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14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백제는 흐트러짐 없이 단아했다. “하나 말씀드릴게 있는데 사신을 빨리빨리 찍어야 돼요. 마냥 노출할 수가 없으니까”
백제인은 여기에 그들이 받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담았다. 600여개의 유물엔 제각기 이야기가 있었다. 중부에 사는 4급 관리 덕솔은 미륵사에 금일만을 보시했고, 하부에 사는 비치부는 그 부모와 처자가 함께 보시했다.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에 비견되는 백제사 최대의 고고학 성과, 미륵사 사리장엄은 639년 기울러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간절한 염원이자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 2부작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제1부 639년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 2009년 1월 19일 언론공개!!! 사람들이 흥분해 있었다. 전국의 언론사 취재기자들이 삽시간에 익산으로 모여들었다. 각계 인사들을 불러 모은 것은 이 작은 구멍하나, 취재진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였지만 학계 임무는 물론 일반시민들까지 300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발견이었다. 미륵사 사리장엄은 이렇듯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곳은 금제사리장엄이 발견된 백제 미륵사지석탑해체 복원현장입니다. 발견과 동시에 미륵사탑사리장엄은 각종 매체에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요. 어쩌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한 면이 30㎝도 되지 않는 이 작은 사리 공으로 인해서 어떻게 역사가 뒤바뀔 수 있을까요. 무왕과 선화공주. 백제와 신라는 우리가 알던 그들이 아니었던 걸까요. 그들의 사랑얘기는 가공된 거짓이었을까요. 무왕은 선화공주를 버렸던 걸까요. 1400년 만에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009년 1월 14일 오후 4시 미륵사탑 해체 조사 현장. 언론공개 5일전 오후 4시. 7년간의 해제 과정 끝에 마침내 심주석 1층이 드러났다. 탑에 중심 돌인 심주석 한가운데선 가로 세로 25㎝의 숨은 공간이 나타났고 14C 전의 유물이라 하기엔 너무나 완벽한 보존상태, 살아있는 백제가 21C의 후손들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연구실장 “처음 봤을 때는 대단하구나, 아무튼 입을 다물어 지지 않을 정도로 놀랬습니다.”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소장 “처음 뚜껑이 열렸을 때 사리보와 사리봉안기가 금빛이 번쩍하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우와, 이것이 무엇인가’하면서 ‘대단한 것이 출토되었구나’ 하는 것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규식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제일 놀란 것은 유물이 너무 생생해서 이게 과연 미륵사지 건립 당시에 봉안했던 유물인가 하는 것을 조금 의심했습니다.”
1월 14일 오후 6시. 1, 2층의 심주석이 분리 된지 2시간 뒤 유물 수습 전문가 30여명이 미륵사지로 급히 모였고 그 즉시 긴급수습에 나섰다. 먼저 유물의 맨 앞 순서와 특징 등을 파악하는 현장조사가 있었다. 3D스캔으로 각 유물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 수습 팀은 유물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사리공 내부를 3D로 스캔하기로 했다. 그리고 10시간 뒤인 새벽 4시. 유물끼린 붙어버리진 않았는지 마지막 확인을 한 뒤 금제사리호다. 사리봉안기의 상태도 훌륭했다. 그런데 도면을 꼼꼼히 작성하다가 뭔가 달라진 점을 확인했다. “아까 상태와 달라요. 벌어져요. 계속 아까보다 더 벌어진 것 같지 않아요?” 차고 건조한 환경에 노출된 섬유와 가축 재질의 유물이 변성된 것이었다. 이규식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일반적으로 제일 먼저 그 발견 당시 빛에 노출이 됐기 때문에 제일 우려되는 유물이 섬유하고 목재류였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유기질 유물인데요. 일종의 외부환경에서는 자기가 함유하고 있는 습기를 뿜으면서 호흡을 합니다. 