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캡슐 하나 만들어
김 상 립
날이 밝자 집을 나선다. 새벽부터 깨어있었으니 몸도 풀 겸 산책을 나섰다.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는 데 중간에 낯 익은 아주 머니 둘이 오른다. “날씨가 쌀쌀한데 아침 일찍 나가 시네요?”하니, 등에 진 가방을 보이며 파크골프장에 간단다. “햇살이나 퍼지면 가시지 않고요” 했더니, 어찌나 사람이 붐비는지 지금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단다. 우리동네에 노인 복지관이 두 군데 있는데, 거기서도 노래나 사교춤도 배우고, 에어로빅과 체조, 당구나 탁구, 서예반이 운영된다. 복지관 간다고 몇 몇이 어울려 다니며 하나같이 재미 있다고 밝은 얼굴로 열심히들 다닌다. 나는 그들과 어울릴 군번도 아니요, 외부출입을 잘하지 않으니 그런 기회를 만들기도 어렵다. 또 여럿이 함께 여행을 다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도 큰 기쁨이요 즐거움인데, 기운이 달리고 입맛마저 잃은 처지라 나는 그만 스스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가 유일하게 매달려 있는 수필에서도 재미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으니 주눅이 든다. 종이 책이 잘 읽혀지지 않는 시대에 작품이 재미라도 있어야 읽어줄 것이라는 얘기에 달리 항변할 여지도 없으니. 그러나 나에겐 의문이 있다. 도대체 재미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 것이며, 과연 모든 독자에게 똑 같은 재미가 통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예하면 나는 인문학에 흥미가 있다.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면 인간 학, 지구 학, 종교 학, 정신과학에 관련된 그런 학문이다. 하여 대개의 수필가들이 ‘재미있다’하는 작품이 나에게는 똑 같은 즐거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기가 좋아하는 재미를 찾아 끼리 문화를 열심히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이 택한 취미에 동조하는 사람들끼리 동아리를 만들고 재미있게 지내면서, 다른 영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재미는 문학이 아니어도 도처에 넘쳐나고, 새로 생겨난 재미에 환호하며 몰려 들기도 한다. 코로나 시기에 일어서기 시작한 트롯이 이제 온 나라를 뒤흔든다. 중년 여성을 중심으로 팬클럽을 만들어 점 찍은 가수를 따라 전국을 누빈다. 나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만일 그 사람들이, 이른 새벽에 깨어나 컴 앞에 앉아 글 쓴다고 끙끙거리는 늙은 나를 보면, 도대체 왜 저런 짓을 할까 의아해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모두가 엇비슷한 구석이 있다. 일단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진짜 재미있고 좋지만, 남이 즐기는 일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수필 쓰는 사람들도 굳이 관심 없는 이들의 눈치를 보며 애먼 몸살만 낼 게 아니고, 그냥 우리끼리 즐겁게 사는 게 어떠냐고 의견을 내는 이도 있다. 하기야 전국 적으로 보면 수필 인구가 1만명은 훨씬 넘었을 것이고, 그들 주변에도 수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을 터이니, 수필 가만 결속해도 제대로 판을 벌릴 수가 있을 터이다. 그런데 거기에도 난제가 있다. 원래 재미란 게 사람마다 다르고, 개인의 환경이나 주변분위기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까닭이다. 오늘 재미 있던 일이 내일 시들해지기도 하고, 없었던 재미 거리가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암만 수필가들만의 재미를 대중적인 재미 거리로 확장시키려 해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필가 개개인의 얘기를 풀어 내면서, 그 내용을 일반화하려는 노력마저 포기 한다면 외부독자는 아예 기대하기 어려울성싶다.
원래 나는 재미있는 수필보다 좋은 수필을 좋아했다. 그냥 좋은 수필 보다는 주제와 메시지가 분명한 수필을 더 아꼈다. 재미는 있어도 읽고 얼른 잊혀지는 글보다, 재미가 없어도 기억에 길게 남는 수필을 더 사랑했다. 예부터 전해내려 오는 소위 고전이라는 수필이 어디 재미를 위해 쓰여졌던가? 설령 수필에서 재미가 제일 중요한 게 사실일지라도, 지나치게 집착하면 오히려 재미를 잃게 될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글이란 게 재미가 있어 읽기도 하지만, 제게 참고가 되거나 도움 또는 궁금해서 읽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 작품이 오늘은 외면 당하더라도 보다 멀리 내다보고 가면 반드시 길이 있다고 믿는다.
