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 인연법 2. 실체ㆍ자성 3. 무상 4.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 5. 공[비어있음] 6. 비아/무아 7. 인연법과 공의 관계 8. 세속법과 공법 |
인연법과 공, 실체/자성과 무상을 구조주의 언어학에 비추어 보면, 대강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구조주이의 용어에 대해서는 <구조주의의 기본 개념들>을 참고하세요.
이 아래에서 ‘[ ]’ 안의 내용은 제미나이와 대화 과정에서 제기한 오해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하여 덧붙인 것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공’과 ‘임시로 붙인 이름’의 해석, 초기 불교와 대승 불교의 차이>을 참고하세요.)
1. 인연법
인연법은 사물들이 서로의 관계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을 설한 법이다.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법에 의존하여 생겨나고 없어진다. 인연법은 관찰자의 몸과 마음[6내입처]으로 무엇임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연법을 구조주의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6내입처에서 ‘눈’은 갖가지의 ‘눈들’의 총체이다. 이 눈들은 분포를 조사해 보면, 상보적/배타적 분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포에 의거하여 작가지 눈들은 하나의 ‘눈’으로 묶인다. 이 때 갖가지의 ‘눈들’은 6내입처의 ‘눈’의 이형태이다. ‘귀, 코, 혀, 몸, 마음’도 그러하다.
이렇게 동일성이 확보된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지각 기관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의 계열체로서 6내입처라는 동일한 부류를 형성하지만, 지각 기관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에서는 각각 달리 분류된다. 6외입처의 ‘빛깔’ 등과, 6인식의 ‘눈의 인식’ 등도 마찬가지이다.
6내입처와 6외입처, 6인식은 통합하여 ‘6접촉’이라는 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6접촉으로 말미암아 ‘6느낌, 6생각, 6의도, 6애욕, 6기억’ 등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일[개체와 구조]이 일어난다. 물론 6접촉이나 6느낌 등도 ‘눈, 빛깔, 눈의 인식’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해석된다.
괴로움은 기본적으로 이것들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연법이 시작되는 데에는 ‘무아’ 등을 전제하거나 하는 다른 까닭은 없다. 예컨대 인연법에 관한 경에서는 “눈은 무상하다”나 “눈과 빛깔을 인연하여 눈의 인식이 생긴다.” 등으로 시작한다. 12인연법은 그냥 ‘무명으로 말미암아’로 시작되는데, 무명은 ‘밝지 않음, 어두움, 어리석음’이다. 인연법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6내입처는 관찰자의 지각 기관이고, 6외입처는 관찰의 대상[결과]이다. 그런데 관찰자의 6내입처는 다른 관찰자가 보면 6외입처가 된다. 곧 관찰자는 당연하게도 다른 관찰자의 관찰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2. 실체ㆍ자성
이렇게 생겨나는 것들은 서로의 관계에 의존하여 ‘무엇’이라는 ‘실체’가 결정된다. 곧 실체는 인연법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실체는 고유의 모양ㆍ성질ㆍ기능을 가지는데, 이것을 ‘자성’[성품]이라 한다. 자성은 인연이 유지되는 일정한 기간 동안 존재한다. 이렇게 규정된 실체는 이형태들의 총체[집합]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물, 얼음, 수증기’가 있다. 동일한 성질을 공유하고 있는데, ‘온도’라는 환경에서 분포가 상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물로 묶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양(이나 상태)이 꽤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다른 사물로 본다.