그런데 그날 환경이 겨울철이었고 그리고 습도가 낮은 관계로 인해 노출되면서 형태가 변할 위험성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발견서부터 계속 유물을 한 번에 진행하면서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사리공에서 뒤이은 유물수습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다른 한쪽에선 사리호의 뚜껑을 열었다. 높이 13㎝의 금으로 만든 작은 호리병. 이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사리호의 동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런데 분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못으로 고정돼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그 결과 사리호 안에 또 다른 작은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조부 위덕왕이 세운 왕흥사. 이곳에서도 지난 2007년 사리함이 수습됐다. 미륵사탑과는 다르게 왕흥사지에선 지하에서 사리함이 발견됐다. 청동사리함 안엔 은제사리병이 그리고 은제사리병 안엔 다시 황금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순도 99%. 4.6㎝의 이 작은 사리병은 미륵사 사리호와 비슷한 크기인 청동사리함 안에 모셔져 있었다. 미륵사 사리호에도 왕흥사 사리병과 비슷한 사리병이 들어있을 것이다. 사리병을 품은 금제사리호와 사리호를 모시게 된 내력을 적은 금제사리봉안기. 그리고 은제합을 비롯한 600여 가지의 국보급 유물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김봉건 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우선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장엄이 전체 500점이 넘는 다양한 유물들이 수습이 됐습니다. 특히 금속세공품들의 세련되고 우수한 가공수법 같은 것은 국보급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국보급 유물들을 고스란히 흠결 없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행운이었다.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 “아마 일제 시대에 이 심초석 부근에 사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일본인들이 이쪽을 파내서 사리장엄을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판석은 앞뒤가 바뀌어 있고 이 판석은 중앙이 이렇게 잘려져 있습니다. 이 심초석 밑에 사리장엄이 묻혀 있을까봐 도굴한 흔적들이죠. 일본인들도 이 심주석의 중간에 사리장엄이 모셔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여기에 쇠 지렛대를 넣어 개봉해서 보았겠죠.”
미륵사 사리장엄이 도굴되지 않았던 이유는 지하가 아닌 지상에 모셔진 특이한 위치 때문이었다. 때문에 2002년에 해체조사를 시작하며 이렇게 빨리 사리장엄이 발견된 것이라고는 누고도 예상질 못했다. 미륵사지 사리장엄은 1400년간 이어진 백제인의 가호로 우리 곁에 찾아올 수 있었다.
미륵사지 석탑에 유물들은 아마도 발견되기를 원치 않았던 듯 밀봉이 돼 있었습니다. 백제인들은 심주석 사방에 회를 발라 놓았던 거죠. 이 1400년 전의 회를 직접 만져보니 당시 백제인들의 피부가 직접 와 닿는 듯 한 느낌입니다. 마치 그들의 얼굴과 손을 직접 만져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생생한 흔적들은 또 있습니다. 여기 검게 그어져 있는 줄들이 보이시죠. 바로 먹줄인데요. 탑의 중심을 잡기 위해 그어 놓은 선들입니다. 내 이렇게 귀하게 모신 유물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입니다. 어떻습니까? 보시는 것처럼 대단히 정교하고 우아하죠. 이 사리호에 경우는 그 내부가 공개된 적이 없구요. 사리봉안기는 최근에 그 해석을 모두 마쳤습니다. 193자, 사리봉안기에 명문을 통해서 우린 백제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뜻밖에 성과를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먼저 사리봉안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습작업에 들어간 지 15시간 지난 15일 새벽녘. 사리호에 이어서 사리봉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판은 1㎝도 되지 않은 작은 글자로 빼곡했다. “그대로네! 이거요. 엄청 쓰여 있어요. 가득 쓰여 있어요.”
