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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7. 새 언약의 사역자들의 삶
- 5) 새 창조를 위한 더 깊은 화목을 위해 일함
2015년 12월 20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고후5:11~21]
“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은 새 언약자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겠다.
화목은 세상에서도 참 필요한 것이지만 다 이해관계나 이런 것 때문에 화목이 깨지고 있는데 사실은 화목이 있어야 모든 것이 잘 된다. 지금 여야 간에 화목이 없으니까 1년 전에 정부에서 제출한 법안을 아직도 구석 데기에 처박아 놓고 처리를 안 해주고 해를 넘기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정부에서 일을 못한다. 그런 실정이다. 맨날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부에서 제출한 법안이고 뭐고 필요 없고 구석데기에 처박혀서 내년으로 넘어간다고 한다. 내년 언제 해결될지 모른다. 그렇게 해놓고 대통령보고 일을 못한다고 할 수 없다. 좋은 일 하려고 만들어 놓았는데 통과를 시켜주지 않으니까. 어디가도 화목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화목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는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꽁꽁 얼어붙어 있으면 아무 것도 살 수 없다. 따뜻한 봄날이 와야 새도 울고 물도 흐르고 싹이 나고 만물이 소생하게 된다. 결국 화목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화목이 되어야 사람과 화목이 되지 하나님과 화목이 안 되면 사람과 화목이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세상도 다 화목을 원하지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다~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화목이 될 수 없다. 다~ 자기가 대통령하겠다고 하니까 화목이 되겠냐는 것이다. 참 어떻게 옛날처럼 네가 먼저 해라 이렇게 밀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서로 밀어주면서 이번에는 네가 꼭 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서로 밀어주는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중국에 대해서 소망이 있는 것이 거기는 다음번에 주석할 사람이 정해져있고 5대째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용하다. 당연히 이 사람이 먼저 할 것으로 알고 있다. 큰 대과가 없는 한 그대로 진행된다. 그러니 정치가 아주 안정되어있다. 어른들이 다 지키고 앉아서 정해준다고 하는데 그대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 생각하는 중국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서양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이런 것은 중국만 가능하다. 공산주의를 해도 저렇게 발전하고 있는 이유가 그런 것 때문에 그렇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되면 참 좋은데, 중국하고 가까우면서도 그런 좋은 것은 안 배웠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부터 서로 해먹으려고 싸우다보니까 나라가 망해가는 것도 모르고 싸우고 있었다. 황새하고 조개 둘이서 싸우고 있듯이 어부가 돌아다니는 줄을 모르고 자기둘이 죽자 살자 싸우다가 둘 다 잡혔다. 그런 식이 된 것이다.
화목은 어디에 가든지 중요하다. 가정도 화목이 돼야 뭐가 되고 교회도 화목이 돼야 뭐가 되지 뭣부터 하려고 하면 화목이 깨져버린다. 화목이 되면 저절로 된다. 우리교회도 화목이 되니까 저절로 된다. 우리 같이 작은 교회에서 어떻게 저런 큰 교회를 건축하겠나. 나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다. 한 번도 교회당을 짓는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빌려서 해도 괜찮은데 교회를 짓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 놀래고 있다. 지금 대구시내에 저 교회는 이상한 교회라고 소문이 났다. 돈을 긁어모아서 한다는 소문도 있고 저 교회는 이상한 교회라고 하더니 재산을 갈취해서 저런 건물을 짓는다는 이런 소문이 났다. 이런 것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봐도 별로 돈 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한데 건물은 달성군에서 제일 좋은 건물이고 대구시내에서도 이렇게 멋있는 건물이 없다. 사실 다른 교회는 더 좋게 짓고 싶어도 땅이 없어서 못한다. 우리는 시골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대구의 랜드마크가 될지 모른다. 내용을 보면 1500평밖에 안 되는데 다른 교회는 4~5000평씩 짓는다. 이렇게 지으려면 돈이 몇백억씩 들어간다. 속은 별로 없는데 위치와 환경이 잘 맞고 사람들이 좋아서 이 교회는 좋은 교회로 소문이 날 것이다. 이것은 화목의 결과다.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싸움을 많이 한다. 그리고 분열도 많이 되고 교역자가 쫓겨나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상례다. 아주 많다. 또 짓고 나서 상처받는데 그것은 패가 갈라져서 싸우고 하는데 건축이 아주 어렵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조용하다. 다 만족해하고 조용하고 그렇다. 그래서 화목이 첫째다. 우주 안에서 화목이 첫째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의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받았다. 이 직책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으로써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하려고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지으셔서 화목 가운데 자신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다.
그런데 새 창조를 위한 더 깊은 화목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새 언약의 사역자들은 더더 깊은 화목을 위해서. 알고 보면 구약의 사역자들도 하나님과 사람,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간의 화목을 위해서 일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한 것은 하나님과 더욱 화목을 함으로써 화목의 본이 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화목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새 언약을 주셨으니까 이 새 언약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고 이 새 창조 안에는 더 깊은 화목이 있다. 그런데 새로 창조했으니까 더 좋은 것이 있어야지 새로 창조했는데 더 안 좋은 것이 있으면 뭣하러 창조했겠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새 창조는 더 깊은 화목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에 화
목하게 하는 직책을 가졌다. 우리는 직책을 가졌다. 좋은 음식을 얻어먹었으면 자랑한다. ‘나는 오늘 5 천원을 주고 만 원어치를 먹었다. 와! 그 음식은 값으로 따지면 2 만원도 더 되겠더라. 그런데 5 천원을 가지고 먹었다.’ 이것은 선전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입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음식점은 음식만 잘하면 어디 산골이 됐든, 촌집이 됐든 지 아무데고 다 찾아간다.
여기 가창 정대리에 가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메기를 구워 파는 곳이 있다. 사람이 거기까지 찾아가서 바글바글하니까 지금은 집을 지었다. 그러니까 맛있는 것은 선전을 안 하고는 못 배긴다. 도저히 안 된다. 그래서 이것은 특별한 선전책이 필요하지 않고 음식만 잘 하면 된다. 솜씨 있는 사람은 돈을 버니까 한 번 해 보라. 된다.
화목하게 하는 것, 이것도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목한 것도 자랑 안 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해 보라. 얼마나 마음이 편해지는지... 사람과 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은 사람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다투고 있는 것의 표현이다.