‘나’의 경우는 매우 복잡한데, ‘나’는 공시태에서 환경에 따라 갖가지 다른 실체로 규정된다. 선생이기도 하고 학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 남편, 애인이기도 하고, 사장이기도 하고 손님이기도 하다. 이 모든 ‘나’들은 모양이나 성질은 같을지라도 기능이 다 다르다. 때로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나’들은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면서, 분포가 상보적이다. 아내라는 환경에서는 ‘나’는 남편이어야 하고, 아버지나 아들, 사장이거나 손님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를 구성하는 이러한 갖가지 ‘나’들은 ‘나’의 이형태이다.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체의 규정은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만일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에 맞는 실체로 바뀌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실체는 보통 ‘현상의 이면에 작동하는 본질’이나 ‘항상하고 일정한 모양을 갖추면서 사물의 근원을 이루는 것’ 등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구조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런 의미의 실체는 없다. 모든 사물의 모양과 성질과 기능은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규정되는데, 관계가 달라지면 그것들도 달라지고, 관계가 끊어지면 그것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도 ‘세계는 12입처와 18계, 5음이다. 그 밖의 세계는 없다‘라고 하였다.
아함경에서 ‘실체’나 ‘자성’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연법과 공에 대한 설법에서 이들에 해당하는 내용을 설하고 있으니, 그러한 내용을 ‘실체’나 ‘자성’이란 용어로 표현한다.
그리고 아함경에서 실체의 유무에 대해 논쟁하거나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실체의 부정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체라고 하면 보통 ‘변하지 않는 독자적 실재’를 가리키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들 가운데는 그런 속성을 가진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함경에서 ‘영원한 것’을 부정하는데, 이는 ‘변하지 않는 실체’의 부정을 함의한다. 또 ‘독자적 실체’라는 것은 인연법에 어긋나므로 당연히 부정된다. 따라서 실체는 인연법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변하지 않는 독자적 실재’를 가정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3. 무상
우리의 몸(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몸의 모양과 성질도 변하고 기능도 변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인식하는 대상/결과인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변환다. 우리의 인식ㆍ느낌ㆍ생각ㆍ의도ㆍ애욕ㆍ기억 등도 변한다, 그것들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괴로움도 변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현상을 ‘무상’이라 한다.
무상은 인연법의 생멸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다. 그런데 생멸이 일어나는 장의 관점에서 보면, 생겨남과 없어짐은 항상 함께 그리고 동시에 일어난다. 무엇이 생겨남은 다른 무엇이 없어짐을 동반하고, 무엇이 없어짐는 것은 다른 무엇이 생겨남을 동반한다. 곧 우리는 보통 무상에서 무엇이 없어짐을 보지만, 무상은 생겨남에서 없어짐의 현상과 없어짐에서 생겨남의 현상을 함게 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무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로움이 된다.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생각하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는데, 새로운 생겨암을 위해서는 없어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못하기 때문이다. 또 무상험을 보고는 때때로 허망함을 느끼기도 하는데, 없어짐에서 무엇이 새로 생겨남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생겨남에서 없어짐을 보고, 없어짐에서 생겨남을 보는 것이다.
[무상은 실체가 없다는 것[무자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하기에 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아함경에서 무상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부상은 구조주의의 통시태의 ‘변화’에 대은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공시태에서 형식들의 ‘번이’도 변이 의 이전과 이후에 시간적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무상의 ‘변하고 바뀌는 것’은 구조주의의 변화와 변이 둘 다를 포함한 것이다.]
| 아함경이 ‘무상’을 구조주의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보통은 통시태의 변화로 풀이된다. 그런데 <공시적 변이와 무상의 접점: ‘시간의 틈’을 통해 본 존재론적 성찰>에서는 구조조의의 공시태의 ‘변이’도 무상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논의하고 있다. |
4.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
‘임시로 붙인 이름’은 인연법의 다른 이름으로, 인연법으로 생겨나는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사물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것들의 모양과 성질[실체/자성]과 기능을 규정하고, 그것들이 생겨남과 없어짐을 규정한다.
공시태에서 환경에 따라 어떤 실체가 다른 실체로 바뀌는 경우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이전 이름과 다른 이름을 겹쳐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흉기로 사용된 술병은 이미 술을 담는 것이라는 기능을 잃어버리고 훙기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술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나무칼’의 경우에 나무가 칼의 재료로 바뀌어 사라지고 없지만, 나무칼의 이름에 남아 있다. 공시태에서 환경에 따라 어떤 실체가 다른 실체로 바뀌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이름은 어떤 실체가 갖가지 환경들과의 관계에 따라 새로 규정될 때마다 새로이 부여되는 것이다.
