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46. 고려대장경의 간행
뛰어난 주석가들 원력 천년지혜로 결집돼
<사진설명>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고려대장경판.
# 어린 왕자의 천년의 순간
“저라는 사람은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기 짝이 없으나, 어린 나이에 다행히도 선왕의 은혜를 입어 출가하여 중이 되었습니다. 전생에 쌓은 인연의 덕택으로 열여섯 일곱 살부터 서방 성인의 가르침을 따른지 이제 20년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국에 유통한 것은 백에 한 둘도 못되고, 지금 전하는 삼장의 정문(正文)도 겨우 6~7000권에 불과합니다. 그 밖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현철(賢哲)한 주석가들이 천년 동안 대대로 이어져 이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록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재목이 일생을 한결같이 해도 그 일을 모두 이룰 수 없을텐데, 중간 이하의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대각국사문집 ‘내시 문관에게 준 편지’)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열한살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는 열아홉 약관에 임금에게 교장(敎藏)을 결집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후, 문헌 수집을 위해 중국행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복잡한 상황이어서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이 모두 반대를 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내시를 통해 중국 방문의 목적과 당위성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 형인 선종에게 중국 방문을 위한 상소문을 올린 것이 서른 살이 되던 해(1084년)였고, 이듬해에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중국행을 강행했으니, 이 편지는 그 사이에 쓴 것이리라. 이 편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천년’이라는 시간 개념이다. 천년을 끊이지 않고 대대로 이어온 역사와 전통, 의천의 글에는 이 같은 천년의 전통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열아홉에 쓴 ‘세자를 대신하여 교장 결집을 발원하는 상소문(代世子集敎藏發願疏)’에서 의천은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낙양 백마사에 도착한 시점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 이때가 바로 불교가 중국으로 처음 전해졌다는 시점이다. 동한(東漢)의 영평(永平) 10년, 서기로 67년이다. 의천은 1055년에 출생하여, 1065년에 출가했고, 1067년에 승통(僧統)이 되었으니,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시점으로부터 꼭 천년이 되는 해이다.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온 이후 천년을 채우는 무렵에 출가를 했고 승통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후 19살에 바로 그 천년 동안 누적된 장소(章疏)들의 결집을 임금께 발원하였다. 그 사이 언저리 어디쯤에선가 어린 왕자가 천년의 순간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의천은 바로 이 시점, 불교가 중국에 전래한 시점을 기준으로 대장경의 역사를 구분하였다. 이 이전에 형성된 문헌들을 ‘삼장(三藏)의 정문(正文)’이라고 불렀고, 이 이후에 형성된 문헌들을 ‘백가(百家)의 장소(章疏)’라고 불렀다. 삼장의 정문에 대하여는 이미 고려 현종과 문종 양조(兩朝)에 걸쳐, 5천축과 10만송을 새겼다고 했다. 그래서 남은 일, ‘백가의 장소’를 결집하는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송나라로 가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였다.
사실 천년이라는 시간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천년의 순간은 어쩌면 관념의 순간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천년이나 아승지겁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 승통에게 천년은 관념의 순간만은 아니었다. 손꼽아 헤아려 얻은 순간이었다. 요즘처럼 숫자로서 시간을 표현하던 시대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요즘에는 1067년에서 67년을 빼면 간단히 천년의 흐름을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연호를 따지고 육갑을 맞춰야 하는 까다로운 셈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셈을 거쳐 자신이 천년의 순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운명 같은 천년이 아닐 수 없다.
# 천년의 지혜를 천년의 미래로
의천은 과거의 천년을 의식할 뿐 만 아니라 과거의 천년이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천년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위에 인용한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법륜(法輪)이 다시 염부제에 구르게 하고, 도(道)의 밝은 빛이 다시 천년을 비추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의천에게는 두 가지의 천년이 있었다. 과거의 천년과 미래의 천년이 그것이다. 천년을 채우는 그 현재의 시점에 서서 과거의 천년과 미래의 천년을 함께 그리고 있다. 기존의 대장경 위에다 새로운 대장경을 결집하는 일을 천년의 과업으로 삼았다. 미래 천년을 향한 천년의 꿈이었다. 이러한 천년의 의식을 가지고 그는 교장을 완성하였다.