현대과학의 발전은 끝을 몰라 AI시대를 급 발전 시켰고, 이제 딥페이크(deepfake)란 기술까지 나와 온 세상을 놀라게 한다. 자칫 이런 기법은 예술세계에도 충격을 줄거라 예상된다. 예를 들면 AI는 가짜 가수나 배우를 생산하기도 하고, 작곡은 물론 놀라운 그림도 그려낼 것이다. 물론 시나 소설, 수필도 마찬가지다. 만약 AI의 작업내용을 재미 쪽으로만 발전시켜 대중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는 다면, 예술 계로서는 심각한 도전을 맞을 것이다. 대체로 포장을 지나치게 할수록 내용물은 실속이 없듯이, 재미나 형식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본질이 되려 묻혀버릴 우려가 있다는 점을 나는 걱정한다. 그러니 작가가 만든 작품을 두고 너무 재미, 재미 하지 말고, 자기가 속한 예술부문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할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환경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 즉, 많은 이들이 선망하고 있는 재미라는 요소에 반하여 작심하고 재미없는 글을 써보자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보편 타당한 불변의 가치, 즉 진실이나 사랑, 연민, 희생, 용기, 믿음과 같은 철학적 요소를 글의 행간에 깔아 두려는 모사(謀事)를 꾸미는 중이다. 예술의 핵심은 진실을 통한 감동이다. 그래서 암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더라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런 내용을 찾는 독자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먼 훗날을 기약하며 미발표 원고 중에서 엄선하여 책 한 권 분량만 챙겨 USB에 저장하고, 출판비용으로 작은 금덩이 하나도 장만하려 한다. 이것을 타임캡슐에 넣고 후대에 넘겨주며 ‘부디 잘 보관하였다가 100년후에는 무조건 출판하라’고 유언을 남길 것이다. 물론 그 결과를 나는 모른다. 또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르기는 마찬 가지일 터이다. 오직 그 당시를 사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니까. 그것뿐이다. (2024. 3)
첫댓글 백 년 후에도 통하는 글은 완전 재미있는 글이겠지요
진실을 통한 감동에 공감합니다. ^^
이미영선생
잘 계시겠지요?
간만입니다.
그냥 멀리보고 진리를
그리며 작품을 구상합니다. 결과는 모릅니다. 내가
관심 가질일도 아니고요.
"예술의 핵심은 진실을 통한 감동이다. "
적극 동감합니다. 남평 선생님의 이런 글은 이웃에게 매우 유익한 글입니다. 지금 우리 수필가들의 양산하는 작품을 보면 자기 만족용일 뿐 이웃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글을 독자들에게 읽어 달라고 하는 그 자체가 염치 없는 행위입니다. 이웃에게 전혀 유익이 없는 작품집을 출판한다고 거창하게 출판 기념회를 열고, 이웃들을 오라고 초청하여 자화자찬의 잔치를 벌이는 행위를 부끄럽게 여겨야 진정한 문학이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문학의 본질은 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나아가는 거기에 있음을 상기할 때 선생님의 작품은 당대에도 매우 가치가 높은 문학이 된다는 점을 말씀 올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이 큰 격려를 주시니 고맙습니다. 수필을 쓴다는게 제 스스로의 각성과 그 결과가 누군가에게
생각의 작은 실마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뭐 그런
생각뿐입니다. 나중일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지금 수필집 두 권쯤의 원고를 보유하고 있는데 책으로 발간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만 먼 훗날을 위한 작품은 힘닿는 데까지 50편 정도만 만들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재미라는 것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철학이 있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는 독자도 많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렇지요. 타임캡슐. 궁금합니다.
조선생님 발표되는 글마다 댓글을 다는 유일한
회원이지 싶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궁금해도 보실수는 없겠지요. ㅎ
@남평(김상립) 대구수필가협회의 보물입니다. 늘 긍정적이고 늘 적극적이고 늘 배우는 마음으로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않는 수행심을 지니고 있는 보살 같은 분입니다. 요즘도 명심보감을 배우러 다닌다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님으로 부터 다 배워서 땐 것을^^
동의합니다.
좀 특별한 분 같아요.
그것도 한창때 서울에서
이름날린 수학 일타강사
였다니. 참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