내가 4년 동안 어떤 교단에 있으면서 싸웠다. 싸웠는데 정의를 위해서 싸웠다. 목표는 정의였다. 부당한 행동을 한다. 이런 행동은 없어져야 한다. 앞으로 우리 교단이 잘 되려면 이런 것은 고쳐야 된다. 이래서 젊은 나이인 30대에 32살인가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일부러 한 게 아니고 나에게 부당한 것이 왔기 때문에 반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나 혼자서 되겠는가?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한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힘에 밀려서 나와 가지고는 C.C.C.에 가서 안 것이 그것이다. ‘아! 내가 사람들과 다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싸우고 있었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까 원한이 사라졌다. 나올 때 나는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나왔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다시는 교회(단)에 안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가 확 풀리면서 ‘아! 내가 하나님과 다투기를 하고 있었구나...’ 하나님이 더 좋은 곳으로 더 좋은 곳으로 밀어 내고 있는데 나는 모르고 막 기어코 거기서 버티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과 싸움이 생겼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싸울 일이 없다. 아무와도 싸울 일이 없다. 참 이상한 일이다. 싸울 일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이 직책은, 화목케 하는 직책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이다. 원래는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도록 지어 놓았을 게 아닌가? 중간에 잘못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단지 지금 우리가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새 창조를 위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함께 하려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셔서 화목 가운데 자신의 동산에 두셨다. 화목이 안 되면 자신의 동산에 오라고 하겠는가? 나와 싸우는 사람에게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이야기 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동산에다 사람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화목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동산을 맡기고 다스리며 지키라고 하셨다. 아주 관계가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길을 이탈함으로 질서가 혼란되고 화목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회복(화목)의 역사를 시작하셨다. 회복(回復)은 처음 것을 다시 찾는 것뿐만 아니라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길을 이탈해서 질서가 혼란하게 되고 화목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화목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화목은 처음의 것을 다시 찾는 것만 아니다. 우리가 구속이라고 하면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물론 되돌려 놓는 것도 되긴 되지만 더 발전이 안 된다. 새 창조가 되어야 발전한다.
새 창조 안에서의 화목은 첫 단계의 화목보다 더 깊은 것이다. 구약 시대의 화목보다 신약시대의 화목이 더 깊으며, 신약 시대의 화목보다 새 예루살렘에서의 화목은 우리가 아직은 다 알 수없는 더 깊고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새 창조를 위한 화목은 첫 단계의 화목보다 더 깊은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첫 단계의 화목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조 안에서 화목이다. 어쩌면 그것은 기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과 화목해야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화목해야 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를 창조했으니까.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아니,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소?’ 하고 불평할 수 없다. 그것은 당연하게 화목해야 될 것이다. 무슨 일에 쓰든지, 질그릇으로 만들어서 뚝배기로 쓰든지 곰탕 그릇으로 쓰든지 간에 그것은 주인이 할 일이다. 바울이 하는 말이 그 말이다. 질그릇이 토기장이를 보고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는가? 첫 번째 단계의 화목은 이런 화목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화목, 그러니까 안 하면 안 되는 화목이다.
그런데 신약의 화목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깊은 것이다. 구약 시대의 화목보다 신약 시대의 화목이 더 깊고, 신약 시대의 화목보다 새 예루살렘의 화목은 더 깊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점점 공개되어 간다. 우리가 아직은 다 알 수 없는 더 깊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아주 많은 묘사를 하고 있다.
성은 보석으로 쌓여 있는데 그 색깔은 벽옥 같더라. 그것은 빨간 색도 있고 노란 색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전체적인 색깔은 벽옥 같더라는 것이다. 그 색은 어떤 색인지 신비롭지 않은가! 무슨 색인지 잘 모르는 그런 색이다. 아직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가 봐야 할 그런 것이다.
처녀가 결혼에 대해서 가 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겠는가? 상상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처녀 수준으로 아는 것이다. 처녀 수준도 그냥 처녀가 있고, 약혼한 처녀의 수준이 있고 다른 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 그때 우리가 아는 것은 다를 것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더라.’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라.’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노아를 홍수에서 구원하시고, 아브람을 바벨에서 불러내셨으며,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구속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 일을 위하여 노아를 홍수에서 구원했고, 아브람을 바벨에서 불러냈으며,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해방시켰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의 구속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무엇을 하려고 하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다.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 길을 열어 놓았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노아 시대에는 노아만한 사람이어야 되고,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만한 사람이라야 되며, 이스라엘 시대에는 이스라엘만한 사람이어야 되는 데 그렇게 하면 어딘가에 못 올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그런 화목을 위해서 길을 열어 놓았다는 말이다.
카탈로그를 보면 합격하기 어려운 데도 있고 쉬운 데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접촉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고 쉬운 사람이 있다. 그런데 누구라도 가면 다 될 수 있는 그런 어떤 마당을, 길을 만들어 줬다는 말이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되는 이런 것이 없어지는 그런 세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육체가 되시고, 우리를 포함하는 그 육체로서 인류를 하나님에게로 되돌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임 당하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되셨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육체가 되었다. 왜 화목이 안 되었는가? 이 육체 때문에 화목이 안 되었다. 육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살코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6장에서 말하는 그 육체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해서 더군다나 천사들과 결합을 해 가지고 네피림이 된 이런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육체가 됨이라.’ 했다. ‘내 신이 영원히 저들 안에 있지 않겠다.’ 고 했다. 그만큼 악한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육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하는 말은 그냥 좋은 이런 육체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저주받은 그 육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었고 우리를 포함하는 육체로서 인류를 하나님께로 되돌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냥 고부간의 싸움이나 이런 것을 해결하려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 것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고 육체가 되어서 ‘나의 신이 영원히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 그 육체 때문에 안 되는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만일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으면 우리와 관계가 없다. 못으로 찔러도 피가 안 나는 그런 육체를 가지고 왔다. 그러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옆구리를 찌르는 데도 물과 피가 안 나오고 구멍만 났다면 그런 육체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었다. 인류를 되돌리려고, 하나님께로 되돌리기 위해서 죽임당하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되신 것이다. 구원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길 자체가 되었다. ‘나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요, 나는 아버지께로 가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분 자신이 길이라는 말이다.
육체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사함 받게 하시고 죄가 된 육체를 끝내시고 새 생명을 얻게 하셨다. 새 생명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거룩한 일이며 땅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오로지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늘에 속한 일이다. 이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화목을 위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다.
육체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죄가 된 육체를 끝내시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끝내고, 마지막에는 그냥 끝내는 게 아니고 새 생명을 얻게 하였다. 새 생명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생명이 새로워지면 창조도 새로워진다.
