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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한계령~끝청~중청 대피소~대청봉~(다시) 중청 대피소~희운각 대피소~무너미 고개)~[천불동 계곡~설악동](250622. 일)(낙동산악회 19기 34구간)
□ 때 : 2025. 06. 22(일)
□ 곳 : 백두대간(한계령~끝청~중청 대피소~대청봉~(다시) 중청 대피소~희운각 대피소~무너미 고개)~[천불동 계곡~설악동]
□ 낙동산악회
□ 참여 : 모두 27명 안팎
□ 날씨 : 햇볕
□ 길 : 바윗길+돌길
□ 걷는 데 걸린 시간 : 2025. 06. 22(일) 03:20~13:01(9시간 41분, 쉰 시간 포함)
□ 간추린 발자취(제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 03:20 한계령 나섬.
○ 04:44 한계령 삼거리
○ 06:58 끝청 전망대
○ 07:22~07:45 아침밥
○ 07:54 끝청 · 소청 갈림길
○ 07:56 중청 대피소
○ 08:15~08:25 대청봉(1708.1m-‘푯돌’), 머묾.
○ 08:38 (다시) 중청 대피소
○ 08:41 (다시) 끝청 · 소청 갈림길
○ 09:02~09:12 봉정암 · 희운각 대피소 갈림길, 머묾.
○ 09:54~10:05 희운각 대피소, 머묾.
○ 10:12 무너미 고개
○ 10:57 양폭 대피소
○ 12:15 비선대 아래
○ 13:01 설악동 주차장, 산행 끝냄.
백당나무
눈개승마
귀때기청봉
설악산에는 '청' 자 돌림 봉우리가 많다
대청봉, 중청봉, 소청봉, 끝청봉, 귀때기청봉.
세잎종덩굴
꽃개회나무
뒤로 귀때기청봉이 보인다
용아장성릉
용아장성릉
당겨 본 용아장성릉
중청봉
다시 짓고 있는 중청 대피소와 대청봉
대청봉
대청봉으로 오르면서 뒤돌아 본 중청봉과 새로 짓고 있는 중청 대피소
아래는 전애 중청 대피소가 있던 곳이다
대청봉에서 바라 본 화채능선
□ 줄거리(글쓴이 기준이므로 각자 다를 수 있음)
2025. 6. 21(토) 21:40을 넘겨 000 역을 떠난 버스는 4시간 35분쯤 달려 한계령에 닿았다.(6. 22. 일 03:15)
날이 바뀌어 2025. 6. 22(일) 03:20 한계령을 나섰다.
우리 말고 다른 무리 사람들이 한꺼번에 한계령 들머리 계측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거의 돌길로 된 등산 길이 꽤 붐빌 것으로 예상했다.
한계령에서 1시간 24분쯤 뒤 한계령 삼거리에 닿았다.(04:44)
귀때기청봉과 대청봉 갈림길이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끝청 쪽으로 조금 가다가 참고 참았던 생리 현상을 해결했다.
고통이 해소되었다.(04:45~04:52)
한계령 삼거리에서 2시간 14분쯤 뒤 끝청 전망대에 닿았다.(06:58)(중간에 지체한 7분쯤 포함)
전에는 일부 구간이 비스듬한 바위가 있어 조심해야 했으나 이번에 보았더니 널빤지 계단을 깔아 놓아 걱정하지 않고 지났다.
끝청 전망대에서 귀때기청봉과 안산과 그 너머 가리봉, 주억봉까지 보였다.
끝청 전망대에서 중청 대피소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용아장성릉 멋진 바위가 보여 사진기를 눌러댔다.
끝청 전망대에서 24분쯤 뒤, 중청 대피소를 500m쯤 앞둔 곳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서(07:45) 9분쯤 뒤 희운각 대피소 갈림길에 닿았다.(07:54)
중간에 중청봉에 오르고 싶었으나 전에 중청봉에 올랐다가 물기 머금은 바위에 미끄러지면서 손가락을 크게 다친 적이 있어 가지 않았다.