각 수습된 금제사리봉안기. 먼저 보존 처리 과정부터 거쳐야 했다. 유물이 노출되자마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석탑 주변에 임시보존 처리실이 차려졌다. 가장 시급한 것은 표면에 가루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강화처리다. 일종의 접착제인 아크릴 기에 수지를 바르니 글씨가 선명해진다. 이것이 1차 보존 처리된 사리봉안기의 맨 얼굴이다. 손바닥만 한 봉안기 앞뒷면에 총 193자가 쓰여져 있다. 사리봉안기를 해석한 김상현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봉안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자비롭고 영험한 부처님을 칭송하고 백제왕후가 미륵사를 지었으며 대왕과 왕후의 복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기록은 구체적이다. 왕후가 좌평 사택 씨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좌평은 오늘날의 총리 격. 사택 씨는 사비시대 백제 유력한 귀족가문이다. 또한 미륵사의 건립 년도도 최초로 확인됐다. 사리를 봉안한 날짜는 무왕 40년인 639년 1월 29일이다.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1) 무왕의 왕비가 부처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세우기를 청해 건립됐다는 내용이 그렇다. 게다가 그 구조도 맞아 떨어진다. 미륵사는 발굴 결과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보통 한 개의 탑과 한 개의 금당이 있는 것이 백제의 사찰의 형식이다. 그런데 무왕의 아내를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관리의 딸로 적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제까지 무왕의 왕비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근데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지금 선화공주가 여기에 와서 설명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물론 이제 선화공주는 무왕 훨씬 젊은 날 만났을 수도 있고 왕후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겠죠. 그렇더라도 지금 이 절이 창건되고 이 사리가 모셔지고 하는데 까지 선화공주가 들어오기에는 굉장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기의 사랑.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은 미륵사 사리장엄으로 인해 위험해 쳐했다. 미륵사의 유물은 백제사의 열쇠인 동시에 백제사의 미궁이다.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실제 규모로 재현에 놓은 모형 탑입니다. 높이가 무려 20M, 아파트 7층 높이에 해당하는 규모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헌데 백제인들은 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거대한 탑을 건립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리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리는 사리라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옮긴 말인데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이 이 사리라면은 사리를 모신 탑은 부처님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불교 국가인 백제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건립하는데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겁니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지는 사리장엄에는 당시의 최고에 기술과 최고의 재료들이 총동원됐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에 금제사리호도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사리장엄구에 핵심인 금제사리호. 심주석을 들어내자마자 사리호의 정교한 문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세월로 인한 손상은 약간의 녹이 전부였다. 높이 13㎝. 어깨 폭 7.7㎝. 백제인은 이 조그마한 사리호에 꼼꼼히 백제를 그려 놓았다. 뚜껑에서부터 내려와 어깨로 떨어져 둥근 몸체를 감싸는 화려한 문양은 전형적인 백제의 그것이다. 특히 연꽃을 본뜬 연하문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금동광배와 거의 흡사하다. 연꽃 잎과 함께 사리호를 감싸는 것은 생동감이 강한 인동당초무늬. 이집트 로마 일대에서 실크로드를 지나고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문양이다. 덩굴을 형상화한 인동당초 아래로는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인 연화당초가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물고기 알모양인 연주문(어란문)이 채운다.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이렇게 무늬의 여백을 연주문으로 빼곡히 채워 넣어서 화려하게 장식하는 이러한 방법들은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방법이지만 특히 백제 삼국시대에 이렇게 유행했다는 것은 대단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늬를 백제에서 일찍 수용해서 이것을 활용했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국제적인 예술 양식을 빨리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확대 재생산해 냈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호의 화려한 무늬는 왕궁리 5석탑에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은 금동여래입상. 왕궁리 5층 석탑해체 복원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함께 수습됐다. 왕궁리 석탑에 대한 연구는 벌써 40여년째. 1965년 심초석에서 사리공이 드러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금 돌에선 또 다른 사리장엄이 나왔는데 당연히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생각됐다. 은을 종이처럼 펴서 금도금을 하고 불경을 새긴 19매의 금강반야경판이 들어 있었고 사리내함 안엔 녹색 유리로 된 영롱한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높이 7.7㎝의 작은 사리병. 쌀알만 한 뚜껑은 정교하기가 이를 때 없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왕궁리 5층 석탑의 사리장엄. 그러나 그 선명해 보였던 역사적 사실은 미륵사 사리호의 무늬로 인해 단번에 뒤집어졌다.