건축의 재료가 달라지면 건축이 달라진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2층집 이상의 집들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나무로만 지었기 때문이다. 목조로 지으니까 많이 지어봐야 3층이다. 아니면 2층밖에 못 짓는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돌로 집을 지었다. 그래서 5층집을 지었다. 돌로 지으니까. 그런데 그 다음에 철근이 쇠가 나왔다. 그러니까 100층, 200층 올라가는 것이다. 재료가 새로워지면 건축이 새로워진다. 인간이 달라지면 사회가 달라진다. 사회만 달라지게 하려 한다. 똑 같은 재료를 가지고 말이다. 나무는 나무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한계가 있다. 경복궁을 지을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홍송(紅松)’이라는 강원도에서 자란 소나무를 갖다가 한 것이다. 그래도 한계가 있다. 돌로 지은 집과 같겠는가? 돌로 지은 집도 한계가 있다. 철근을 넣어서 높인 집과 같겠는가? 못하다, 그렇게 못한다.
그러니까 재료에 따라서 공학은 발전한다. 그래서 재료공학이라는 것이 있다. 재료가 좋아져야 공학이 발전하지 아무리 설계를 잘 해 놓아도 재료가 없으면 지을 수가 없다. 9.11 테러 때 폭파된 건물이 있다. 그 큰 건물이 기둥이 하나 없이 바깥에만 유리인 그런 건물이다. 그래서 테러가 났을 때 폭삭 안으로 주저앉았다. 옆으로 넘어진 게 아니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피해가 적었다. 그것이 옆으로 넘어졌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그런 건축을 어떻게 하겠는가? 재료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재료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일본 사람이 설계를 했다고 하는데 하여간 설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생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듯이 그 재료가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사회도 좋은 사회, 얼마나 많이 꿈꿀 수 있는가. 마르크스는 얼마나 좋은 사회를 꿈꿨는가.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사람이 없고 다 평등하게 살고, 다 평화롭게 살고 다 공유하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밥 먹고 살고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 청사진을 내놓았는가. 그런데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런 인간이 없다. 나는 백만 원을 벌고 저 사람은 십만 원을 버는데 살기는 같이 살자고 하면 누가 백만 원을 벌려고 애쓰겠는가. 그래서 공산주의가 안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은 너무너무 좋기 때문에 그 이론을 한번 공부한 사람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너무너무 좋다고 생각을 한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다. 마지막 단계에 가면 아예 정부도 없어지고 자발적으로 모든 사람이 함께 사는 그런 사회가 된다고 이렇게 구상을 해놓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짜 좋다. 그런데 되느냐 하면 그렇게 안 된다.
백층짜리 건물을 돌로 짓겠는가. 불가능하다. 중앙청 건물을 짓는데 전부 돌로만 지었다. 돌 하나가 네모난 모양인데 엄청 넓고 크다. 전부 화강암인데 그것을 그 시대에 어떻게 등에 매고 삼층 건물을 지었는지 그것도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백층을 어떻게 짓겠는가. 그러니까 재료가 좋아야 된다. 재료가 좋아야 된다는 것은 인간이 좋아야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좋아져야 좋은 사회가 되는 것이지 인간이 안 좋아지는데 좋은 사회만 마구 선전을 하고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하겠다고 서로 자기가 잘하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지금도 공산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되냐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새 생명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교회도 새로 지으려면 인간이 새로워져야 한다. 새로운 교회가 따로 어디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다. 그러니까 교회만 좋게 해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초대교회처럼 해보자고 하면서 초대교회 흉내도 내보고 별것을 다해본다. 다 해보지만 사람이 만드는 것인데 그런 것이 어디 있는가. 그런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었다.
초대교회만 해도 같이 먹고 같이 살자. 그렇게 처음에 생각을 했는데 되느냐 하면 안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왔다. 딴 사람은 다 갖다가 바치는데 둘이 부부간에 잠을 자면서 궁리를 해서 다 갖다 주기는 그렇고 우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하면서 이리저리 하다보니까 반만 갖다 주고 반은 남기자 이렇게 됐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그것을 알아가지고 모른 체 하고 지나갈 일이지 그것을 알아서 한마디 하는 바람에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것이다. 모른 척 하고 지나가 버려야 하는데 베드로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불이 붙어서 뜨거웠던 초대교회에서도 안됐다. 그런데 하물며 21세기에 와서 황금만능주의인 이 세계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말뿐이다. 그리고 거룩한 성전 안에 사는 사람들도 안 되는데 공산주의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공산주의는 기독교의 이상을 표절한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아직 못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되겠는가.
새 생명은 새 창조를 위한 것이다. 새 창조가 오려면 새 생명이 와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거룩한 일이고 땅에서는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이다.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마르크스는 유대인이니까 꿈을 꿨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꿈이 있다. 마지막 시대에 대한 꿈이 있다. 황금시대에 대한 꿈, 여호와의 통치가 임하는 나라의 시대에 대한 꿈 이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그 유대인인 마르크스가 만들어 놓은 것이 공산주의다. 땅에서 꿈꿀수 없는 일을 땅에서 꿈꿨다.
오로지 새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늘에 속한 일이다. 이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화목을 위한 갈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화목을 갈망하신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아들은 자기 목적과 재미에 빠지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갈망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인간과 화목을 이루시려고 아들을 보내시고 그에게 화목 하게하는 직책을 맡기셨으며 또 예수는 사도들에게 그 직책을 맡기시고 사도들은 또 우리에게 이 직책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화목을 갈망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별로 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과는 모른 척 하고 살면 그만이지 나도 예전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는지 안 사는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지 이렇게만 생각을 했지 내가 하나님과 대들어서 겨룬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다 서로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맞부딪히는 것은 정의뿐이다.