이 갈림길에서 2분쯤 뒤 중청 대피소 터에 닿았다.(07:56)
중청 대피소를 뜯어내고 가림막을 쳐놓고 새로 짓고 있는 듯했다.
중청 대피소 터에서 19분쯤 뒤 대청봉(1708.1m-‘푯돌’)에 닿았다.(08:15)
우리보다 조금 앞서 대청봉에 올랐던 사람 대여섯 사람이 여러 자태로 사진을 찍는 바람에 시간을 제법 허비했다.
세찬 바람이 온몸을 때렸다.
9분쯤 머문 뒤 대청봉을 되돌아 내려왔다.(08:24)
대청봉에서 조금 내려오면 백두대간 정통 길로 접어드는 곳이 있으나 그곳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뿌리쳤다.
대청봉 오를 때 찍었던 바람꽃 두어 개체를 다시 찍었다.
세찬 바람에 꽃잎이 흔들려 찍기 어려웠다.
대청봉에서 14분쯤 뒤 다시 중청 대피소 터에 닿았다.(08:38)
중청 대피소 터에서 3분쯤 뒤 다시 끝청 · 희운각 대피소 갈림길에 닿았다.(08:41)
갈림길을 지나 계단 있는 곳에 닿았을 때 용아장성릉 칼날 산등성(이)이와 화채 산등성(이) 따위가 발길을 붙들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끝청 · 희운각 대피소 갈림길에서 21분쯤 뒤 봉정암 · 희운각 대피소 갈림길에 닿았다.(09:02)
과일을 나눠 먹으면서 10분쯤 머문 뒤 갈림길을 나서(09:12) 42분쯤 뒤 희운각 대피소에 닿았다.(09:54)
머물면서 화장실 다녀오고, 가득 들었던 물통을 비우고 계곡 물로 새로 한 통 채우고, 마셨다.
11분쯤 머문 뒤 희운각 대피소를 나서(10:05) 7분쯤 뒤 무너미 고개에 닿았다.(10:12)
발 빠른 사람들은 공룡능선을 거쳐 마등령에 닿았다는 말을 들었다.
무너미 고개에서 천불봉 쪽으로 내려섰다.
무너미 고개에서 45분쯤 뒤 양폭 대피소에 닿았다.(10:57)
양폭 대피소에서 1시간 18분쯤 뒤 비선대 아래에 닿았고(12:15), 비선대에서 46분쯤 뒤 설악동 주차장에 닿아(13:01) 산행을 마쳤다.
공룡능선까지 갔다 온 권재구 대장 님을 비롯한 대원들, 비선대 금강굴에 갔다 온 연꽃 님을 비롯한 대원들. 적토마보다 빠른 발걸음에 손뼉을 친다.
길잡이 네오 대장 님을 비롯한 대원 여러분 수고 많이 했다.
회장 님, 기사 님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하며, 밥값을 찬조하신 대원들에게도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비 내린다며 한사코 산행에 나서지 말라는 아내 말을 따돌리고 나선 설악산 길.
한두 번 드는 설악산이 아니건만 다시 가고 싶은 것은 왜일까?
매번 설악산을 제대로 보고 느끼지도 못하면서 들고 또 드는 것은 왜일까?
딱히 한두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이 설악산으로 발길을 옮기게 한다.
득도(得道)하는 심정으로 나서지만, 결국에는 땀에 절어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루이틀 지나면 힘들었던 것은 말끔히 잊어버리고 다시 설악산을 떠올리는 내 얄궂은 심사는 어떤 연유에서 오는 걸까?
이번에 육안으로 미처 확인하지 못한 향로봉, 금강산 산등성(이)
아마도 설악에서 향로봉, 그 너머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북녘 백두대간을 이어 걷고 싶은 욕심이 바탕에 깔린 것이리라.
설악산 경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데, 백두대간 길 따라 금강산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광경이 펼쳐질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백두산까지 내 발로 차근차근 걸어 백두대간을 완성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남한 구간만 여러 번 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보지 않은 반쪽 백두대간 길.
언제쯤 가볼 수 있을지?
