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해친 개, 현장서 즉시 카빈총 총살…
떠돌이 개 포획, 동물원 맹수 먹이로
한 해를 시작하는 분위기가 거리에 가득했던 1977년 1월 8일 오전 11시 10분쯤, 서울 어느 주택가 골목이 어린아이 비명과 주민들 고함으로 아수라장이 됐다. 이 동네 5세 남아가 대문을 뛰쳐나온 이웃집 맹견 도사견에 15분간이나 온몸을 물어뜯긴 끝에 현장에서 숨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개의 머리를 빨랫방망이로 마구 난타했어도 소용없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땐 모든 게 끝났다(조선일보 1977년 1월 9일 자). 이 사건은 개에 물린 사건 중에서도 특히 끔찍했던 참사로 꼽힌다.
1950~1970년대에 가정집 개들은 집 지키는 방범견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체구도 제법 컸다. 그런 개에 물릴 때의 부상은 심각했고 가끔 사망 사고도 났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꼭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개 주인은 구속하고, 개는 현장에서 즉시 사살했다. 1977년 참사 때도 경찰은 사건 발생 2시간 30분 뒤 무장하고 현장에 다시 찾아와 자기 집에서 쉬고 있던 '살인견'에게 카빈 소총을 5발이나 발사했다. 근거 법령은 없었지만 사람을 해친 개는 즉결 처분하는 게 당시의 불문율이었다.
1981년 7월 인천에선 개가 12세 소녀를 물고 놓아 주지 않자 긴급 출동한 경찰이 개를 사살하고 소녀를 겨우 구해낸, 영화 같은 일도 있었다. 사람 목숨을 건드린 개는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했다. 한번 사람을 물면 또 물기 마련이라며 '재범'을 막으려는 뜻도 있지만 총살형으로써 응징하는 측면도 있었다. 1980년 3월 경기도 야산에서 3세 남아가 셰퍼드 등 3마리 개에 물려 숨졌을 때 경찰은 "3마리의 '주범 맹견'을 모두 박살하겠습니다"라고 국민에게 발표하고 곧 실행했다.
언론도 개 사고 때마다 견주를 탓할 뿐 아니라 개 자체에 대한 분노도 숨기지 않았다. 한 신문은 사설에서 "개는 본질적으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열하고 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당국은 주인 없는 개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이기도 했다. 이를 '야견 박살(野犬搏殺)'이라 했다. 떠돌이 개들을 때려죽인다는 것이다. 살처분한 개는 창경원, 어린이대공원의 맹수들 사료로 썼다(경향신문 1977년 1월 12일 자).
최근 한일관 대표가 개에 물린 뒤 사망한 사건 이후, 문제의 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인명을 해쳤으니 살처분해야 맞다"는 주장과 "죽이는 건 지나치다"는 반론이 맞선다. 개의 공격이 사망의 직접 원인인지는 입증되지 않았으니 살인견 단정은 무리일 수 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일부의 빗나간 '개 사랑'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반려견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 아이'라 부르는 사람도 많지만, 전문가는 "개를 사람처럼 대하니 버릇이 나빠지는 것"이라며 이번 사고의 근본 원인을 짚는다. 1977년 1월 참사 때도 분노한 이웃들이 몽둥이를 들고 개에게 달려들자 살인 맹견의 주인은 "개를 때리지 말고 차라리 나를 때리라"고 말해 주민들을 더 격분하게 했다. 과도한 애견 의식을 가졌던 듯하다. 물론, 떠돌이 개들을 무차별로 박살했던 옛 시절의 난폭함은 반성할 점이 있다. 하지만 개가 아무리 귀여워도 절대로 사람과 동일 선상에 놓지 않고 인간 존엄을 최우선시했던 옛 원칙만큼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