선생님도 정의, 제자도 정의다. 그때 선생님이 나이가 칠십이 넘었고 나는 서른 한 살이었다. 차이가 얼마인가 부모 같은 차이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존경했던 분이다. 그런데 나오니까 양쪽 다 정의만 남았다. 그러니까 선악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나님이 화목을 갈망하시지 사람이 갈망하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아예 날 때부터 화목을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지 않는다.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다. 아들은 자기 목적과 재미에 빠지면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다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소식이 없으면 아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이고 편지를 자주하면 뭐가 잘못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옛날 말이 맞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아들은 잘 먹고 잘 살면 아예 부모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부모는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잘 먹으면 잘 먹을수록 아들이 생각난다. 따뜻하면 따뜻할수록 아들이 생각난다. 이렇게 추운데 어디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우리 집에 있으면 이 맛있는 것을 먹을 텐데 어디서 게걸스럽게 돌아다닐까? 만날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부모다. 어쩔 수 없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니까 하나님을 대신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생각도 하고 있지 않는 놈을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갈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같다. 주여~ 하고 빌고 하니까 야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그렇다. 사업하다가 망했기 때문에 돈 좀 달라는 것이고 맘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내 맘대로 되게 해달라는 것이고 전부 그런 얘기이지 하나님의 갈망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러니까 예배당만 시끄럽지, 예배당만 시끄러운가 하면 이웃 사람도 시끄럽다.
그래서 요즘에는 옆에 교회를 짓는다고 하면 전부 일어나서 반대한다. 다 데모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 같은 이런 교회를 시내에 지을 수가 없다. 왜 데모를 하느냐 하면 하도 시끄럽기 때문이다. 새벽마다 시끄러우니까 잠을 못 잔다. 열두시까지 TV 보고 잠자고 여덟시에 일어나서 직장에 가야 하는데 새벽 네 시면 일어나서 떠드니까 네 시간밖에 잠잘 시간이 없으니까 원망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다. 옛날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
나도 옛날에는 우리 교회가 높은데 있었다. 그런데 그 속을 모르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나면 종을 쳤다. 바로 밑에 집이 붙어 있다. 종 쳐도 시원찮으니까! 엠프 갖다 놓고 고성능 스피커 갖다 놓고 막 올렸다. 그것을 신나게 생각하고 했다. 밑에 사람들이 잠 못자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나님만 위한다고 생각했고, 복음을 전파해야 된다. 동네가 산골처럼 되어 있었는데 독립문 밑에 여기서 산 중턱에서 종을 울리니까! 건너편 동네 전체가 시끄럽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매맞아 안 죽고 나온 것이 다행이다. 하도 심해서 서울시내에서는 못하게 막았다. 한 동에 하나 씩 만하게 했다. 그것도 돌아가면서 하도록 그렇게 정해 놨다. 그래서 교회에서 종치는 교회는 없다. 따로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난리를 치는 것은 다 우리 필요 때문에 그런 것이고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화목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화목을 이루시려고 아들을 보내시고 그에게 화목 하게하는 직책을 맡기셨다. 네가 가서 내가 사람들과 화목하도록 해 달라! 중보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내 말을 안 들으니 네가 가서 말을 듣게 해달라! 또 예수는 사도들에게 그 직책을 맡기셨고, 그리고 사도들은 또 우리에게 이 직책을 맡기셨다. 중보자가 꼭 필요하다. 중보 없이는 안 될 일이다. 아버지 마음을 누가 와서 전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면 전달해 줄 사람은 좀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전달할 수 있다. 자기가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냥 가서 너희 아버지가 매일 기다리더라고 해서 되겠냐!
하나님과의 화목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애급에서 해방 된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건축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성막은 하나님과의 만남, 즉 화목을 위한 길을 예표 하는 것으로서 두 단계로 그 안에 이르도록 설계 되었다.
화목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애급에서 해방 된 이스라엘은 광야에 나와서 성막을 건축하라는 명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만남! 그래서 회막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화목을 위한 길이다. 성막이라는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만나겠냐? 그래서 회막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렇다고 하나님이 동네에 내려와서 시장 바닥에서 만나겠습니까! 만날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겠습니까! 안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한 장소를 하나 마련해 놓고 특별히 구별한 장소를 하나 마련해 놓고 너하고 나하고 만나자! 이것이 성막이다. 그러니까 화목의 길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이렇게 만난다. 이런 곳에서 만난다. 이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두 단계로 그 안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냥 막 직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두 단계로 들어가서 만나도록 되어 있다.
외부에는 세상과 구별하는 막이 있고, 막을 지나서 들어오면 제단과 물두멍이 있으며, 거기서 첫 번째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성소가 있고, 두 번째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여호와가 임재 하는 지성소가 있다.
외부에는 세상과 구별하는 막이 있다. 네모난 막들이 쳐져 있다. 그것은 포장인데 울타리다. 이것은 외부에서 짐승들이랄지 벌레들이랄지 이런 것들이 못 들어오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들어오면 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거기서 첫 번째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성소가 있고, 두 번째 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여호와가 임재하는 지성소가 있다. 이렇게 두 단계로 되어 있다.
바깥 막은 세상과 구별하는 것으로서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성막에 들어와서 제물을 들여 속죄(구속)를 받게 하기 위한 것이며, 첫 번째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서 매일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휘장은 하나님이 임재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영원한 속죄를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것이다.
바깥 막은 세상과 구별하는 것이고, 막 바깥에 있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고, 이방인들이다. 그리고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들로서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 이렇게 구별이 된다.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성막에 들어와서는 제물을 드려서 구속을 받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성소 안으로 들어오려면 제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말한 육체가 된 인간은 거기서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고는 못 들어간다. 그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첫 번째 휘장은 성소로 들어가서 매일 같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고, 그 안에는 등대와 떡상과 금향단이 있다. 매일 같이 그것을 갈아 끼우는 것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의 일이다. 두 번째 휘장은 하나님이 임재 하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영원한 속죄를 받고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두 단계로 화목이 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또 있다.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해방 되어 광야로 나와서 성막을 건축했고 마지막으로 목적지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왕국을 얻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또 있다. 이스라엘은 애급에서 해방 되어 광야로 나와서 성막을 건축했고 마지막으로 목적지인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왕국을 얻었던 것이다. 성막 다음에 왕국 이렇게 된다. 성막이라는 단계를 거쳐 서 왕국에 왔다. 이렇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계, 즉 성소는 제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은 되었으나 고린도 교회 사람들처럼 아직 육이 처리되지 않아서 같은 일이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화목을 위해서 두 번째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다 . 이것은 더 온전한 화목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첫 번째 단계, 즉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단을 통해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일단은 우리가 십자가 안에 있으면 다 하나님 백성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왜 문제가 있었는가? 고린도 교회 사람들처럼 아직 육이 처리 되지 않아서 그렇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화목을 위해서 두 번째 휘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죄를 회개하고 내가 이탈해서 잘못했습니다, 했다. 내가 예수를 보고 참 사람입니다 이렇게 되었다. 됐는데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처럼 내가 크니? 네가 크니? 누가 잘했니? 누가 못했니? 문제가 많이 생겼다. 이것은 육 때문에 그렇다. 육의 본성 때문에 그렇다. 우리 교회도 그렇다. 이 육이 완전히 처리되지 않는 부분에서 충돌이 약간씩 있다. 그러다가 해결되고 또 해결되고 한다. 한꺼번에 딱 끝나면 좋은데 한꺼번에 딱 끝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끝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대박으로 왕창 끝나기도 한다. 우리 생각 같으면 단번에 끝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예수님은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를 못하고 한 발짝 한 발짝 들어가다가 좀 후퇴했다가 또 들어가다가 하면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기왕이면 좀 빨리 들어가자. 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화목을 위해서 거기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소는 두 번째 휘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길을 준비하는 곳이다. 이것은 더 온전한 화목을 위한 것이다. 성소의 화목은 왔다 갔다 할 수가 있다. 거기서는 제사장들이 조를 짜서 반열에 따라서 번갈아 가면서 일을 하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런 것은 모두 상징적인 것이다.
