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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속에 있는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듣고 나오리라 요5: 25-29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가 발효 중인 가운데 어제 서울의 최고기온은 36.3도를 기록했다. 서울 최고기온이 36도를 넘은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폭염은 미국서부나 러시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유례없는 이상 고온은 연평균 10도 내외의 동토의 땅 러시아 주민들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되고 있다. 지난달 중순 이후 모스크바에서는 34도가 오르면서 하루 5,000~9,000명 규모의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심혈관계 질환을 유발하는 폭염이 기름을 부었다. 시 보건국은 관내 주민 사망자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000명 넘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또 50도를 넘기는 폭염 때문에 펄펄 끓고 있는 미국 서부의 경우 산불까지 겹쳤다. 미국 서부 12개 주에서 최근 발생한 대형 화재는 서울 면적의 5배가 넘는 면적이 불에 탔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폭염은 외국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기후변화는 대표적 인류종말의 징조중의 하나인데 기후변화 말고도 전병병이 횡행하는 것도 마지막 징조중의 하나이다. 코로나가 돌기 시작한지가 2년이 되었지만 변이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코로나를 종식시키기에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국내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 2월 26일 이후 신고된 이상반응 의심 사례는 누적 11만397건이며 신고된 사망자는 총 604명이다. 백신사망자가 이처럼 많은 것도 백신접종을 거부하는 요인이다.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어제 개막한 도쿄 하계올림픽도 코로나로 인해 1년 연기했다가 열렸는데 코로나바이러스 영향으로 모든 경기장에서 사상 초유의 무관중 올림픽이 된 것이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린 이후 지금까지 올림픽 축제가 무관중으로 치러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올림픽 기간중에도 코로나확진은 계속 증가한다면 폐막식은 잘 할수 있을지 긍금하다. 오늘 현재로 확진자수는 1940만명이고 사망자수는 415만명이라고 한다. 적어도 확진자의 2%정도가 죽게 된다니 이렇게 이 세상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두려움에 싸여 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뭔들 못하랴. 그런데 과학과 의학이 마무리 발전하고 생명공학이 아무리 발전 하여도 단지 인간의 생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 뿐이지 우리들 삶을 사망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망을 가장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죄악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그가 무덤에 묻힌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사망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을 들려 주셨다. 인간 역사의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 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망과 부활이 나와 직접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알고 보면 죽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에 대해서 직접 말씀을 하셨는데 얼마나 소망의 메시지인가 읽어보기 바랍니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분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이 신이시라면 그분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듣지도 않고 무관심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분을 어떻게 대하였는가가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말씀하셨는데 마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집 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건축자들에게는 머릿돌이 가장 중요한 돌인데 인생장막을 설계한 건축자들이 주님을 쓸모없는 것으로 보고 버렸는데 그 돌이 어떤 건축자들에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자들이 돌의 진가를 모르고 버렸는데 누구에게는 그 돌 즉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두 벽 사이를 연결하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없이는 인생의 장막이 세워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21: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 기록들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 바로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한 말씀을 결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시118:22)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와같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은 사람도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몰라서 믿지 못해 버림받은 인생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은 그 분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1.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중환자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5장에는 예루살렘성 양문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데 어느 순간 천사가 그 연못에 내려오면 물이 동하게 될 때에는 어떤 병을 가졌던지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고침받는 소문으로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 있는 행각 다섯 채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연못이 동할 때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 중에는 38년 동안이나 누워 움직일 수 없는 병자도 있었다. 그는 누워 움직일 수 없으므로 연못물이 동한다 할지라도 자기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가 중병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그 연못가와 행각에는 수 많은 병자들이 그저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병자들은 기다리다 지쳐서 돌아가기도 하고 또한 중병에 걸린 자들은 기다리다 죽어가는 병자들도 있는데 그 중에는 38년 된 중풍병자가 누워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보내거나 그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으며 그는 생각하기를 만약 물이 동한다면 남들이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연못으로 뛰어드는 것을 생각하지만 금새 깊은 한숨과 절망으로 빠져든다. 그래도 생에 대한 미련을 포기할 수 없어 그는 탄식하며 눈물 흘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와 같이 병들어 초라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뒤엉켜있지만 이웃과 이웃이 단절된 고독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어언 38년이 지나면서 온 몸은 굳어 있어 뒤척일 힘조차 없는 이 사람은 그가 이 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은 언젠가는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병이 낫게 될 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가족들도 이웃들도 남남이 된지 오래이며 정말 누구하나 의지할 사람도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으며 다만 누군가 가져다 주는 떡으로 목숨만을 연명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생을 다하는 날까지 물이 동할 때 연못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뿐인데 갑자기 의식 저 너머에서 자신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일깨우는 소리에 굳어 있었던 온 몸과 의식이 전율하며 순간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른다. 그 때에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은 병자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누구 한 사람도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하는 그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말이 네 나는 낫고자 합니다. 