남북통일이 되어 북녘 대간 길을 갈 수 있으면 더 좋고, 통일 전이라도 교류가 활성화 되어 당국의 허가 아래 백두대간만이라도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굳건한 희망이 현실이 되는 꿈을 꾼다.
◎ 이 구간에 있었던 나무(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나, 내가 아는 것만 기록함)
○ 단풍나뭇과 갈래 : 단풍나무, 부게꽃나무, 시닥나무
○ 목련과 갈래 : 함박꽃나무
○ 물푸레나뭇과 갈래 : 꽃개회나무, 물푸레나무, 정향나무(?), 털개회나무(?)
○ 미나리아재빗과 갈래 : 요강나물
○ 소나뭇과 갈래 : 눈잣나무,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젓나무, 종목(樅木)]
○ 인동과 갈래 : 백당나무, 붉은병꽃나무[물병꽃나무]
○ 자작나뭇과 갈래 : 사스래나무
○ 장미과 갈래 : 국수나무, 마가목, 산딸기나무[산딸기], 산조팝나무, 생열귀나무
○ 진달랫과 갈래 : 산앵두[산앵두나무, 꽹나무, 철쭉[철쭉나무, 척촉(躑躅), 산객(山客)], (털진달래)
○ 콩과 갈래 : 싸리(나무)
◎ 이 구간에 있었던 덩굴성 식물
○ 노박덩굴과 갈래 : 미역줄나무[미역순나무]
○ 미나리아재빗과 갈래 : 세잎종덩굴
◎ 이 구간에 있었던 풀
○ 국화과 갈래 : 단풍취
○ 마디풀과 갈래 : 범꼬리
○ 마타릿과 갈래 : 금마타리, 쥐오줌퓰
○ 면마과 갈래 : 관중[관거, 바람꽃, 관절, 면마],
○ 미나리아재빗과 갈래 : 산꿩의다리, 투구꽃(?)
○ 백합과 갈래 : 말나리(?), 박새[동운초, 여로(藜蘆) 02], 삿갓나물
○ 앵초과 갈래 : 앵초
○ 장미과 갈래 : 눈개승마, 산오이풀, 터리풀
□ 짐승 : 다람쥐
□ 그밖에
◎ 흘러가는 생각을 잠깐 붙들고...
중청봉에 올랐다 부주의로 손가락 다침
2011. 8. 14(일) 낙동산악회 백두대간 9기 - 34구간 때 일이다.
끝청을 지나 중청 대피소로 가는 길.
일행은 곧장 중청 대피소로 내려가고, 나 혼자 중청봉으로 올라갔다.
중청봉에 올랐다 내려섰다.
적바림하다 작은 바위가 물기를 머금고 있던 것을 채 발견하지 못해 발을 딛는 순간 사정없이 미끄러지면서 나도 모르게 손을 짚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찢어질 듯 아팠다.
조건반사적으로 손으로 바위를 짚으면서 엄지와 집게손가락[검지]에 바위 돌출 부분이 끼였고, 가운뎃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위에서 바깥쪽으로 억지로 벌어지면서 뼈를 조금(?) 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몹시 아팠다.
그러고도 미련한 돌출 행동을 계속했다.
대청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
정통 백두대간 길을 걸어볼 욕심으로 출입을 금하는 밧줄을 넘었다.
아픈 손가락을 부여잡고 길도 뚜렷하지 않고, 아주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
얼굴을 할퀴는 나무와 풀을 헤치고 땀을 비 오듯 쏟아가면서 내려섰다.
희운각 대피소를 코앞에 두고 단속 요원에게 들키지 않으려 망을 보았다.
다행히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밧줄을 넘어 희운각 대피소에 닿았다.
다음날 작은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대학병원으로 가야 했는데, 손가락 하나 다친 것을 큰 병원에 가는 것이 어울리지 않다고 안이하게 생각했다.
그리곤 작은 정형외과 의원에 갔던 것이다.
검사 결과 작은 골절로 판정하고, 석고 붕대[깁스]를 했다.
1주일쯤 지나 석고 붕대를 풀었더니 가운뎃손가락이 활처럼 굽어 있었다.