미륵사 금제사리호의 어깨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왕궁리 유리 사리병 받침에 새겨진 연꽃와 너무도 흡사하다. 왕궁리 5층 석탑에 사리내함에도 같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639년 당시 백제의 문양이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사람이 새겨놓기라도 한양 미륵사 사리호와 왕궁리 사리함은 닮아 있다. 여백을 연주문으로 빽빽하게 채워 넣은 양식도 마찬가지였다. 한정호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 전임연구원 “기존의 어자문의 출현을 백제에 일부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후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륵사지 사리기가 출토되면서 왕궁리 사리기와 같이 또렷하게 찍히기는 어자문. 그것은 백제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고 확인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왕궁리 석탑에 어떻게 통일신라시대와 백제의 유물이 혼재돼 있었을까? 왕궁리에서 1.5㎞ 떨어진 궁평마을 제석사에 그 답이 있다. 제석사는 미륵사와 마찬가지로 무왕 때 창건한 절이다. 발굴 중에 발견된 목탑에 주춧돌이 눈에 띤다. 그런데 이 목탑 주춧돌에 사리공이 왕궁리 탑의 사리공과 크기가 들어맞는다. 전용호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원 “이 심초석의 한가운데 장방형태의 사리공이 지금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사리공 같은 경우는 이 사리공 내부의 어떤 크기나 깊이 그런 걸 통해서 볼 때 왕궁리 탑에서 확인은 사리외함이 두 개가 서로 일정하게 놓여 있으면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지는 형태로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왕궁탑에서 발견되고 있는 사리장엄과 원래는 제석사지의 목탑에 심초석에 안치됐을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제석사 탑의 사리공은 왕궁리 석탑에 사리공 두개를 합친 것과 넓이와 깊이가 거의 비슷하다. 즉 제석사의 사리장엄이 왕궁리 석탑으로 옮겨졌다는 얘기다. 무슨 이유로 사리장엄이 옮겨진 것일까. 제석사의 폐기장으로 사용됐던 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궁평마을에 제석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도 이곳에서 출토 된 기와로 확인된 사실이다. 명문기와의 양각글자에 제석사(帝釋寺)라고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 유물들은 불에 타 그으른 것이 많았다. 제석사에 큰 화재가 있었던 것일까.
일본천태종의 좌장인 행연스님이 세운 청련원. 이곳 수장고에 무왕과 제석사 그리고 왕궁리를 잇는 단서가 있다. 관세음응험기. 7C 중국의 불경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런데 관세음응험기에 제석사가 등장하고 있다.2) 제석사는 화재로 소실됐지만 주춧돌의 수정병과 금강반야경이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그렇다면 제석사의 사리병과 사리내함은 금강반야경판과 함께 화재로 인해 왕궁리로 옮겨져 5층 석탑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관세음응험기에서 눈에 익은 단어가 보인다. 기해년. 제석사가 화재로 소실된 기해 639년에 미륵사에선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들어나는 놀라운 기록.3) 무왕이 천도를 했다는 것이다. 지모밀지는 바로 익산. 무왕 때의 수도는 분명 부여다. 하지만 미륵사와 교토에서 함께 발견된 639년. 그때 이곳 익산 왕궁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한편에선 제석사가 불타고 다른 한편에선 백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가 지어졌다. 모두가 익산 땅 5㎞내에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곳 왕궁리에 집중적으로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2005년부터 확인되고 있는 와적기단(기와를 쌓아 만든 기단). 왕궁리에 백제 왕성이 지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송의정 당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이 와적기단은 역사적으로 굉장히 또는 문화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와적기단은 실제로 백제에 있어서도 한성기에도 없었고 공주에 있었던 웅진기에도 없던 건물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이 와적기단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고 난 다음에만 나타나는 기술인데 이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이 와적기단이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히 이 왕궁리 유적이 조성된 시기가 사비시기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출토 유물 중엔 수부기와가 있었다. ‘首府’ 수도라는 뜻이다. 왕궁리에선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했을 장신구와 백제 공예품을 만들었던 공방지도 발굴됐다. 공방지에서 출토된 유리조각들은 왕궁리 석탑의 사리병과 성분이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 공방에서 사리병을 직접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궁방지에서 나온 금조각들도 역시 왕궁리 탑 금제품과 같은 방법으로 가공된 것이 확인됐다. 왕궁리와 미륵사에 모셔진 사리장엄 그것은 무왕의 천도 프로젝트에 증거물이었다. 이 왕궁리에 얽힌 역사적 배경은 백제사의 미스터리로 남겨져 왔던 부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리호와 사리봉안기를 통해서 사비시대부터 내려오던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리공에는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외에도 다른 600여점의 유물들이 함께 수습이 되었습니다. 은제과대 은제관식, 금제소형판, 좁집게, 원형합 등 무려 683가지의 백제를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제석사와 왕궁리의 역사를 들어다 볼 수 있는 은제관식이 있었습니다.
