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1995): 세기말의 영화사에 던지는 제언
에미르 쿠스투리차(Emir Kusturica) 감독
ㆍ줄거리
1941년 나치스 지배하에 있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블랙키(라자르 리스토프스키)와 마르코(미키 마노일로비츠)는 전쟁을 교묘히 이용해 지하(언더그라운드)에서 무기 밀매로 떼돈을 벌고 무기 생산고까지 만드는데 지하의 빨치산들은 이들을 전쟁 영웅으로 착각한다. 블랙키는 평소 흠모한 여배우 나탈리아(미르야나 요코비츠)와 강제로 결혼하지만 반나치스 활동으로 체포된다. 마르코는 블랙키를 가까스로 구출하여 지하 세계로 숨기고 블랙키의 아내와 동거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전쟁 영웅이 된 마르코는 티토 정권하에서 고위 관료가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지만 블랙키는 계속 지하 세계에 남아 있다. 마르코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지하 세계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리지 않는다. 해방을 모르는 지하 세계는 전쟁 준비를 계속한다. 어느 날 사고로 지하 세계가 파괴되어 마침내 지상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눈을 뜨고 진실도 파악한다. 세월은 흘러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전쟁에 말려들고 마르코와 나탈리아는 잔존한 블랙키의 지하군에게 살해된다.
역사적 과거와 현실은 분명히 시간적으로는 단절된 것이 아니지만 영화 속에서는 마치 동떨어진 것처럼 보여준다. 감독 쿠스투리차는 혼돈과 망각 속에 지하 세계의 과거와 지상 세계의 현실을 완전히 별다른 모습으로 전개하며, 현상이 가질 수 있는 양면성의 경계도 깨뜨린다.
1995년 제48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ㅡ두산백과에서
ㆍ선후평
데이비드 그리피스에서 시작한 영화 기행이 쿠스투리차에서 끝난다. 지난 10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리고 영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연히도 <언더그라운드>의 탄생은 영화 탄생 100년과 겹친다. 또한 1995년은 성공적이라는 디지털 영화 <토이 스토리>가 제작된 해로 그것이 예시하고 있는 미래의 영화는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가 지향했던 사실주의나 멜리에스의 바이오스코프식 판타지라는 관행적 이분법을 분명 무색하게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제작된 <언더그라운드>도 영화 속의 인물 마르코가 티토를 만나는 컴퓨터 합성장면을 삽입해, 말하자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접합시켜 새로운 영화적 현실감을 구성하고 있다. 상당수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고 격분시키기도 했던 <언더그라운드>에서 가장 오해(혹은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바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현실을 뒤섞어 이제는 사라진 유고의 과거와 현재에 개입하는 방식인 듯하다.
영화는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고 시작한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1941년의 베오그라드 무기 밀매를 하던 블래키와 마르코는 지하실에 무기 생산고를 만든다. 이로부터 3년 후, 마르코는 독일군에 잡혀 있던 블래키를 구출해 지하실에 숨게 한다. 하지만 유고가 해방된 후에도 마르코는 지하실 사람들을 속여 계속 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블래키가 사랑하는 여자 나탈리아를 빼앗고, 티토의 측근이 되어 부와 명예를 누린다. 블래키의 아들 요반의 결혼식 날에 언더그라운드는 사고로 파괴되고,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인 것으로 믿고 있는 블래키는 자신의 영웅담을 영화화하고 있는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진짜 총을 발사한다. 1992년, 다시 전쟁에 휩싸인 베오그라드. 블래키의 지하군은 마르코와 나탈리아를 살해한다. 마지막, 블래키의 죽음이 잉태한 꿈의 장면. 모든 죽은 사람들이 햇살 밝은 곳에서 축제를 벌이는데,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이 육지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표현 물질들, 즉, 신파조의 연극, 영화 속에서 제작되고 있는 영웅주의적 가짜 영화, 실제 뉴스릴 속에 삽입된 가상의 상황과 인물들은 1941년에서 1992년이라는 명시된 역사적 시간과 베오그라드라는 구체적 공간과 땅 위 현실세계에서 망각된 언더그라운드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것으로 보이게 한다. 또한 <언더그라운드>는 균질적인 리얼리즘의 언어 대신 불경스럽게 보이는 이질 언어들을 동원해ㅡ한 비평자는 니체적 욕망, 디오니소스주의의 언어로 파악하며, 쿠스투리차 자신은 집시의 문화, 이교도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ㅡ현실과 몽상, 창조와 파괴, 역사와 종말, 진실과 거짓, 그리고 인간성과 야수성이라는 범주들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있으며(하지만 결코 성차의 문제는 탈경계화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붕괴의 와중에서 잉태되는 절망과 희망, 또 그 이후를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뤼미에르식으로 발전, 진화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쿠스투리차의 영화는 분명 이단이다. 또 현실의 자명성과 역사의 텔로스를 믿는 이들에게 쿠스투리차의 뫼비우스 띠는 필경 재앙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이단과 재앙이 일으키는 혼돈 속에서 생성되는 질서를, 즉 종말과 유토피아가 맞닿아 있음을 에필로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더그라운드>를 세기말에 대한, 이제 1세기를 막 넘긴 영화라는 매체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도 과잉 독해는 아닐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건국과정을 인종차별주의를 전혀 숨기지 않은 채 과시했던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부터, 인종 분쟁으로 분화된 옛 유고를 애탄하는 <언더그라운드>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길을 걸어왔는가.
20세기 그 100년간 영화는 역사와 문화를 재구성해 왔고, 스크린은 컴퓨터의 윈도 체계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세상과 관객을 잇는 인터페이스로 기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창이며 거울이라는 것은 은유 이상이다.
ㅡ김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