정형외과 의원에서 굽은 가운뎃손가락을 편다며 펄펄 끓는 양초 물에 손을 집어넣으란다.
오른손 전체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조금 펴지는 것 같았으나 다치기 전 상태로는 되돌아 오지 않았다.
양초 물에 담그는 치료를 채 1주일을 채우지 못하고 나는 치료를 중단했다.
차도는 없고, 열에 데운 양초 물은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잘 참는다고 생각했는데, 뜨거운 양초 물은 견디지 못했다.
지금도 가운뎃손가락이 완전히 펴지지 않고 조금 굽어 있다.
사고 뒤 컴퓨터 자판기 두드리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지금은 손가락이 조금 굽은 채로, 조금 불편하고 빠르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자판기를 두드린다.
순간의 부주의가 큰 후유증을 남겼다.
2. ‘대청봉 커피’
2013. 9. 20(금) 한가위 때였다.
00 님과 의기투합하여 화채능선 길에 참가했다.
00 님은 부산에서 출발, 나는 서울에서 아내와 아들 내외, 작은 아들과 강원 춘천시, 정선군 일원에서 식구들끼지 나들이하다 말고, 강릉 00 휴게소에서 000 산악회 버스를 탔다.
아들 둘이 나를 태워주고 숙소로 되돌아가면서 사람과 차 하나 없는 험한 길에서 고생을 많이 하고 무서웠다고 했다.
새벽 일찍 오색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대청봉에 닿았는데, 사람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날려갈 만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푯돌 옆에서 사진을 찍고 몇 발짝 내려섰다.
00 님이 내게 불쑥 일회용 믹스 커피 막대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00 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00 님이 웃으면서 “지금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커피를 탈 수 없어요. 아쉬운 대로 키피 봉지를 찢어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셔요...” 한다.
얼떨결에 00 님이 일러준 대로 커피 막대 봉지를 찢어 커피 가루를 입에 틀어 넣었다.
그리고 그가 내미는, 따뜻한 물에 찬물을 섞은 물을 마셨다.
자연이 보였던 매서운 시련(?)을 엉뚱하게(?) 타개한 기발한 발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든 나는 그 일을 엊그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커피 맛이 무엇에 비길 데 없이 감미롭고, 향기 짙고, 맛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뒤 그를 만나면 힐난(詰難) 조(?)로 그 얘기를 하고, 함께 웃곤 했다.
그는 참으로 영혼이 맑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는 내 재미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귀담아들어 주었다.
그는 내 경직된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완곡하게 진심 어린 충고를 했던, 몇 안 되는,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다.
색다른 커피를 삼키고 대청봉을 나섰다.
미리 익혀둔 대청봉 아래 화채봉 가는 길 앞에서 둘은 밧줄을 넘었다.
화채봉을 지나 토왕성 폭포 옆 천 길 낭떠러지 옆을 지날 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유난히 바위 타기를 즐겼던 사람이다.
나는 엄청난 낭떠러지를 보고 겁이 나서 오금이 저렸으나 그는 아주 당당했다.
낭떠러지 옆을 걸을 때 나는 완전히 네발로 기다시피 했다.
그는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당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수직 바위 구간에 닿았다.
몇십 미터 되는 바위 구간에 5~7m쯤 될까 말까?
낡은 밧줄 하나만 달랑 걸쳐져 있었다.
당시 산악회에서 밧줄을 준비해 가지 않아 바위를 타고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다.
내려갈 수도, 그렇다고 대청봉 쪽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일행 대여섯 중에 3m쯤 되는 밧줄을 가진 대원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꺼낸 밧줄을 묶어 기존에 있던 밧줄에 이어 붙였다.
누더기(?) 밧줄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이어 붙인 밧줄도 충분히 길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먼저 밧줄을 타고 내려가 끝 지점에서 땅으로 뛰어내렸다.
남은 대원들도 처음 내려간 사람이 아래에서 요령을 일러주는 대로 끝 지점에서는 모두 밧줄을 놓고 뛰어내렸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웅장한 토왕성 폭포를 구경하면서 우리는 넋을 잃고 사진을 찍어댔다.