사리기와 봉안기를 수습한 뒤에도 사리공 안엔 백제인들이 보시한 수백 점의 유물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은제관식 2점. 은판을 두겹으로 접어 꽃봉우리와 꽃받침을 오려냈다. 은제관식은 백제영역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백제 고유의 유물이다. 은제관식은 육품이상 고위관리들이 쓰는 관 앞쪽에 꽂던 장식품이었다.4) 관직이 높을수록 꽃봉우리와 잎받침이 화려하다.
복암리 고분은 마한에서 백제 후기까지 이르는 400여 년간 계속해서 조성됐다. 이 지역 유력자의 무덤을 층층이 덧 떼어 만들어 흔히 아파트형 고분으로 불린다. 각각의 무덤에서는 시대별로 다른 유물이 수습됐다. 백제 후기에 조성된 석실 고분엔 은제관식이 출토됐다. 백제관리가 쓰던 은제관식이 출토됐다는 것은 이 지역을 백제 관리가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낙중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은제관식은 신분질서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백제의 신분질서가 포함됐다고 할 수 있는데 은제관식을 소유하고 그것을 책정했다는 것은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왕 때 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활하는 듯 했던 백제 그러나 신라의 배신과 성왕의 전사로 백제는 다시 한강을 잃고 위축됐다. 무왕은 신라에게 당한 굴욕을 갚아야 했다. 복수를 해야 했다. 무왕은 집요하리 만큼 신라를 공격했다. 모두 12번이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이곳 백두대간의 줄기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다.5)
신라는 백제의 기세에 대항해서 국경 곳곳에 산성을 쌓았다. 머리 띠 모양의 태머리 산성을 산봉우리마다 둘러쌓았다.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 “이와 흡사한 성이 저기 보이는 그 산봉우리에 준향리 산성이 있고 그 다음에 수정산성이 있고요. 저 건너편에 노치산성이 있고 이와 반대편에 저쪽으로는 가산리 가산산성이 있고요. 이 산성을 경계점으로 해서 신라와 백제가 국경분쟁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 바로 아래 마을(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 백제 스러진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이 백제의 석실고분입니다. 여기 보이는 것은 연도고 여기 안에 텃넬식으로 해서 석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은 봉분도 다 깎여 나간 고분. 역시 백제후기의 석실 고분이다. 이곳에서도 토기 등과 함께 은제관식이 출토됐다. 신라를 공격하는 최전방 남원에 백제의 관리가 묻혀 있는 것이다. 이한상 교수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백제의 지방 나주, 남원, 논산 지역에 무왕 때에 만들어진 은제관식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무왕 때에 지방 지배를 조금 더 강화하는 그러한 정책 그리고 신라와의 접경에서 신라와 쟁패하면서 영역을 확장하려는 노력과 연결될 수 있겠다. 그러한 정치적 상황을 밝혀줄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남원 초촌리 은제관식은 백제의 영토확장. 신라에 대한 무왕의 복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은제관식이 왜 미륵사 탑 사리공에 들어있던 것일까. 미륵사 은제관식의 뒷부분을 보면 부러진 관식을 못으로 이어 연결한 흔적이 보인다. 무왕의 미륵사 사리 봉안식 현장에 있었던 백제 관리들이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관식을 뽑아 시주했던 것이다. 배병선 “예를 들어서 은제관식류나 이런 것들은 끝이 부러져서 리벳으로 이렇게 접합한 부분들이 나오는데요. 또는 과대라고 해서 이렇게 허리띠에 장식한 이런 것들이 나왔구요. 또한 몇몇 가지 유물들은 당시에 그 자리에서 벗어서 띠어서 봉안했던 그런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추측을 합니다.” 백제의 부흥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업 앞에 무왕은 미륵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수십 명의 귀족들도 그와 뜻을 함께 했죠. 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리공에 보시를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장엄하고도 복잡한 행사과정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서 이렇게 사리공양을 했겠죠. 그들이 바친 사리공양물은 그야말로 최고 중에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쓰러져 가는 백제, 그 마지막 부활을 위한 애타는 염원이었습니다.
