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단종의 서거(逝去)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던 시녀는 엄흥도를 보자 단종께서 보신탕(補身湯)을 드시고 싶어하시는데 마침 잘 오셨다고 한다.
곧이어 구멍 속에서 단종(端宗)을 말소리가 들렸다.
‘개가 있는데 잡을 수가 없으니 개 목에 줄을 걸어 구멍 밖으로 내보낼 터이니 힘껏 당겨라.’
잠시 후 활줄 두 가닥이 구멍 밖으로 나온다. 엄흥도는 줄을 잡고 힘껏 당겼는데 도무지 나오지 않는다. 담장에 발을 버티고 힘주어 당겼더니 마침내 담장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목이 졸려 숨이 끊어진 단종(端宗)의 시신이었다는 신기한 이야기도 있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엄흥도는 한밤중에 몰래 거두어 산속으로 암장(暗葬)하러 모시고 가는데 겨울이라 온통 눈이었다.
마침 노루 한 마리가 눈 속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사람을 보자 사슴이 달아난다.
다행히 사슴이 앉았던 그 자리는 눈이 없어서 그곳을 파고 단종의 시신을 묻었는데 이곳이 바로 영흥리 동을지(冬乙旨) 산기슭에 자리한 현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莊陵)’으로 천하의 명당(明堂)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산속에 암장(暗葬)되어 있던 단종을 꿈속에서 만나 암장된 장소를 알고 찾아낸 이가 바로 조선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를 지냈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이다.
(7) 영월군수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단종이 서거(逝去)한 후 영월군수로 부임한 군수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영월부 읍지(寧越府 邑誌)에 보면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에 부임한 박세호(朴世豪),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5월에 부임한 권수중(權守中), 같은 해 5월에 새로 부임한 연현령(延玄㱓)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다음으로 군수직을 제수(除授)받은 김희성은 아예 부임을 거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영월군수직은 비어있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관아 건물은 퇴락(頹落)하고 지방 관족(官族)들과 토호(土豪)세력들의 착취가 심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도둑들까지 들끓어 백성들의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승문원교검(承文院校劍)으로 있던 박충원(朴忠元)이 영월군수직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승문원(承文院)-조선 시대,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이며 교검(校檢)은 정6품
박충원(朴忠元)은 신축년(辛丑年, 1541, 中宗 36) 9월 초에 부임하게 되는데 병오년(丙午年, 1546, 明宗 1) 정월에 후임 민종건(閔宗騫)이 부임할 때까지 약 5년간 재임하였던 분이다.
박충원은 부임 첫날밤,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동헌에 불을 밝히고 앉아있는데 과연 혼령이 나타났다고 한다.
박충원은 혼령이 단종임을 알아보고 “전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행차이시나이까?” 하고 물으니 단종은 자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면 큰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단종은 창밖 동을지산(冬乙支山)을 바라보고 산 밑 노송을 가리킨다.
이튿날 박충원은 관속(官屬)들을 풀어 엄흥도의 친척을 찾아내어 단종 시신이 묻힌 곳을 찾아 나섰는데 동을지산(冬乙支山)에서 가시넝쿨에 덮인 단종의 묘를 찾아내어 봉축(封築)하고 제를 지냈다.
제문은 “왕실의 맏이요, 어리신 임금이시여, 비색(否塞)한 운수를 당하시어 바깥 고을 청산에 만고의 고혼(孤魂)으로 누워계시나이다.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소서.”였다는 기록이 있다.
숙종 17년(1681)에 이르러 노산군은 노산대군으로 추봉(推捧)됐고, 숙종 24년(169)에 노산대군을 단종(端宗)으로 추상(追上)하고,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