의천의 문집에는 교장과 관련하여 세 편의 글이 남아 있다. 앞에 인용한 19살에 쓴 발원 상소문(代世子集敎藏發願疏),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서문, 그리고, 교장의 조인(調印)을 청원하는 상소문(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 등 세편이 그것이다. 내용으로 보아 이 세편은 대동소이하다. 그는 끝내 1091년에 조인을 시작하여 교장을 완성, 대장경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1101년에 입적하였으니, 세수 47, 법랍 36세였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의 글과 인생사에는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집념과 집중력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송나라에 만났던 정원은 “왕궁에서 태어났으나 호사한 삶을 천하고 가볍게 여겨, 공문(空門)으로 출가하여 부처의 깃이 되고 조사의 날개가 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여러 생애에 걸쳐 쌓은 인연의 덕이니, 타고난 인품과 커다란 절개로 이런 큰 과업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라고 찬탄하였다.
하지만 의천의 꿈은 이것으로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장을 결집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문장들을 묶어 <석원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려고 했다.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고, 훗날 후학들이 250권으로 편집, 출간하였다. 이로써 의천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삼장의 정문’과 ‘백가의 장소’를 이어 ‘고금(古今) 문장(文章)’이 결집되었고, 의천이 꿈꾸었던 ‘천년의 대장경’이 비로소 완결된 것이다.
# 고려대장경의 순간들
고려대장경 흔히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해인사 팔만대장경), 그리고 교장(속칭 속장경)으로 구분된다. 고려 현종 2년(1011) 대장경 불사를 시작한 후, 교장이 완성되기까지 90년의 세월이 걸렸다. 고려사(高麗史)는 고려대장경에 관한 몇 개의 사건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종 정묘 4년 2월 갑오일에 임금이 개국사에 가서 대장경의 완성을 경축하였다”라는 식이다. 소위 초조대장경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고종 신해 38년 9월 임오일에 임금이 성의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 판당에 가서 백관을 거느리고 분향을 하였다. 현종 때에 새겼던 판본은 임진년 몽고 병화에 타 버렸으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을 하여 도감을 설치하였는데 16년 만에 준공되었던 것이다.”
재조대장경, 즉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관련한 언급이다. 그 뿐이다. 고려 현종 2년(1011) 고려대장경 조성을 시작한 후, 재조대장경이 완성되기까지 2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는 저 같은 짤막한 순간들만이 남아 있다. 이 순간들 사이에는 긴 틈새가 있다. 그리고 이 틈새들을 채울만한 사료나 증거들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려대장경은 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에서 그렇고, 그 내용의 신비함과 아직도 우리에게 수수께끼로서 남아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고려대장경은 그런 순간들 사이에 떠 있는 섬이다. 우리는 아직도 고려대장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어떤 연유나 경로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세간에서는 고려대장경이라는 섬을 단지 ‘몽고 병화로 인해 16년 만에 새로 새긴’ 물건으로 기억할 뿐이다. 고려대장경은 수세기동안 아시아 불교 문헌의 표준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일본인들은 고려대장경 한 질을 얻기 위해 구걸에서부터 공갈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그런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의천이 경험했던 천년의 순간, 천년을 향한 그의 집념과 원력은 순간들의 틈새에 갇힌, 고려대장경이라는 섬으로 가기 위한 길잡이와도 같다. 의문으로 가득 찬 시간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준다. 천년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경의 꿈이 우리 고려대장경으로 형상화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천의 순간도 하나의 순간일 따름이겠다. 고려대장경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집념과 원력의 순간들이겠다.
끝으로 의천의 문집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를 소개하고 싶다. 중국의 소식이 의천을 위해 쓴 시이다.
“대천세계 한숨에 팔십 차례 돌아드니
고래 타고 웃으며 동해 바다 건너네
삼한의 왕자님, 서쪽으로 법을 구해
습착치와 미천처럼 강적으로 만났구나.”
송나라에 숨어들었던 고려의 왕자를 송나라 조정은 정성으로 맞이하였다. 한림학사 소식은 조정의 명에 따라 의천을 만나 의미심장한 이별시를 전해 주었다. 위에 인용한 싯구는 그 이별시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당시 소식은 요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고려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반고려론자였다. 그에게 고려의 왕자는 표현 그대로 적수일 뿐이었다. 의천은 교장결집을 위해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원했다.
소식은 이후에도 교류는커녕 단순한 편지 교환조차 법으로 금했다. 중국 문학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소식이다. 그는 의천의 꿈, 고려대장경의 꿈을 장애했던 적이였을 뿐이었다.
이상의 여러 역사의 순간에 고려대장경의 순간들이 있다. 이러한 순간들 사이에는 아시아 대륙을 넘나들던 거대한 집념의 파노라마들이 담겨 있다. 그 난해한 섬, 고려대장경의 섬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도 그런 빈틈의 파노라마들을 잇기 위한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다.
오윤희 / 고려대장경연구소장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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