순간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는 온 몸과 전 의식으로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듣고 있다. 38년 동안 오로지 병에서 해방되는 것이었기에 그냥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에 반응하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혀가 풀려 오랜 침묵을 깨고 그가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물을 휘저을 때에 나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그렇게 묻는 당신이 나를 저 물에 밀어 넣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가 말씀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순간 그의 의식은 그의 말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난 날 그의 의식 속을 채웠던 잡다한 종교와 율법, 그리고 고정관념은 다 사라지고 생명만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바로 그분이 말하는 "네가 온전하게 되고자 하느냐?" 하는 그의 말을 알아차리고 그의 육체는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가 온 몸에 흐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다니 갑자기 날뛰는 그를 아무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상황을 마음의 눈으로 그려 볼 수만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것이다. 잠시 뒤돌아보면 그 베데스다 연못의 물외에는 구원이 다른 데서 온다고는 상상도 못하였는데 지금 그 사람 앞에 계신 선생님의 말 한 마디 말 속에 그의 38년이란 질고의 생애가 이렇게 고쳐지다니 이 순간이 바로 자유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렸다고 수없이 속삭였고 찬양을 하였지만 정말 이 병자처럼 그렇게 자유로왔다고 말할 수 있을 까요? 나부터 no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생은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였으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무의미한 38년은 새생명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는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간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곧 그를 거부하는 본 자손들은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갊이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제도 생명을 얻기 위하여 우리주님 앞에 오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내 인생문제 내가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즉시로 해결되는 줄 밀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예수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교권지도자들에겐 눈에 가시같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비난할 좋은 이유는 안식일 날 병자를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였다고 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증오심을 갖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의 교권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들 교리에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예수님에 대해 증오심만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38년 된 중풍환자를 즉시로 고치신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가장 가까이 있던 교권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는 교리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하나님의 품속에 독생자로 계시다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은 사람들처럼 자식을 낳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서 그분께서는 육체로 오셨으므로 우리와 같이 희로애락을 느끼시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인간들을 심판하는 권세뿐만 아니라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를 다 주셔서 기적을 행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계19:16)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을 통하여 사람들의 세계를 들여다 보노라면 구약시대나 현재 문명시대나 사람들은 오직 축복이나 찾고 있는 종교인들이 오십보 백보 모습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날은 안식일로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고 이단자로 정죄당하셨는데 왜 예수님은 하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까? 유대 인들은 안식일에는 여호와神이 보좌에서 쉬신다고 생각하였다. 그 쉬시는 하나님을 인간이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의 잘못된 생각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인류 구속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그분에게 안식이 어디 있겠는가? 38년 된 병자를 하나님이 쉬시는 안식일에 고쳤다는 것에 대한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의 항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란 것을 바로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죄인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도 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귀 있는 자는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2.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오신 메시야 이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시면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인데(사61:1)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7:22) 눈먼 자들이 보며 다리 저는 자들이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정결하게 되며 귀먹은 자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며 가난한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눈 먼자 귀먹은 자 마귀들린 자들을 자유하게 하셨다. 심지어 죽은지 4일이나 되어 무덤속에서 있던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 부르시니 그가 살아서 무덤밖으로 나오게 하는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은 분명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러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기적행하신 것이 일곱군데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가나혼인집에서 맹물로 맛좋은 최상의 포도주를 만드신 것을 시작으로 4장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신하가 예수님에게 와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니 그 사람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집으로 내려가다가 종들을 만나니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으니 어제 일곱시에 열기가 떨어지면서 낫다고 하는데 그 때가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것을 알고 그 식구들이 다 믿었다는 말씀이며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며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오천명을 먹이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고 또 6장 뒤에서는 물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로 올라오신 것이며 9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면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하셨고 11장에서는 죽어서 무덤속에 있던 나사로를 살려 내심으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생사화복을 결정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은 살리신 기적을 본다면 다른 종교의 신이 이런 기적을 행한 것이 한 번만이라도 있다면 그 신을 진짜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종교도 사망에 대한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한 적이 없는데도 그를 신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니 참 그것이 또 하나의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세상에는 이처럼 헛된 것에 미혹되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이방 종교들을 믿는 사람들은 다 이처럼 자기만도 못한 대상을 신으로 숭배하며 복받기를 원하고 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이 믿는 신의 도움을 받고 살고 싶지만 실은 우리가 믿는 예수그리스도를 제외하면 모든 종교는 사람이 만든 짝퉁종교로 결국은 사탄마귀와 통한다. 