물이 적어 실 폭포 같아 보였던, 300m에 달한다는 3단 폭포.
그 높이에 충분히 압도당했다.
토왕성 폭포는 겨울에 빙벽 훈련하고, 빙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폭포를 지나서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당시에 100만 원을 훌쩍 넘겼던 길 도우미(GPS)를 가진 대원이 열심히 기계를 움직여 겨우 길을 찾았다.
그 대원은 뒤에 기맥, 지맥 몇 구간을 같이 걸었던,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진기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는 사진 대가였다.
제법 긴 구간을 그가 뚫는 길을 헤치며 설악동으로 내려왔다.
‘설악산 커피’로 감미로움을 맛보았다.
그가 제안해서 생전 처음 가 봤던 화채능선, 토왕성 폭포, 수직 바위 구간.
쉽지 않은 구간을 급조한 누더기(?) 밧줄로 내려선 아찔했던 날이었다.
00 님.
그가 시범 보였던 요가 동작 하나를 나는 요즘도 가끔 연습한다.
그가 내게 끼쳤던 선한 영향을 고맙게 여긴다.
늘 건강하고, 즐거운 일 많기를 바란다.
3. 조난 직전까지 갔던 무모한 산행
1989. 12. 24(일). 겨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왕초보 산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일터에 학훈단(ROTC) 출신 후임이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산을 좋아하는 내게 설악산을 가자고 제안했다.
장비도 별로 갖추지 못했던 나는 설악산에 가기 위해 ‘00산장’에 가서 겨울 등산옷 한 벌, 양털 장갑 따위 많은 등산 장비를 샀다.
그리고 새로 산 장비를 꾸려 산행에 나섰다.
당초 한계령~끝총~중청~대청봉~오색으로 산행할 계획이었다.
버스가 한계령으로 가고 있었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림에 따라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한계령 출입을 금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산행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차선책으로 한계령으로 향하던 버스는 한계령이 아닌 다른 곳에 우리를 부려 놓았다.다음날 새벽 오색~한계령 어디쯤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어딘지도 잘 모르고 조금 올라가고 있었다.
여러 산악회 사람들이 하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많은 눈이 내린 까닭에 조난을 걱정하여 내려온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산행에 나섰던 날을 기준으로 그 얼마 전 독주폭포에서 대규모 조난 사고가 있어 더욱 겁을 먹었던 것이다.
이럴 때 산악회 집행부에서 현명한 판단과 대처를 해야 함에도 00 산악회 집행부는 온데간데없어졌다.
무책임한 00 산악회를 욕하면서 우리는 각자도생을 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와 김00 씨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대청봉을 오르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결국 생면부지 서울에서 온 산악회 단체 가운데 일부 젊은 대원들과 합류하여, 의기투합(?)하여 무작정 대청봉을 오르기로 했다.
서울서 온 젊은 대학생인 듯한 젊은이들이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와 동행인은 젊은이들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무작정 걸었으나 길을 찾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산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고 있었다.
같이 걷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겁을 먹고 “이러다 조난 당하겠다. 되돌아 가자”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으나 한계령 쪽에서 한계령 삼거리 쪽으로 가려면 등산 길이 그랬다.
10여 명 남은 사람들 가운데 7~8명이 “되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이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겁도 없이 “이왕 시작한 것이고, 산이란 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서는 때로는 아래로 내려가는 수도 있으니 조금 더 가 보자“고 설득했다.
결국 10명 가량 남은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헤친 눈밭을 따라 조용히(?) 걸었다.
20분쯤 더 걸었더니 이내 한계령에서 대청봉으로 가는 길을 만났다.
우리는 결국 대청봉까지 갔다가 오색 쪽으로 내려왔다.
얼마나 눈밭에 많이 넘어졌는지 털장갑은 얼음으로 변해 있었다.
대청봉에서는 자동[오토] 사진기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였으나 사진기가 얼어 작동이
되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내게 ”사진기가 얼어서 그러니, 품에 넣고 데워서 찍으면 된다...“고 했다.