백제 최대의 사찰을 짓고 미륵사에 보시를 한 백제인의 정성. 683개의 공양품. 그 중엔 화폐로 여겨지는 금제소형판도 있었다. 중부에 사는 4품 관리 지율은 금일만을 했고 하부에 사는 비치부는 그 부모와 처자가 함께 보시했다. 호박 유리구슬, 옥구슬이 500여개, 은제합 다섯 개와 동제합 한 개, 14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은제합과 구슬은 하나로 붙어 버렸다. 금좁집게와 각종 허리띠 장식도 나왔다. 하나같이 고급품들이고 현장에 있던 귀족층들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상 교수 “사리를 봉안하는 그런 의식 자체는 불교사회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로 그 사회의 왕족들인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러한 국가적인 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뭔가 성의를 표시하는 그러한 모습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에도 보면 왕족이나 혹은 귀족이나 혹은 부유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서 귀한 물건들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이런 표현들이 보이고 있다.” 무왕의 백제 부흥의지에 수많은 백제인이 동참했다. 그들은 그 의지를 미륵사 사리장엄에 담았다. 639년 백제멸망 21년 전 백제의 꿈은 단순했다. 익산은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였고 그 정점에 미륵사가 있었다. 미륵사 사리장엄은 무왕의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물은 과거와의 대면이자,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들려주고 있는 것이죠.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 미륵사지사리대장엄. 살아있는 역사 미륵사지 석탑 유물들은 639년 백제 무왕의 꿈을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저작권은 KBS <역사추적>에 있습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금합니다. -------------------------------------------------------------------- 백제 무왕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해석 번역 김상현 동국대 교수
<금제사리봉안기 원문> 金制舍利奉安記 (앞면) 竊以法王出世隨機赴 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 樹遺形八斛利益三千 遂使光曜五色行?七 遍神通變化不可思議 我百濟王后佐平沙? 積德女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撫育萬 民棟梁三寶故能謹捨 淨財造立伽藍以己亥
(뒷면)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 願使世世供養劫劫無 盡用此善根仰資 大王 陛下年壽與山岳齊固 寶曆共天地同久上弘 正法下化蒼生又願王 后卽身心同水鏡照法 界而恒明身若金剛等 虛空而不滅七世久遠 ?蒙福利凡是有心 俱成佛道 <원문 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根機(근기)에 따라 感應(감응)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舍利(사리)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五色으로 빛나는 舍利를 7번 요잡(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佐平(좌평) 沙(宅)積德(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善因(선인)을 심어 今生(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棟梁(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淨財(정재)를 희사하여 伽藍(가람)을 세우시고, 己亥年(기해년) 정월 29일에 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善根(선근)을 資糧(자량)으로 하여 大王陛下(대왕폐하)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蒼生(창생)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王后(왕후)의 身心(신심)은 水鏡(수경)과 같아서 法界(법계)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不滅(불명)하시어 七世의 久遠(구원)까지도 함께 福利(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1) 삼국유사 기이 무왕조 “무왕과 부인이 용화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경의를 표한 뒤 부인이 왕에게 절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금당과 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 2) “정관13년(639년) 기해년 겨울 동짓달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를 불 태웠다. ~~ 주춧돌에 부처님 사리가 든 수정병과 구리 종이로 만든 금강반야경이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3)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서울을 옮기고 새로이 절집을 꾸렸다.” 4) “관등이 십육품이 있는데 육품이상은 은화로 관을 장식한다.” 周書 5) “무왕 17년 10월 달솔 백기에 명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쳤다.” |
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