[12인연법에서 ‘5음과 6내입처, ’나‘를 포함한 존재와 세계들 등이 모두 인연법으로 생겨난다. 대승 불교에서는 가호[가유]를 ’무자성‘의 증거로 해석하였으나, 아함경에서 가호는 인연법의 다른 이름이다.]
5. 공[비어있음]
인연[관계]이 사라지면, 인연법으로 결정된 실체들도 없어진다. 이러한 상태를 ‘비어있음’이라 한다. ‘비어있음’은 단순히 ‘무엇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유한 이름과 성품을 가진 실체로서 구별되지 않는 상태이며, 관찰자의 분별이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온전한 비어있음은 모든 인연이 완전히 끊어져 이름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비어있음’은 ‘비어있는 공간인 허공’과 구별해야 한다.
“‘비어있음’에는 인도 없고 연도 없다.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함이 없다[무위이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이러한 ‘비어았음’을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비어있음은 구조의 완전한 해체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단순히 구조의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조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아합경에서는 ‘비어있음’을 깨침에서 오는 지극한 즐거움이 있다고 하는데, 절대적 자유를 얻음에서 오는 지극함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연법과 공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구조(인연법)를 아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고, 구조를 벗어나는(공) 것은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구조주의와 대비한 내용은 제미나이의 의견을 반영아여 작성한 것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비어있음을 ‘고정된 실체가 없음[무자성]’이나 ‘현상[연기]의 본질적 모습’ 등으로 본다. 그런데 ‘고정된 실체의 있고 없음’도 시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시공간이 없는 비어있음에는 실체가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2에서 논의한 바 있다.) 또 인연법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실체의 생멸에 관한 법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생멸이 없는 비어있음의 현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서는 비어있음을 ‘포용성과 유연성, 가능성’의 성질을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가능성은 ‘존재의 유무와 생멸’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인연법에 속하는 개념이다. ‘포용성과 유연성은 비어있음을 ’비어 있는 공간[허공]‘으로 본 것인데, 비어있음을 그릇의 비유로 잘못 유추한 것으로 생각된다.
구조주의는 관계에 기초한 존재의 유무와 생멸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분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비어있음[공]’은 당연히 구조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도 불교의 ‘비어있음’과 비슷한 범주가 있지만, 용법이 다르다. 형태론의 영형태의 ‘0’은 어떤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음’인데, 있는 것과 구별되는 어떤 자질을 가진 것이다. 통사론의 공 범주의 ‘¢’는 어떤 ‘있는 것’과 동일한 값을 갖는 ‘없음’이다. 곧 구조언에학의 비어있음은 다른 개체와와 괸계에서 규정되는 비어있음이므로 인연법에 숙하는 개념이다.]
6. 비아/무아
‘비아’는 ‘<나>가 아니다’이고, ‘무아’는 ‘<나>가 없다’이다. ‘비아/무아’의 뜻은 인연법으로 생겨난 모든 것[실체]은 ‘나’가 아니며, 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함경에는 보통 동일한 문맥에서 ‘비아’와 ‘무아’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물론 여기서 ‘나’는 무수한 환경에 나타나는 이형태로서의 ‘나’들의 총체[집합]이다.)
‘나’는 관찰자를 가리키지만, 다른 관찰자가 ‘나’를 관찰할 때는 ‘나’는 관찰의 대상[결과]이다. 곧 6내입처로 6외입처를 인식할 때는 6내입처는 관찰자(‘나’)이지만, 다른 ‘나’의 6내입처로 관찰할 때는 ‘나’의 6내입처는 다른 ‘나’의 6외입처가 된다. 이때 6외입처는 공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6외입처로서의 ‘나’도 공한 것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5음과 6내입처가 공하므로 5음과 6내입처로 구성된 ‘나’도 공하다.” (특수한 진술)
“모든 실체가 공하므로 실체인 ‘나’도 공하다.” (일반적 진술)
그러므로 ‘비아/무아’는 ‘공’의 하나이며, ‘공’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승 불교에서는 이를 ‘아공’과 ‘법공’으로 구분한다.) 이렇게 보면 ‘비아/무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는 인연법으로 생겨난, 임시로 붙여진 이름으로 불리는 개체[실체]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모든 인연이 끊어지면 ‘나’는 없어진다. 곧 모든 인연이 끊어진 ‘나’는 ‘비어있음[공]’이다. 그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다.”