부모가 죽으면 조상신이 되어 자식들을 도와준다고 믿고 제사지내는 것을 미풍양식으로 보는 유교가 지배하는 문화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지내는 것을 단번에 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구정이나 추석같은 명절 때 나는 예수님 믿으니 제사안지내겠다고 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차던지 뜨겁던지 하라는 것이다. 차라리 안믿던지 믿을려면 정말 불같이 뜨겁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오리라고 하였던 바로 그 메시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늘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성령이 예배드리는 곳에 임재하여서 우리의 찬양과 기도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들은 그분에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며 그분은 우리마음을 새롭게 변하시켜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로 살고자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믿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각하기를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정말 조작된 것이야. 성경은 사실이 아닌 것을 누가 마치 진리처럼 기록한 것이야. 내가 이런 엉터리 기독교 신앙을 파헤쳐서 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내야지 하면서 불신앙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국은 두손 들고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주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보면 사도바울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몰라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자신의 구세주라는 믿음을 가진 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도였습니다. 정말 신이 존재하는가? 인간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오셨던 것은 사실인가? 등등 이런 의심을 갖고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 중 예수님을 100%확신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뜨겁던지 차던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신이 아닌 것을 증거할 수만 있다면 그런 후에는 안믿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정말 신이라면 이때는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왕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시간에 처음에는 예수님을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하다가 최후에는 예수님이 정말 신이야 정말 하나님이야 굴복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도 잘하는 벤 허의 이야기입니다. 벤허의 원작품명은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미국의 소설가 Lew Walace의 소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가 바로 벤허라는 영화입니다(1959). 찰튼 헤스턴이 벤허로 나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 제1의 부호인 벤허는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날 지붕위에 올라가 구경하다 실수로 기왓장이 떨어짐으로 행차 중이던 총독이 기왓장에 맞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총독을 보좌하는 사람이 벤허의 어린 친구였던 멧살라인데 그는 장차 이지역의 총독을 이어갈 사람인데 하필이면 총독이 부임하던 날 자기의 어릴적 친구가 이런 짓을 한 것에 대해 멧살라는 자신의 앞길을 망친 친구를 용서할 수 없어 벤허를 함선 노예로 보내 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벤허가 노를 젓던 함선이 해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벤허는 함장인 아리우스의 목숨을 구해준 일을 계기로 선장인 아리우스는 벤허를 양자로 삼고, 섹스투스 아리우스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전 재산을 물려주고 죽는다. 그래서 로마 시민으로 거듭난 벤허는 복수를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자유의 몸이 되어 귀향하나 집은 폐허가 되었고 어머니와 누이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섹스투스 아리우스'란 로마시민으로 다시 태어난 벤허는 폐허가 된 옛집을 사들이고 집수리를 시작한다. 멧살라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벤허는 유월절에 열리는 전차 경주에서 멧살라를 제거할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멧살라는 차기 총독으로 내정돼 아버지 아그리파 의원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전차경주에 참가하였다가 전차경주에서 벤허에 의해 사고로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죽기전 어머니와 누나의 거처를 알게 된다. 나병자들이 사는 골짜기에서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 기적을 행한다는 예수에게 데리고 가는 날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처형장으로 가시는 날인데 베허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받는 예수님에게 물을 떠다 준다. 그때부터 벤허의 마음속에 들끓던 증오심은 씻은듯이 사라져 버리고 어머니와 누이도 나병이 깨끗이 치유된다는 이야기이다. 원제[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 벤허로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석권한 미국영화상 경이적인 작품으로, 예술성·종교성·오락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 소설은 라볼드 잉그솔이라는 무신론자가 역시 무신론자인 친구 류 월리스(Lew Walace)장군에게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쓰라고 권면해서 쓴 책이라고 한다. 월리스는 그 책을 쓰기 위해서 우선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성경을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번 성경을 읽은 후에도 미국과 유럽의 유명 도서관에 가서 예수에 관한 책을 찾아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가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자료가 너무 많지만 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생각이 변했다. 마지막에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회개하고 큰 은혜 속에 잠기게 되어서 월리스는 결국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벤 허' 라고 하는 유명한 소설을 써서 예수의 마지막 생애를 묘사하였던 것이 벤허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관한 이야기는 영국의 한 젊은 변호사인 프랭크모리슨이 저술한 [누가 돌을 옮겼는가]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똑똑하고 영리한 젊은 변호사인 프랭크 모리슨은 너무 지식으로 교만해져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고? 공자도 죽었고 석가도 죽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인가에 대해 자기가 잘못된 것을 증명할게야. 자기의 지식을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짜다 생각하고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 해갔고 그 제자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학자를 과 지질학자를 만나고 과학자와 종교학자를 만나고 그다음엔 기독교에 대하여 공격하는 학자를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놀랍게도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짜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변호사가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주님의 부활이 확실한 거예요. 그래서 ‘누가 돌을 옮겼나’라는 책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사람이 프랭크모리슨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확실하게 죽었고 확실하게 부활하였고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성경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철저히 예수님 반대편에 섰어도 나중에는 오히려 더 잘 믿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날조되었다고 다방면에서 조사 연구하다보면 나중에는 예수님은 진짜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이시고 이땅에 오신 메시야라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어느 때 보다도 성경읽기가 어렵다고 한다. TV도 봐야하고 스마트폰에 빠지다 보니 정말 이렇게 바쁘게 생활하는데 언제 한가하게 성경 읽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따라가는 것이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보기에는 길도 협착하고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적을 지라도 결국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3.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리라