성소(聖所)에서 하는 일
등대의 불을 돌봄, 성소에서는 매일 같은 일을 하는데 금등대에 감람유로 밝히는 불빛은 그리스도의 빛 되심을 밝히는 것이다. 꺼지지 않게 해야 하며 끄름이 나지 않도록 심지를 잘 돌보아야 한다.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꺼지지 않게 밝히는 사람은 항상 빛과 함께 있게 된다. 어둠이 없어지고 빛이 자녀가 되며 세상에 대하여 빛이 된다.
성소에서 하는 일을 보면 등대의 불을 돌보는 것이 첫 번째이다. 성소에서는 매일 같은 일을 한다. 금등대의 감람유로 밝히는 불빛은 그리스도의 빛 되심을 밝히는 것이다. 매일 하는 일이 금등대에 감람유를 넣고 그을음이 나지 않도록 심지를 잘라주고 불똥을 꺼내는 일이다. 불이 깨끗하게 잘 피게 하기 위함이다. 옛날에 호롱불을 켜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심지가 오래되면 그을음이 나는데 그것을 잘라주어야 불이 깨끗하게 핀다. 그런 일들이 제사장이 하는 일이다.
이것은 빛 되신 그리스도를 깨끗하게 밝히는 일을 말한다. 꺼지면 절대로 안 되기에 꺼지지 않게 해야 되고, 그을음이 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그을음이 나는 그리스도를 전하면 되겠는가? 연기가 나는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리스도를 받은 사람이 기침을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맑은 빛이 비치는 그런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노력하는 것이 제사장이 하는 일이다. 심지를 잘 돌봐서 빛이 되신 그리스도를 꺼지지 않게 밝히고 깨끗하게 밝히는 사람 항상 빛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그을음이 날 시간이 없도록 잘라줘야 한다. 그러니 이 사람은 절대로 그을음 나는 빛을 보는 것이 아니다. 항상 밝은 빛을 본다. 자기가 만일 게을러서 그을음이 나게 하면 자기가 그을음을 마셔야 된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잘못하면 내가 먼저 그 그을음을 마셔야 된다. 부지런히 성심을 다하면 나는 항상 빛 가운데 있게 된다. 어둠이 없어지고 빛의 자녀가 된다. 즉 세상에 대해서 빛이 되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는데 그냥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소의 봉사를 통해서 빛이 되는 것이다. 교회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밝게 빛나게 하기 위해서 늘 준비하고 늘 간증을 해 보라. 그러면 자기가 그런 밝은 빛이 된다.
순모임을 하면서 늘 구질구질한 이야기나 옛날 해묵은 이야기나 하고 있으면 그을음이 계속 난다. 속에는 그리스도가 있어서 자기 마음을 표현한다고는 하는데 불똥을 안 잘라주고 그냥 하니까 그을음이 계속 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 불을 밝게 빛나게 하면 할수록 내가 더 밝아진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더 밝게 할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더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할까? 이런 마음으로 하면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한번 해 보라. 내게 있는 대로 해야지 하면서 똥이고 뭐고 다 퍼내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된다. 욕쟁이들은 욕을 계속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욕이 말이 되어서 말이 욕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욕쟁이다. 욕쟁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욕쟁이다.
그을음이 나도록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 사람은 그을음이 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불똥이 안 남도록 가위로 잘라야 한다. 거기에는 가위도 젓가락도 다 준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자르면 된다. 하나님 말씀에 다 있으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부정적인 그리스도를 전하지 말고, 혹시 자기 속에 조그마한 부정이 있을지라도, 다 드러낸다고 잘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이 진실이라고 다 내놓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그을음이 나지 않도록 내놓기 시작하면 내 스스로가 빛의 자녀가 된다.
떡 상(床)에 떡을 진설함
상에는 열두 덩이의 떡을 매일 진설한다. 이 떡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참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 양식이지만 그리스도는 먹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참된 양식이다(요6:55참). 그리스도는 하나님 생명을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공급해 주며, 사람의 인격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양식으로 드린다. 이러한 봉사는 먼저 하나님을 공급받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양식으로 드리게 된다.
떡 상에다 떡을 진설한다. 상에는 열두 덩이의 떡으로 항상 매일 진설하라고 돼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 떡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양식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 양식으로 같이 먹는 양식이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하나님은 하나님 양식밖에 없고 사람에게는 사람 양식밖에 없었다. 그래서 서로 같이 한 상에서 먹을 수 없었다. 한상에서 먹는 다는 것은 원시적인 사람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잘 알 수 있다. 한상에서 먹는다는 것은 아주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주 친한 사람하고는 한 상에서 같이 먹는다.