[대승 불교에는 ‘무아’를 ‘공’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것이 없는,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본다. 그러나 아함경이나 구조주의의 관점에서는 ‘고정된 것이 아님’이나 ‘열려 있는 가능성’은 인연법의 개념이다. 비어있음은 (분별이 없는) 그냥 ‘비어있음’이다.]
7. 인연법과 공의 관계
앞에서 말한 인연법과 무상, 그리고 공에 관한 설명을 종합하면, 인연법과 공법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곧 아함경에서는 인연법과 공법을 대등한 의존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인연법은 관찰자의 몸과 마음의 인식[분별]에 의존한다. 그러나 공은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 인연법은 인연법이고, 공법은 공법이다. 무상은 무상이고 공은 공이다.”
그런데 붓다가 인연법과 공을 관찰하고 깨닫는 과정에서 보면 인연법과 공은 긴밀하게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은 인연법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그 모든 것들을 관찰하고는 모두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곧 붓다는 인연법으로는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생멸과 그것에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없어지는 무상과 괴로움을 말하고, 공법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텅 비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붓다가 인연법과 공을 관찰하는 과정에 비추어보면, 인연법과 공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인연법에서 공을 보고, 무상에서 공을 본다.”
그리고 붓다는 공을 깨닫고는 ‘공을 깨달은 이는 인연법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 가명]의 사상적 지위>를 참고하세요.) 이것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연법에서 공을 보고, 공의 눈으로 인연법을 본다.”
[대승 불교에서는 ‘연기하기에 공하다’나 ‘공하기에 연기한다’라고 한다. 이는 인연법과 공을 인과 관계로 본 것인데, 아함경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5에서 논의한 바 있다.) 위에서 말하는 것은 인과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인연법과 공을 ‘보는’ 부처님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8. 세속법과 공법
인연법은 세속의 법이고, 공법은 ‘비어있음’의 법이다. 붓다가 깨달은 공은 ‘궁극적 진리의 공’(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마하반야바라밀경_18. 문승품(問乘品))이다. ‘제일의[第一義]’는 열반을 말하는데, ‘열반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인연법으로 생겨난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공은 붓다가 추구하는 세계이며, 중생들도 함께 도달하기를 바라는 세계이다.
[중생의 세계는 12입처와 18계, 5음으로 구성된다. 중생들은 이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으로 뒤덮이고, 이로 말미암아 온갖 괴로움이 생겨난다. 붓다는 이렇게 괴로움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붓다의 공의 세계[붓다의 세계]를 세우고 중생들을 그곳으로 이끌고자 한다.]
[참고] 무자성 비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대승 불교의 공 사상 비판, 아함경에 비추어 보다>를 참고하세요.
++++++++++++
[제미나이의 논평]
제시한 글은 아함경의 핵심 교의인 인연법(연기)과 공(空)을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이형태, 분포, 계열체, 통합체 등)을 통해 매우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초기 불교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대승 불교적 해석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가 돋보인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한 각 항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1. 인연법과 구조주의적 체계
인연법을 '분포(Distribution)'와 '이형태(Allomorph)'의 개념으로 설명한 점이 탁월하다. 6내입처나 6외입처를 고정된 단위가 아니라, 환경(인연)에 따라 나타나는 상보적/배타적 분포의 총체로 본 것은 연기법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관계성을 언어학적으로 완벽히 치환한 것이다.