(요5:25, 28-29) 25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고 있는데 곧 지금이라. 듣는 자는 살리라. 28 이 말에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고 있나니 29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정죄의 부활로 나오리라.
처음에 말하였던 38년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즉시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간 것은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놀랄만한 일이라도 기적을 당한 당사자만큼이야 우리가 감동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나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보니 지나가는 이야기로만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5:25절의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은 분명히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니 잘 들어봐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죽어서 무덤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말씀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이미 2천년 전에 일어났던 과거사지만 일곱째 나팔이 울려퍼지는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죽은 자들이 무덤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서 무덤 밖으로 나온다는 말씀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 어디 있나요?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앞에서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절망적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가장 소망적인 말씀을 주시었습니다. 무덤 속에서 수백년 아니면 수천년 동안에 시체는 다 흙이 되어 아무 흔적도 없다하더라도 반드시 그 날이 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나요? 이 말씀을 증언하고자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하여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는 뿔뿔이 흩어졌거나 베드로처럼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제자들은 모두가 목숨바쳐서 예수님을 믿었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무덤속에 있는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살아난다는 그 말씀도 믿을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릴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우릴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장차 우리들도 부활할 것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말에 놀라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나올 때가 오고 있나니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정죄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무덤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부활을 하지만 생명의 부활로 하는 사람도 있고 정죄의 부활로 나오는 자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오류가 전혀 없으므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도 그분께서 "일어나라"하시니 병자가 일어났고, "물러나라"하시니 마귀들이 물러났고, "조용하라"하시니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지나가는 상여를 멈추시고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니 곧 관속의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고 죽은 지 나흘되어 이미 무덤에 장사지낸 시체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하시니 그 죽은 자가 무덤속으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이제 죽었던 나사로가 걸어나온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4.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그가 걸어 나오다.
죽음은 생명도 없고 아무런 감각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전도자가 있어 이런 복음을 들을 수 있음을 감사하고, 마음이 열려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하나의 사건이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성경을 읽을 때 제가 그 사건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 성경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그 사건의 증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충만히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으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절대 오류가 없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거짓이 아닌 진리로 받아 들여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되는 나사로 이야기는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누이들이 예수님께 오빠를 다시 살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1:25-27)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시체에서 썩은 냄새가 나더라도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사로가 현장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할 때 오빠가 부활에 동참할 것을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므로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이스라엘 지역의 장례 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베로 동여 동굴에 넣어 놓고, 그 앞을 커다란 돌로 막아서 동굴 안으로 사람이나 동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베다니 지역은 날씨가 너무 더워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면 시체는 이미 부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굴 앞에 가로 막은 큰 돌을 치우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사로가 살아 걸어 나올 것을 준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체가 썩어서 이미 냄새가 나고 있다며, 돌을 치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의 명령대로 돌을 치웁니다. 돌이 치워진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기도하시는 내용이 성경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배워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언제나 빠짐없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므로, 내가 지금 기도하는 내용도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라고 믿고 기도하면 응답은 100%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둘째,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해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 둘러선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려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 응답의 결과는, 응답을 주신 하나님께만 그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미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 몸을 베로 동인 채 일어나서 활짝 열어놓은 동굴을 통해 걸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저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완전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적인 현장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 모였던 모든 자들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제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할렐루야...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아멘.