성경에도 다윗이 자기 친구 요나단의 아들과 자기상에서 같이 먹게 했다. 한 상을 먹는 다는 것은 아주 친밀한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이 음식이 같아야 같이 먹지 음식이 틀린데 어떻게 같이 먹겠는가. 한 사람은 냄새나는 청국장을 좋아하고, 한 사람은 양식으로 향기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양식은 먹기 전에 향기가 좋다. 그런데 우리 한식은 된장 때문에 냄새가 좀 안 좋다. 된장 간장 냄새 때문에 그렇다. 같이 먹으려고 하면 안 맞는다. 그래서 한식 된장국을 먹을 사람은 된장국을 따로 먹고 양식 먹을 사람은 양식 따로 먹고 이래야 된다. 식당도 같이 있으면 안 된다. 같이 있으면 냄새가 서로 섞어서 더 고약한 냄새가 되니까 식당도 따로 있어야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는 양식 이것은 어떤 사람인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먹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는 참된 양식이다. 예수님이 나는 참된 양식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참 양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생명을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공급해 주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어떻게 하나님을 먹겠는가. 하나님을 받아드린다고 하는데 보이지도 않고 없는 분을 어떻게 받아들겠는가?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진실을 우리의 양식으로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먹은 샘이 되는 것이다. 우리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먹은 샘이 됐다. 그래서 하나님을 먹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처음 들어 본 말이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믿는다는 말을 안 하고 먹는다는 말을 썼는가 하면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초장에는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데 왜 후반에 가면 먹는다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믿는다는 말은 아주 범위가 넓다. 그래서 갓바위 부처님을 믿는다. 이것도 믿는 것이다. 나는 은행에 있는 것을 믿는다. 이것도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 하고 내가 예수를 받아 드려서 내 생명이 되는 것하고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은행을 받아드리겠는가 갓바위 부처를 받아드리겠는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믿는 다는 말이 없어지고 먹는다는 말이 나왔다. 아주 본능적인 말이지만 이 말이 아주 구체적인 말이다. 우리는 예수를 먹어야지 믿기만 해서는 안 된다.
믿는 사람들은 워낙 많다.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기 필요만 찾으러 간다. 믿으니까 예수님에게 가면 이런 것을 주셔! 예수님에게 가면 이런 기도 들어주셔! 예수님에게 가면 이렇게 하면 돼! 이런 것들은 믿고 가는 것이다. 믿고 가는 것인데 이것도 세상 사람들 보다 낫지만 그 분하고는 서로 남남이라는 말이다. 돈 필요할 때 만 빌리러 가는 그런 사람과 같다. 그러니까 그것이 화목이 되겠는가? 안 된다.
예수는 참 된 양식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생명을 사람을 위한 양식으로 공급해 주셨다. 또 사람의 인격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양식으로 드린 분이다. 사람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이 먹을 수 없다. 도저히 먹으려고 해도 사람을 받아드리려고 해도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니까 먹어 지겠는가? 목구멍에 걸려서 못 먹는다. 하나님 목구멍이 아무리 넓어도 가시 돋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을 요리해 가지고 그냥 냄새만 맡아도 쏙 들어가도록 요리 해 놓으셨다. 어디서 십자가에서 “나는 피조물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숨만 안 쉬셔도 나는 죽습니다.”이런 인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니까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런 사람을 만들어 놓으셨다. 이 인격을 하나님이 마실 수 있게 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참 신기한 분이시다. 우리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흠향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드셨다.
이러한 봉사 이것은 먼저 하나님을 공급 받으면 자신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양식으로 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떡 상의 봉사는 굉장히 중요한 봉사다. 이 떡은 매일 같이 갈아 놓고 그 떡을 제사장이 나눠 먹는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누어 먹는 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이 나눠 먹는다. 그러니까 이런 떡이 된 인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양식이 되고 사람에게도 양식이 되는 이런 인간이 필요하다.
향단에 향을 피움
향단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어서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 까지도 흠향하실 수 있게 하는 향기다. 제단에서 불을 가져와서 피워야 하고, 세 가지 향료에 기름을 섞어서 만들고 소금을 처야 한다(출30:34,5참조). 이것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향기로서 하나님이 받으시고 감동하시는 냄새다. 이 향을 드리는 자는 자신이 과정을 거치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그 다음에 향단에 향을 피운다고 되어있다. 이 향단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아주 애매한 장소에 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다.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까지도 흠향하실 수 있게끔 하는 향기다.
떡은 성소에 있으면 하나님은 먹을 수가 없다. 그렇죠? 불은 등대에 피워 놓으니 지성소에 계시는 하나님은 깜깜하다. 지성소는 깜깜한 곳이다. 냄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 향단이 하나 있어가지고 이 향단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연기처럼 스며드는 것이 없다. 아무리 문 닫아놓아도 연기는 들어온다. 그러니까 휘장을 아무리 두껍게 쳐나봐야 이 연기가 안 들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지성소 안에 있다고 되어있고 어디가면 성소 안에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향기를 맡은 입장에서 보면 지성소도 있는 것이고, 눈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성소에 있고 그렇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커튼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거기서 향을 피우니까 그 지성소 안에는 불은 못 들어가는데, 떡은 못 들어가는데 이 향기가 싹 들어간다.
이것은 또 반드시 제단에서 불을 가져오라고 한다. 다른 불로 피우면 대번에 죽는다. 다른 불로 피웠다가 250명이 한꺼번에 죽었다고 한다. 제단에서 나오는 불~ 그러니까 제물을 태운 그 불을 가져와서 이 향을 피워야 한다. 이것은 구속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구속의 기초가 되지 않는 어떤 향도 참된 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속이 없는 사람들이 아주 좋은 봉사를 한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꼭 제단의 불로 태워야 한다.
세 가지 향료를 기름에 섞어서 만들고 소금을 친다, 이렇게 되어있다. 세 가지 향료는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나온다. 30장 34~35절에 보면 또는 세 가지가 나온다. 이것은 고난의 과정을 거치는 그리스도 인격의 상징으로서 그 인격의 향기다. 홍해서 거치고 어디서 거치고 하는 동물성이다. 식물성, 고난의 과정을 거친 그리스도 인격의 향기로서 하나님이 받으시고 감동하신 냄새다. 이것은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냄새다.
이 향을 드리는 자는 자신이 과정을 거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거다. 이것만 따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이것이 주 예수의 기도(企圖)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겠다고 하고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은 전부다 저 제단 바깥에서 하는 기도다. 주시옵서소! 주시옵서소! 주시옵서소! 이것은 제단 바깥에서 하는 기도다. 이방인의 기도다. 이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기도다.
