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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판자촌의 여음
3-1 안양이란 지명은
안양은 어디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글을 다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그간 무심했다는 생각도 든다. 양산의 통도사에서 안양암이란 암자를 본 적이 있다. 安養이란 한자가 똑 같아 혹여 불교에서 유래된 지명은 아닐까 싶었다. 요즘은 동네 인터넷에 접속하면 사는 동네에 대한 현황이 조근 조근 잘 설명되어 있다. 곳에서 발췌한 사항이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되었다. 신라 효공왕 4년(900)에 궁예의 후예인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등의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산꼭대기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채색을 이룬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살피게 했다.
구름 밑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났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건의 뜻과 같으므로 이곳 (만안구 석수1동 산 27,28번지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즉 안양사로 인해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되었다고 소개 하고 있다. 안양이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모든 일이 원만하여 즐거움만 있고 괴로움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의 세계를 의미한다.
과거 우리 동네는 고유 명칭이 있었다. 남부동 시대동 중앙동 석수동 양지동 장내동 교하동 냉천동 소골안 주접동 덕천마을 골안 명학동 능골 병목안 창박골 담배촌 구룡마을 삼막골 벌터 신촌 범고개 붓골 박달리 ... 지금 본가가 있는 평촌동네의 귀인동이 조선시대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 이 마을에 들러 머물다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도 그렇고 대개는 붙여진 이름의 연유가 있으며 그것이 아니라도 그 시절 불렀던 동네이름이라서 그러한지 친숙하며 정감이 간다. 동네 이름만 떠올려도 마치 내가 그 시간 속에 다시 머무는 양 오물오물 되살아난다.
동네 이름은 1973년 시로 승격되면서 멋없이 숫자로 일렬을 세워 획일화 시켜버렸다. 그 상실로 안양1동 2동 하면 어디쯤인지 상상도 아니 된다. 물론 일정시대 때 지어진 이름이 대부분이라 그 의미가 적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고유의 이름은 필요하다. 고유는 특별한 것이고 독특한 특색대로 풍기는 맛 또한 제각각의 얼굴을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옛 지명은 나름의 뜻을 갖는 경우가 많다.
안양은 1949년 8월 15일 안양면에서 ‘안양읍’으로 승격됐다. 당시 인구는 3만도 채 못됐다. 60년대 당시 원씨성을 갖은 읍장이 돌아가셨는데 꽃상여 행렬에 안양읍민이 줄을 이어 가던 풍경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1973년 시로 승격할 당시 10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현재는 64만명에 달하고 있다. 안양의 근현대는 크게 ‘안양면’이었던 일제시대와 안양읍 시절, 그리고 현재까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안양은 철도가 들어서면서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안양역세권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했었다. 내가 살던 가축위생연구소 관사도 일본인들이 지은 사택이다. 지금의 안양3동 자리에 ‘조선직물(주)’가 들어섰고, 조선견직(주)가 현 석수1동 자리에 설립됐다. 이 공장들은 광목을 짜서 군복을 만들던 공장이었다. 수원 지지대고개와 삼성산, 관악산 등에서 흘려내려온 물이 모이는 암반지대인 박달동 일대는 용수가 필요한 광목을 짤 방직공장으로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또 이때부터 안양에서 포도를 많이 재배하기 시작했다. 직물공장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소변을 처리하기 위해 웅덩이를 팠고, 이를 거름으로 활용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분을 거름으로 주면 열매가 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안양포도가 유명해진 것도 여기서 유래했다. 안양은 일제에게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박달동에 탄약고 시설을 뒀다. 이곳에서 탄약을 갖고 가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서 고무나 기름을 가져와 다시 이곳에 저장했다.
뿐만 아니라 비행기 제작도 안양에서 이뤄졌다. 당시 조선직물 공장에서 비행기를 조립 중이었으나 2차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돌아가고 대한민국이 해방되면서 무산됐다고 한다. 6 25 때 전쟁의 아수라장 한 복판이었던 것이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안양유원지는 꽤 오래전 만들어진 위락지이다. 1920년대 일본은 출장을 만들고 안양 풀행(수영장행) 철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성인과 어린이용 풀 2개가 있던 안양수영장은 일본인들의 많이 찾았던 명소였다.