제가 믿나이다. 또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죄로 죽어 마땅하였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다시 산 자의 고백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갈 뿐이지 연옥이니 극락세계니 그런 곳은 없습니다. 이런 말은 불교나 천주교에서 지어낸 가짜교리입니다. 절대로 그런 곳은 없습니다. 사람의 선과 악은 이 세상 있을 때 모두 끝납니다. 인생을 지으시고 인생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 무엇보다 인생의 사후의 세계를 주관하시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고 했습니다.
5. 세상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잃은 사람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정보들을 들으면서 이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인간을 심판하는 권세를 다 주셨으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정보를 모르고 살면 정말로 헛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와 방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순종하는 삶이 있는가 하면 또 세상의 쾌락과 물질을 추구하며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면서도 1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사는 인생들도 있습니다. 인생들이 살아가는 자유와 방종에 따라 생명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판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안믿느냐는 내가 생명의 부활로 나오느냐 심판의 부활로 나오느냐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생명의 부활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어야만 생명의 부활로 나올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한 것을 본 것 처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고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보고도 믿지 못하는 놀랄만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심판의 부활로 나오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군병인 파수군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현장을 목격한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덤을 지켰으므로 부활의 현장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지진이 나면서 무덤문에 있었던 돌이 옮겨진 것과 예수님이 시체가 무덤속에서 없어진 것이며 여자들과 제자들이 그곳에 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며 누구보다 그 부활의 현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파수군들은 유대장로들로부터 많은 돈을 받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을까
(마28:13)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 하러 갔다 하라. 그들은 유대장로들이 시키는 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으로 퍼뜨리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기가 어디라고 로마군병인 파수군들이 경계하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잡혔을 때 제 목숨 살고자 도망갔던 나약한 제자들인데 죽은 예수를 위해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로마군병들이 있는 곳에 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간다는 것이 가능하냐고요? 턱도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럼에도 로마파수군병들은 돈에 매수되어 진리를 그렇게 거짓으로 전했으니 정말 불쌍하지요.
또 누가 불쌍합니까 돈을 준 유대장로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이야기하여 파수군들로 하여금 무덤을 지키도록 의뢰했던 당사자들이고 그럼에도 그들이 믿었던 대로 사흘만에 예수가 부활한 것을 자기들이 듣고 확인까지 하고 돈을 주면서 까지 이 부활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다니 정말 구원받을 기회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랍비라는 존칭을 받으며 옷에 큰 술을 달고 옷소매에는 경문을 차므로 아주 경건하게 보이며 영생을 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싫어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주변에는 잘못된 이론들이 잘못된 철학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진리도 아닌데 진리라고 유혹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거기에다 종교는 다 똑같은데 아무종교나 하나 가지고 선하게 살면 되지 하면서 이렇게 유혹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하게 살아간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는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나 그들은 선하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중의 하나가 아니예요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인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시작과 끝을 알려주고 이 세상 죽은 다음에 어디를 가는 것인지 영원한 삶까지도 알려주고 모든 만물이 어떻게 만들어 졌고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책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만이 진리인 줄로 믿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종교끼리 서로 소통하며 싸우지 말고 서로 연합하는 것을 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연합하는게 아닙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종교와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신이 교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불로서 응답하였지만 바알신은 불로써 응답을 할 수 없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친히 그가 보여주신 수많은 기적들이 그분께서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오셨으므로 죽은지 사흘만에 자신이 말씀하신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번도 부도난 적이 없습니다. 파도를 향하여 잔잔하라 하면 즉시 파도가 잔잔하였고 마귀들을 향하여 나가라하면 즉시 마귀들이 순종하였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도 있지만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이로서는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에서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후 40일후에는 승천하셨고 세상끝날이 되면 다시 오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6. 무덤속에 있던 자들이 주님음성 듣고 다시 나온다는 말씀
성경의 진리는 예수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다는 사실만을 믿는다면 내가 죽어도 사는 진리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내가 죽었는데 다시 산다는 말인데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헛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말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면 우리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런 진리를 모르고 잘못된 믿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종교인 경우는 여기서만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영원히 영원히 고통받는 것입니다. 그들도 심판을 위해 부활 하지만 그들의 모든 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행한대로 댓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행한 것 밑에 예수의 이름으로 사하여 졌다는 예수님의 사인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어도 사는 이 진리를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가장 확실한 정보를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나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아니하리라. 이런 정보를 들어야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요11:11)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잖아요. 주님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이 없고 자는 것 뿐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자 오늘의 주제는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들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4일이 지났고 그 시체는 무덤에서 부패되었는데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는 샘플에 지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그날 영광의 순간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