그 사람이 일러주는 대로 하였더니 1장 정도는 되고 또다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진기를 몇 번이고 품 안에 넣었다 꺼내 찍고, 또 품에 넣는 번거로운 동작을 반복하여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너무 무리하고 무모하게 등산을 강행했다.
돌아보면 설악산 산등성(이)과 그 언저리에서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때로는 힘들고, 괴롭기까지 했던 순간들.
힘들 때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으나 며칠 지나면 다시 가고 싶은 곳. 그곳이 설악산이다.
그 모든 일들이 이제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아직도 모르는 구석이 많지만, 이제 설악산 구간을 크게 보는 여유로움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힘들 때가 있어도 자꾸만 설악산에 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까닭이다.
※ 다른 사진은 아래 제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blog.naver.com/angol-j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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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젊은날의 회상 부분이, 훨씬 구체적이어서 읽는 독자의 감정 이입이 잘 되어 있어서 더욱 실감납니다
설악산에 대해 다양한 추억을 가지고 계셔서, 설악산은 수 십가지의 얼굴로 드러날 것 갔습니다
멋진 기억입니다.
참 사진 고맙습니다.
몇 번은 멋 모르고 나섰다가 설악산이 가진 아름다움이 나그네 발길을 불러들였습니다.
부대끼면서 어렴풋이 얼굴을 내미는 듯 하다가 진면목을 감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무쏘꿈 님처럼 철학을 공부했다면 형형색색 오묘한 바위를 보면서 심오한 인생 교훈이나 진리 같은 것을
퍼올렸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고 헉헉거립니다.
고압습니다.
우왕
짱 재밌어요
눈밭에~
비바람에
뜨거운 🔥 태양
거미줄 ,잡목가시,미끄러운돌
자유롭고 산을 정원삼아
평생을 사셨을 기록과현장이
생생합니다
멋진분과 현시대에 대간을
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광이여요
빛나는 일출만큼
걸어온 발자취가 반짝거려요
운해만큼 선생님의 일생이 피어나는 물안개셔요
최고 👍 👍 👍 십니다 👏 👏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알맹이 없는 말을 너저분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지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회상하지만 당시에는 땀 뻘뻘 흘리거나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설악산에 안겼습니다.
발길이 거듭 포개치고 시간이 가면서 거대한 설악산 귀퉁이나마 알아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나무만 보는 수준이지만, 수풀을 볼 때가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
산행기 재미 짱입니다.
한길 큰형님에게서 도저히 떠오를 것 같지 않는 무용담이 놀랍고, 재미있네요.
대청봉 커피 맛은, 저도 한번 적절한 시기에 시도해봐야겠습니다.
혹, 컵라면도 가능할까요? ㅎㅎ
추석 연휴 여행중, 가족들 버리고 설악산에 산행가시고...참으로 대단한 베짱이십니다.
비법이 있다면, 저도 배우고 싶은데, ...ㅎㅎ
이번 산행기를 읽어면서, 지난 수 십년 동안, 형님의 산행 경험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 잘 되질 않네요.
형님의 산행기를 읽어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행간에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많이 배우게 됩니다. 재미있는 경험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산행때, 건강하신 모습으로 뵙길 바랍니다.
아들 내외, 귀여운 손자, 당시에 혼인하지 않은 작은 아들, 아내. 온 식구가 극구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나섰던 일.
두고두고 원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도 커피를 마실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컵 라면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밧줄이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토왕성 폭포 옆 직벽 구간에서 아연 긴장하고 겁을 먹었으나
멋진 분과 동행한, 접하기 어려운 구간이라 짜릿함이 더했습니다.
그 때 느꼈던 감동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합니다.
좋은 추억이라 오래도록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편 수필,,콩뜨,,ㅡ 산행 후 한길님, 산행기가 기다려지는 것이,, 다음 산행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왜??? 소소한 재미가 많아요.. 할배, 할매, 옛날 얘기 듣는 셈이예요...경험과 경륜에서 나오는 풍부한 이야기샘..!!!
귀담아들을 것 없는 쭉정이 같은 일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줘 민망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허접스런 일을 중언부언 말이 많았으니 또한 부끄럽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