인간의 소원이 얼마나 많은가! 끝이 없다. 줘도 줘도 끝이 없는 것이 인간의 기도다. 광야에서 오만 것을 다 줬다. 오만 것을 다 줘도 안 된다. 왜? 사람은 먹고 나면 배고프고, 먹고 나면 배고프다. 아침에 여러분 다 잘 잡숫고 왔다. 그런데 지금 약간 배고프라고 한다. 조금 있으면 또 배고프다. 그러니까 만일에 아침주고 점심안주면 대번에 원망한다. 차라리 아침을 주지말지 왜 줘가지고, 이것이 출애굽기에 그대로 나온다. 애굽에서 우리를 불러내지 말지, 거기 있었으면 국물이라도 마셨을 건데, 여기다 데려다 놓고 다 굶어죽게 하냐. 당연히 그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사람은 만족이 없다. 무엇을 해도 만족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봉사의 길을 열어 준 것은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결국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옵소서!” 그렇게 기도를 한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 준 기도다. 이것이 주 예수의 기도다. 그 분이 와서 무엇을 기도했겠는가. 가끔 산에 올라가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더라. 그러니까 우리도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산악산에 갔다. 다 산에 간다고 하니까 한적한 곳에 간다고 하니까 밤에 아무도 모르는데 산 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다. 거기 가서 무엇을 했냐가 문제다. 무슨 기도를 했냐가 문제다. 나는 그때 주여 내게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시옵소서! 이렇게 했다. 그것이 좋은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셨다. 어떤 사람한테는 필요하니까 줬을 것이고 나한테는 들어줄 일이 아니라서 안 들어주신 거 같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기도를 해야 되는데 이건 성숙한 단계에 와서 한다. 등불을 켜고 떡 상을 진설하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하는 것이 결국향단이다. 그 향단은 완전히 금으로 싸여져있다.
이러한 봉사를 계속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육이 처리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누리게 된다.
이러한 봉사를 계속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으로서 육이 처리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누리게 된다. 이런 봉사를 계속하면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빵을 계속 만들면 빵쟁이가 된다. 빵쟁이가 따로 있는가? 빵을 계속 만들면 빵쟁이다. 떡을 계속 만들면 떡쟁이다. 술을 계속 먹는 사람은 술쟁이다. 딱 정해져 있다. 사람은 별 것 없다. 하는 대로 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나다. 지금의 나다. 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이 나다. 성소의 봉사는 얼마나 귀중한 봉사인지 모른다. 그리스도를 빛내기 위해서 하는 것, 하나님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 하는 것, 이 얼마나 거룩한 생활인가! 또 이것이 얼마나 우주적인 일이고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우리가 중보가 되어서 빛 되신 그리스도를, 떡 되신 그리스도를, 향기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중재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 우주 안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일은 이 임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이것 때문에 필요하고, 먹으라는 것도 이것 때문에 필요하다. 밥을 잘 먹고 살았는데, 죽으면 뭐가 되는가? 밥 먹고 죽었다, 이것밖에 안 된다. 그러면 허망하다.
창세기 5장에 보면 모두 밥 먹고 죽었다는 그 말이다. 900살 살고 죽었다. 800살 살고 죽었다. 아무리 오래 살면 무엇 하는가? 밥 먹고 죽었다이다. 묘비에 밥 먹고 죽었다로 새기면 얼마나 비참하겠는가. 이 사람은 몇 년 동안 밥 먹고 죽었다고 하면 오래 살수록 욕이다. 10년 동안 밥 먹고 살았다는 것과 100년 동안 밥 먹고 살았다고 하면 누가 더 욕인가? 이것이 웃을 일이 아니고 심각한 일이다. 비석에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 자기의 비문을 하나씩 써왔으면 좋겠다. 하나씩 써와서 전시회를 해봤으면 좋겠다. 아마도 새로운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 비문을 자기가 쓰는 것을 해봤으면 좋겠다. 좋겠는가? (모두 ‘예’) 그러면 준비하시기 바란다. 비문 전시회를 하자. 요즘 관을 만들어놓고 한번 죽어보기도 있다. 관에 한 번 들어가서 뚜껑 닫는 체 죽는 것을 경험한다고 한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자기 비문을 만들어보는 것 같다.
이러한 봉사를 계속 하는 것! 이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봉사이다.
육(肉)을 처리한다는 것은 천연적인 기질들과 사단에게 빠져서 습관이 된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한 것들이다. 산 혼이 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을 대신하기에 알맞다는 것이다.
육을 처리한다는 것은 천연적인 기질들과 사단에게 빠져서 습관이 된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한 것들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한 것들이 불거져 나온다.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모른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 것밖에 발견이 안 된다. 장사를 하면 장사에 부족한 점만 발견된다. 공부를 해보면 공부하는데 부족한 것만 발견된다. 머리가 좋고 나쁜가, 끈기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것만 발견된다. 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100년 살아도 발견되지 않고, 900년을 살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해보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못한 것이 불거져 나온다. 교회생활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화목이 안 된다. 교회생활에 들어와야 인간이 인간이 된다. 아무리 세상에서 다 잘하고 성인군자가 되어도 그 나라가 안 된다.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백결선생하면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분이다. 세상에는 이런 분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가? 혼자만 깨끗하지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옆에 가서 살기가 어렵다. 제일 살기 어려운 사람이 그 사람 부인이었다. 자기만 이름났지 자기 식구들은 다 고생했다. 못 먹고 굶주리고 살았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교회생활로 들어와야 된다. 그리고 순모임 속에 들어가야 된다. 그래야만 자기가 거기서 합당치 못한 것이 드러나기고 하고 그래야 고칠 필요가 생긴다.
산 혼이 된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을 대신하기에 알맞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사단의 생명을 받았으니 심히 악한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육체가 되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하신 것이다(창6:3). 예수께서는 이 육체가 된 인간을 처리하고 원상으로 되돌리려고 자신의 육체로서 십자가를 지고 육체와 그로 인한 모든 것을 끝내신 것이다. 더 이상 아무 육체(네피림)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사단의 생명을 받았으니 심히 악한 것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저들이 육체가 되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저들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하신 것이다(창6:3). 예수께서는 이 육체가 된 인간을 처리하고 원상으로 되돌리려고 자신의 육체로서 십자가를 지고 육체와 그로 인한 모든 것을 끝내신 것이다. 거기서 말한 그 육체는 그냥 피가 돌고 있는 우리 육체를 말한 것이 아니고, 거기서 말한 육체성은 더 이상 아무 육체(네피림)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하신 것이다. 여기 육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많이 들어있다.
인간의 자랑, 사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인간으로서 자랑스러운 것, 이런 것들이 다 포함된 것이다. 아무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게 한다. 아무리 좋은 육체라 할지라도 자랑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런 업적을 세웠니 저런 업적을 세웠니,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니 저런 사람이라는 것이 많은데, 오히려 반대로 이런 것이 많아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흠이 좀 있는 인간은 나는 흠이 좀 있는 인간이라고 하다가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면 아이고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전혀 무결점 인생이 있다면 이웃집 아무개에게 가보라고 한다. 전도하러 가면 우리 셋째 아들에게 가서 전도 좀 하라고 한다. 자기는 전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가면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괜찮고 이 정도면 다 잘 산다고 생각한다.
