 처마 앞 우물가에 무리지어 돋아난 상사화 푸른 잎들이 다순 봄볕을 머물러 가게하고 해묵은 모란도 붓끝 같은
연둣빛 새잎을 물고 있다. 매화 가지에 가린 안채와 문간채 마루에서 어린 소녀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넓지 않아 오히려 정겨운 마당을 돌아 문간채에 이른다. 서향으로 자리를 튼 바깥방은 남으로 창이 나 있다. 그리고 좁은 마루 아
래 동백보다 붉은 댓돌이 놓여 있다. 윤기가 나도록 닳은 댓돌 위로 신발을 벗어 올려본다. 유년의 정운이 창을 열고 앉아 굽어
흘러드는 비파강 물소리며 갯버들 피어나는 소리를 들었으리라.
통영 생활이 두어 해 지났다. 차츰 맘이 잡혀가던 정운은 풀풀거리는 고향산천과 송사리 떼 팔딱거리는 비파강 물소리가 문득문득
그리웠다. 외로이 사는 어머니가 보고 싶던 어느 초여름, 고향 집에 들른 정운은 문간 방 달빛에 몸을 실었다. 대문 옆의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감 알이 푸른 탱자만큼 자라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뒷산의 늦밤나무 가지에서 비릿한 듯 향긋한 밤꽃 내음이 풍겨나고 두둥실 떠오른
달빛이 꽃밭을 맴돌았다. 이미 꽃잎을 떨군 모란은 슬픔을 안고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달빛 가득한 방안에 홀로 앉은 정
운은 청마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정운은 자신도 몰래 시가 되어버린 ‘모란’을 읊조리고 있었다.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시조 시인 이영도의 생가 대문 앞을 나서면 한 세대 전의 옛 풍경을 오롯이 만난다. 하얀 쌀겨 먼지를 연기처럼 풀어내면서 돌아
가는 정미소와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것 같은 영화관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지금은 닫혀 있지만
텔레비전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던 시절, 이 영화관은 유천지역 일대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장날마다 혹은 명절을 맞아 문을 연 극장에서 골짝마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웃고 울었다. 거리에는 양철 지붕과 시멘트벽,
나무 창문으로 된 집들이 낡은 채로 그 시절의 추억과 이야기 타래를 풀어낸다.
골목길과 건물들이 마치 박물관 속의 전시품을 연상케 해준다. 그래서일까. 이 마을은 ‘유천영화마을’로 거듭나려 한다. 푸르고
깊은 사랑과 그리움의 시인, 정운의 훈기가 밴 마을 위로 달빛 같은 시조의 홑씨가 아름답게 흩날리기를 기다린다.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