유래를 살펴보면 비록 허접한 동네라 할지라도 예사로 보이지도 않는다. 허허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벌터’라고 하였으며 비산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41년 10월 1일 시흥군 안양면 비산리로 되었다가 이어 안양면에서 안양읍을 거쳐 1973년 안양시 비산동으로 개편된 것인데 별칭인 수푸루지라고 칭하는 것이 보다 정겹다. 수푸루지란 이름처럼 산림이 우거진 산간지대였다가 조선 중기에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던 심기원이 부친의 묘를 지금의 대림대학 뒤에 쓴 후 후손인 청송 심씨가 묘하에 정착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달안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상서면 외비산리였다가 1993년 경 시 조례에 따라 부흥동을 분동해 달안동이 되었다고 한다. 신도시 개발이전 이곳은 삿갓들, 달안이들, 만마지기들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지금의 평촌 신도시 개발지역내에서는 가장 큰 들이었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가릴 것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다녀야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해 삿갓들이라고 불렸으며 빨리 달아나야 한다고 하여 다라니 또는 달안이라고도 했다.
석수동은 관악산과 삼성산에 둘러 쌓여있어 석공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石手洞이라 하였고 효성의 다리로 불리워지고 있는 만안교와 교비도 이 마을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옆으로 9.28 수복 후 당시 시흥군 에서 난민들을 정착 이주시킨 후부터 취락이 이루어진 구룡마을이 있는데 그 지명은 자리가 풍수로 보아 좌청룡이 완연한 명당지지라 하여 구룡목이라 칭한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바위색이 유독 푸른 심청색이라 하여 창박골이라 불렀고 관악 역 서쪽으로, 만안교 노변 옆에 있는 마을은 농경지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새로 주택이 들어서자 신촌(新村) 이라 칭했으며 충훈부 동북쪽에 꽃챙이란 마을은 꽃과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꽃챙이 (花倉洞)라 칭하였으며 소년원과 구룡 마을 사이에 위치 한 삼막골은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인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의 세 성인이 삼성산에서 수도하며 각자 1막씩을 짓고 살았다 하여 삼막골(三幕洞)로 칭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지만 내 동네 이름은 주접동이라 했다. 이름이 궁색하여 늘 감추어 두었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럴 곳이 아니었다. 먼 옛 것들이 아니더라도 삼막골에는 진주 하씨의 집성촌 이라 하여 보통 하씨촌(河氏村) 으로 불리는데 구한말 지방 관리들의 탐학과 한국의 주권이 외세 (일본)에 의해 박탈되어 가자 분연히 일어서 농민운동을 주도한 하영홍이 태어난 곳으로 해마다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에 성재이에 있는 느티나무와 웃말에 있는 향나무에서 나무제를 지냈다는 기록도 의미 있는 서증이다. 하 씨 성을 가진 친구가 왜 삼막골 출신이고 그 아이 집 정원에 향나무가 많았던 연유를 알 것도 같다.