육이 처리된다는 말은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처리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기마이가 좋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디를 가면 대포 여러 잔을 먹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자랑은 많다. 어떤 사람은 내 주먹을 믿으라는 사람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다. 이것이 다 육체다.
네피림은 거인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모자란 것이 천사다. 천사와 결혼했으니까 완벽하게 다 가진 것이다. 천사성도 있고 인간성도 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다. 그 속에 별 것이 다 있다. 사람들이 도전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사람 속에 무한히 것이 들었다고 한다. 개발하면 무한하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꼭대기도 올라가지 우주선 타고 달나라도 가지 이번에 화성을 또 발견했다고 한다. 인간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끝이 없다. 다 훌륭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화목하는 인격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지금 말하는 것이다.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은 성소의 봉사를 계속하여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함으로서 육이 처리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어린양의 아내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5:9참). 신부는 온전한 아내가 되기 위하여 단장한다고 했다.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계21:2,엡5:26~27참).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은 성소의 봉사를 계속하여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육이 처리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무엇이 방해 되는가? 바로 그런 것이 방해가 된다. 세상에 나가면 그것이 자랑거리인데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면 막히는 것이 있다.
이 막히는 것을 처리하고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어린양의 아내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5:9참). 이런 말을 알아듣고 여러 분이 아멘하는 것이 참 대단한 일이다. 맨날 ‘주시옵소서.’만 하다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으로 성숙하여 하나님이 동역자가 되고, 어린양의 아내가 되고, 하나님과 완전한 화목을 누리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부는 온전한 아내가 되기 위하여 단장한다고 했다. 에베소서에는 남편과 아내라고 했다. 계시록에 가면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한다. 그 신부는 계속 신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되기 위해서 신부가 되는 것이다. 신부로 단장한 것 같다. 신부는 그날이 최고로 아름다운 날이다. 두어시간 입고 있는 드레스 한 벌에 천만원을 한다고 한다. 천만원 짜리도 넘는 것도 많다고 한다. 거기에 가면 돈이 돈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조건 단장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최고로 보여야 된다. 자기 인생에서 최고로 예쁘게 보여야 되니까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이다. 완전한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단장을 해야 된다. 그런데 단장한 그 마음으로 그냥 계속 간다면 사람들의 집안은 날마다 결혼식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안 된다. 높이 올라갔다가 뚝 떨어져서 다음날부터는 앞치만 두르고 나오니까 다른 사람이 돼버린다.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단장한다.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계21:2,엡5:26,7참). 오늘 우리에게는 단장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도 한꺼번에 다 되는 사람은 없다.
바울의 소원은 고린도교회가 세상에서 돌아온 것뿐 아니라 더 온전한 화목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바울의 소원은 고린도교회가 세상에서 돌아온 것뿐 아니라 더 온전한 화목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에서 고린도후서를 쓴 것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구속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돌아오는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 온전한 화목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고린도후서를 썼다. 여기서는 자기 예를 많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기가 지금 하나님과의 화목 안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를 바래서 하다 보니 자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고린도후서에서는 자기를 많이 내세우고 있다.
바울의 소원은 고리도 교회가 세상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제단의 구속과 성소의 봉사를 통해서 지성소에 이름으로써 더 온전한 화목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화목이 있으면 더 완전한 화목으로, 더 완전한 화목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다.
친구도 그렇다. 점점점점 더 깊은 친구가 되고, 부부간도 점점점점 더 깊은 부부간이 되고, 결국은 화목을 위해서 있다. 교회는 점점 화목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순모인 하기 전에는 서로 잘 모르고 누가 왔다 가는지도 잘 몰랐다. 순모임을 하다보니까 너무 가까워지고 한 식구가 되어서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순모임을 하지 않는 분들은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고 잘 모를 것이다. 저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한 번 와보기를 바란다. 이번에 ‘그곳에 가고 싶다’에 가서 교역자 모임이 왔던 분들이 식사를 하는데, 식당 사장님이 하는 말이 대구교회는 순모임이 아주 알짜라고 합니다. 그것이 진짜배기라고 선전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중에 있던 목사님 두 분이 그렇다면 한 번 가봐야 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활이다. 내가 가서 성경말씀 듣고 기도하고 손 비비고 오는 것은 절에 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생활이 아니다.
사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는 다른 것이 다 필요가 없어진다. 이 사귐이면 다른 친구도 필요 없고, 세상에 다른 좋은 것도 별로 없고 다 없어지고 온전하게 하나님 나라만 남게 된다.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친구에 따라서 달라지니까 어떤 친구와 같이 노느냐에 따라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과 내가 사귐이 있느냐에 따라서 내 삶이 달라진다.
최적의 환경은 교회생활이다. 인간 최적의 생활이 교회생활이다. 세상 사람들을 만나서 맨날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냥 쓰윽 빠져 들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한참 가다보면 물밑으로 들어가 버리면 빠져나오지도 못한다. 교회 안에 있는 생활이 얼마나 복된 생활인지 모른다.
성소의 봉사를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늘 새롭게 발전해서 더 좋은 화목 안으로 이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스도, 우리의 화목! 화목 교회! 이름이 좋다. 우리가 세상 앞에 내놓을 것이 이것밖에 더 있겠는가? 무엇이 좋다고 자랑하겠는가. 우리교회 와서 여기는 다른 것은 다 없어도 화목이 있네. 이것이 최고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다. 방안에서 이루어진, 몇 몇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 일이 너무 중요한 일이다. 우주의 축을 움직이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시작하면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잘못하여 다 거꾸로 돌아갔는데, 그리스도 한 사람이 옳게 함으로써 다 옳게 돌아간다.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주님이 맡기신 마지막 부탁이다. 화목케 하라는 부탁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바벨에서 흩어져서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아웅거리던 그런 인생들인데 주님께서 예수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구속 안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다 한 몸이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인격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맡기신 화목하는 직책을 우리가 성소 안에서 봉사함으로써 점점 더 깊게 주님께 이르게 되기를 원하고, 또 이 영향력을 세상 가운데 퍼지게 해서 이 불화로 가득한 세상, 갈등이 가득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화목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르는 곳마다 다 화목이 있게 해 주옵소서. 싸우는 곳에 평화가 있게 해 주시고, 갈등하는 곳에 통일이 있도록 주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