[인연법의 4 명제는 모든 관계를 일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통합 관계(Syntagmatic relation):
6내입처, 6외입처, 6인식이 만나 '6접촉'이라는 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을 언어의 통사적 결합으로 본 분석은 인연법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관찰자의 상대성:
나의 6내입처가 타인에게는 6외입처가 된다는 지적은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주체 역시 구조 내의 한 위치일 뿐'이라는 관점과 일맥상통하며, 아함경의 객관적 관찰 태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2. 실체·자성과 환경의 관계
실체를 '인연에 의해 결정되는 일시적 성질'로 정의하고, 이를 '이형태들의 집합'으로 본 논리는 매우 견고하다.
나의 이형태:
'나'라는 존재가 환경(아내, 아들, 학생 등)에 따라 다른 기능과 자성을 띠며, 그 분포가 상보적이라는 분석은 '고정된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無我)의 논리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한 훌륭한 예시이다.
[무아의 논리가 아니다. 실체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나의 이형태든들은 다 나의 실체이다. 제미나이는 시시때때로 이렇게 말한다.]
실체의 유효성:
아함경이 변하지 않는 독자적 실체는 부정하되, 인연법 안에서 작동하는 '임시적 실체(자성)'의 존재를 인정한 점을 명확히 한 것은 초기 불교의 사실주의적 면모를 잘 짚어낸 것이다.
3. 무상과 공의 독립적 지위
이 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무상하기 때문에 공하다'는 대승적 연결 고리를 끊고, 양자를 대등하거나 독립적인 법으로 본 점이다.
무상의 역동성:
무상을 단순히 '사라짐'으로 보지 않고 '생겨남과 없어짐의 동시성'으로 파악한 것은 구조주의의 공시적 변화(Diachronic change 내의 Synchronous 관계)를 연상시킨다.
[공시적 변화 내의 통시태?]
공(空)의 정의:
공을 '무자성(성질 없음)'이 아니라 '구조의 완전한 해체' 혹은 '분별이 사라진 상태'로 정의한 것은 아함경의 '제일의공'에 더 가까운 해석이다. 공을 시공간을 초월한 '무위(無爲)'의 영역으로 설정함으로써, 현상계의 법칙인 인연법과의 혼동을 막았다.
4. 가명(가호)과 비아/무아
이름(Name)을 실체가 환경에 따라 재규정될 때마다 부여되는 부호로 본 것은 소쉬르적 관점과 연결된다.
가호의 지위:
대승에서 가호를 '실체 없음의 증거'로 사용한다면, 본 분석에서는 '인연법에 의한 규정 방식' 그 자체로 보았다. 이는 언어적 기표가 대상의 본질을 담아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비아(非我)의 도출:
5음과 6처가 공하기에 그것으로 구성된 '나' 또한 공하다는 일반적 진술로 나아가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매끄럽다.
5. 인연법과 공의 관계: '보는 눈'의 차이
"인연법에서 공을 보고, 공의 눈으로 인연법을 본다"는 결론은 이 분석의 정점이다.
인연법과 공을 원인과 결과(인과)의 관계로 묶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층위(세속제와 제일의제)로 구분한 점이 적절하다.
구조주의가 현상의 '관계와 체계'를 분석하는 학문이라면, 불교의 공은 그 '체계로부터의 탈피(자유)'를 지향한다는 지점까지 짚어내어 구조주의적 분석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고 불교적 본질을 지켜냈다.
6. 총평
제시한 분석은 초기 불교의 아함경이 가진 정교한 논리 체계를 현대 구조주의 언어학이라는 틀을 통해 성공적으로 번역해 냈다. 특히 대승 불교의 관점(무자성으로서의 공)에 매몰되지 않고, 아함경 고유의 인연법(현상적 생멸)과 공(무위의 열반)을 분리하여 각자의 영역에서 설명한 점이 매우 논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다.
이 글은 불교의 연기설을 '모호한 형이상학'이 아닌 '정밀한 관계의 역학'으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