이 기록 또한 재미가 솔솔 하다. 안양에 시장이 개시되기는 1926년 1월 28일이었고, 거래되는 품목은 농산물을 위시하여 축산물, 포목, 일용잡화까지 다양했다. 개시한 1년 후의 년 간 매출액을 보면 농산물 이 15만 6천원, 잡화가 21만 2천원, 그밖에 직물, 축산물, 수산물 등 모두 50여 만 원에 달했다. 상인들은 개시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7년 6 월 4일 단오절을 기해 대대적으로 기념식을 거행키로 했는데, <동아일보> 1927년 6월 1일자에 안양시장 일주기념(安養市場 一週紀念) 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은 군의 중앙일 뿐 아니라, 교통이 편리하고 따라서 산물도 상당함으로 동면에서는 작년 중에 안양시장을 설치한 후 유래 성적이 비상히 양호하던 바 더우기 안양번영의 일책으로 오는 6월 4일(단오일)을 기하여 전시장(全市場)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리라 하며 여흥으로 예기의 가무와 오산청년(烏山靑年)의 소인극(素人劇) 외 안양소년척후대 주최의 축구대회 및 동화 동요회 등이 있어서 많은 흥미가 있으리라하더라"
市垈洞이란 마을 명칭은 안양시장이 있었다는 연유에 기인한 것으로 1929년에 안양에서는 최초로 전기가 송전된 곳이기도 하다. 일명 구시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장내동은 밤나무, 뽕나무 등이 많았던 곳인데, 밤나무 울타리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장내동 또는 담안 이라 부른다. 1961년 11월 6일 안양1동 소재 시대동에 있던 안양시장이 이전되면서 상권이 형성됨과 동시에 중앙로의 개통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오늘날에는 안양최대의 번화가로 변모되었다.
안양역 앞에 용화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일제강점기 실업가 박흥식에 의해 비행장 건설이 계획된 바 있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조인된 지 5일 후 11월 22일 이등박문이 기고만장하여 수원지방에 유람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안양육교에서 안양출신 원태우에게 돌멩이 세례를 받아 치욕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 자료를 찾아보기 전 까지는 금시초문이었다.
과거를 더듬다 보면 마치 내가 그 시절을 섬기듯 다듬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섬긴다는 의식의 가치는 단지 의례와 도덕적으로서만이 아닌 원래의 우리 자리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뿌리만한 강한 힘은 없다. 전통과 정통성은 근원의식과 정체성으로 부터다. 섬김은 생의 모든 고단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여기 이 자리에 왜 서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필연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그 바탕이다. 본향을 기억해내는 마음자리의 여행, 명절이 그러하듯 곧 내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3-2 하얀 눈길을 걸으며
아주 가끔 나도 모르게 은연중 부르는 노래. 불시에 찾아오는 그 노랜 가사의 앞뒤 구분이 시원치 않다. 부르다가 다른 일을 의식하거나 행하면 이내 또 자취를 감추고 마는 노래. 일부러 그 노랠 부르리라 생각하고 부른 적이 없다. 슬그머니 귀 끝을 간질이며 왔다가 바람처럼 흐르듯 가는 것이 추운 겨울 밤 간간이 들리는 메밀묵 찹쌀떡 외장치는 소리와도 닮았다. 가냘픈 것이라 하겠지만 하지만 그 노랜 꽤 오랜 세월 깊숙이 내게 들어와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하얀 눈 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난 이 노랠 언제쯤 누구에게 주워들었던 것일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이 노래 또한 아주 어릴 적 느낌 속에 같이 들어있다.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도 누나가 나를 업고 잠을 재울 때 부르던 노래가 아닌가 싶다. 누나는 양 무릎에 실 꾸러미를 끼고 털실을 동그랗게 감는다던지 콩을 볶을 때나 방을 쓸거나 하는 반복되는 일을 할 때 꼭 이 노랠 흥얼거렸었다.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누난 그 노랠 몇 번이고 부르다가 고갤 쳐들어 하늘을 보곤 하였다. 혹여 이 노랜 동란이 터지던 때 엄마에게 배웠던 것인지 모른다. 누난 발자국이 주는 그 느낌으로 필경 누구를 떠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을 수 없는 발자국에 대한 한스러움은 또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발자국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흔적의 것이다. 보이는 것으론 현재지만 과거를 말한다.
달나라에 남긴 인류의 발자국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일까.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때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순간을 그해 여름 우리집 재산 1호로 들여놓은 미제 RCA TV를 통해서 보았다. 보면서도 상상이 잘 안되었다. 공기와 물은 발자국을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침식과 퇴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공기와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마 그대로의 형상일 것이다. 설령 여전하지 않다하여도 달나라에 남긴 자국은 이미 시간 속의 과거로서 사실로서 존재한다.
그러기에 발자국은 유형으로도 무형으로도 존재한다. 나는 발자국 하면 하얀 눈을 먼저 연상한다. 하얀 눈 속에 발자국은 유난히 선명하다. 선명한 발자국을 쫓아 오르는 산길에선 앞서 간 그 누군가를 꼭 한 번쯤은 생각해보게 된다. 발자국을 남기며 고개를 오른 그 또한 쫓는 누군가가 느낌을 전해 받으리라 생각하였을까. 흔적 없는 자취는 들여다 볼 수 없는 과거로서만이 존립한다.
도심 속에 발자국은 흔적이 묘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심은 늘 감추어지는 것들로 수북하다. 어쩌면 종적이 묘연한 것이 속 편한 노릇인지도 모른다. 때론 흔적이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던 때가 있었다. 숨기고 싶은 과거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덧 나는 도심에서 벗어나 과거로 돌아서고 있다. 바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종적을 찾는 양 과거가 마냥 그립기만하다. 수구초심에 닿은 나이라서인지 모른다. 요즘은 새것들 보다는 흔적이 밴 것들이 꽤 마음에 든다. 웬지 믿음이 가고 흐뭇해진다.
의자이던 테이블이든 하다못해 귀빠진 접시나 꼬깃꼬깃한 돈에 이르기 까지 진 때가 묻어 삶의 연결이 자연히 느껴지는 골동품 같은 사물들을 대하면 왠지 외롭지 아니하고 편안하기 까지 하다. 회한으로서든 애정이든 이별의 아픔이든 과거와 현재가 어떤 느낌으로 같이 존립한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진다. 끼어 있는 사이에 존재 한다는 것이 행복임을 나는 요즘 많이 느낀다. 발자국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사이로서 존재하며 그 시간의 틈으로 나는 나를 다시 보고 있다.
시간의 벽을 허물고 성큼 다가서게 하는 것은 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립은 틈을 만들지 못한다. 수백 년이 지나도 연결할 틈과 고리가 없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서성이는 바람은 들락거리는 사이 빈 틈을 비집고 과거의 것을 여실히 묻어나게 하였다. 집요하기 까지 하다. 오랜 것엔 꼭 그 발자취가 남아 있다. 시간의 이음을 달리 나타낼 그 무엇이 꼭 따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 나 역시도 글 하나를 살펴 어김없이 오늘의 발자국을 남긴 셈이다.
인류를 위한 달나라의 거대한 첫걸음이든 단순한 발자국이든 우리는 무던히도 애쓰며 발자취를 남기려 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이왕이면 하얀 눈 길 뽀드득 소리를 낸 발자국이 선명하듯 가슴 속에 하얗게 새길 발자국은 예쁜 과거가 되지 않을까. 그 시절 누나가 꺼내보던 여운 남는 그 발자국. 나는 아버지가 남긴 하얀 발자국을 요즘 가끔 꺼내어 보곤 한다.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내가 만든 발자국이지만 그 발자국은 자신의 것 만이라고 할 수 없다. 훗날 아이들도 나처럼 그렇게 내 발자국을 가슴 속에서 꺼내 보지 않을까. 그러기에 겨울 산 어느 누군가 만들어준 하얀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나는 또 어떤 발자국이어야 할지 생각하고 또 해보는 것이다.
첫댓글 장마졌을 때, 수푸르지 토다리 물구경 하다가 10미터 정도 떠내려가다 용감한 해병대아저씨가 저를 구해 준 기억이 있습니다. 제대할 떄까지 위문편지 썼었는데 제대 후, 연락이 끊겼지~~나~~명 길지요?
73년 고1때 반친구들이 안양산다고 하니까 초가집이냐고 촛불켜고 공부하냐고 해서 큰소리로 아니라구 하던 적이 있었지~~그럼 두 손 불끈쥐고 열심히 공부해쪄야헸는데 벼락치기 스타일이니 뭐~~~~^*^
어떤 발자욱이 되어야하나?~~~~글쎄.............요즘은 Yes도 No도 아닌 그저 그렇게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