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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크라이슬러 회장 아이아코카의 기업정신, 크라이슬러사를 기사회생시킨 경영의 귀재 이야기
당신 자신을 위하여 또는 인류를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해 왔건 간에, 돌아보건데 당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보살피지 않았다면, 당신이 정말 성취한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 Lee Iacocca -
아이아코카의 경영철학
경영이란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경영이란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1. 최고의 인재를 고용하라
능력 있는 경영팀보다 CEO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없다.
다수의 똑똑하고 헌신적인 직원들이 있었기에 나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2. 일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고, 간단한 목록을 만들어라
우선순위를 적는 한 장의 종이에 요약해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를 순서대로 적는다.
3. 간단명료하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
말하는 방식 그대로 글을 써라. 말과 글 표현을 달리 해 가며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 그렇게 한가한 시대가 아니다.
4. 돈은 직계조직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지 말라.
모든 경영자는 참모조직과 직계조직 사이에 권한과 책임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돈이 떨어졌을 때 돈을 벌어주는 쪽은 바로 직계조직이다. 직계조직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싶거든 참모조직의 아이디어를 살짝 전해주고 적절한 질문을 던져라.
5. 각각의 역할분담의 범위를 규정하라.
적절한 사람에게 적당한 권한을 위임하고 제 역할을 하도록 방향과 범위를 정해라.
6. 반대의견을 개진할 줄 알고, 매사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특정 방식을 고수하지 않는 똑똑한 친구를 주변에 두어라.
7. 변혁을 계획하느라 현재의 사업을 소홀히 하지 말라.
항상 오늘의 소득을 극대화하는 것이 CEO의 중요한 책임이다.
8. 기초를 잊지 말라 "당신에게 편안한 스타일을 택해서 그것을 고수하라.
" 누구든 역할 모델을 찾아 모범으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애쓰지는 말라. 당신 자신이 되는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라.
아이아코카 자서전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오일쇼크 넘어 전설이 된 아이아코카
기사입력 2014-08-19 09:24 | 기사원문
1978년 11월 2일 미국 일간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1면에 두 가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크라이슬러 최악의 손실을 입다’와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에 합류하다’.
포드 전성기의 주역인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 사장에 취임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이 회사는 3분기에 1억60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침몰해 가고 있었다. 방향키를 잡은 아이아코카는 세계 최초의 미니밴인 ‘캐러밴’을 개발하는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크라이슬러를 ‘순풍에 돛 단 배’로 부활시켰다.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인 1900년대 초반 설립된 크라이슬러는 자동차 제조사 중 처음으로 풍동실험을 시행하고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유선형 디자인의 차량을 내놓았다. 파워 스티어링 시스템, 파워 윈도 등도 이 회사가 처음으로 상용화했다.
기술력과 디자인 모두 앞서가며 성장해 갔다. 닷지와 아메리칸모터스를 인수하며 포드·제너럴모터스(GM)와 함께 경쟁하는 ‘빅 3’로 떠올랐다. 하지만 크라이슬러가 달려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오일쇼크와 일본 제조사들의 공세, 경영전략 실패 등이 겹치면서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다임러벤츠, 사모 펀드, 피아트그룹 등 회사의 주인도 수차례 바뀌었다. 크라이슬러는 미국 빅 3 중 가장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조사다. 인수·합병으로 미국 ‘빅 3’ 성장 크라이슬러의 공식 설립 연도는 1925년이다.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이 회사의 역사는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너선 맥스웰과 벤저민 브리스코가 설립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모터 컴퍼니’다. 맥스웰은 4년 후인 1913년 ‘맥스웰컴퍼니’라는 이름으로 홀로서기를 했고 1920년 한 인물을 영입했다.
GM의 초대 부사장이었던 월터 P 크라이슬러다. 크라이슬러는 1922년 자동차 제조사 차머스모터카 인수를 진두지휘한 후 1924년 자신의 이름을 붙인 ‘크라이슬러70’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사명을 크라이슬러로 바꿨다. 크라이슬러는 이때부터 성장 가도를 밟기 시작했다. 1928년 닷지브러더스를 인수하면서 GM과 포드 다음가는 미국 3대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났다. 1950년대에도 크고 작은 자동차 회사를 인수한 크라이슬러는 1960년대 들어 유럽으로 눈을 돌렸다.
1963년 프랑스 ‘심카’를 인수해 사명을 크라이슬러-프랑스로 바꿨다. 1967년에는 영국 ‘루터스모터스’, 스페인의 ‘바레이로스 디젤’을 사들여 각각 크라이슬러-유나이티드킹덤, 크라이슬러-에스파냐로 변경했다. 1971년에는 일본 미쓰비시의 지분 15%를 사들이면서 합작 사업도 벌였다. 미쓰비시의 미국 판매를 크라이슬러 판매망을 통해 진행했다. 유럽과 일본을 아우르는 글로벌 생산·판매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1934년 차 한 대를 내놓아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부드러운 유선형 디자인의 ‘에어플로’다. 이 회사는 차량을 개발할 때 강한 바람이 부는 터널에서 공기 흐름을 실험했다. 이른바 ‘풍동실험’이다. 공기저항이 최소화되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이 실험의 목적이다.
이때 당시 자동차 디자인은 각진 박스 형태였다. 에어플로가 시장의 주목을 받자 다른 업체들도 잇따라 차량 디자인을 유선형으로 전환했다. 게임의 규칙을 바꾼 것이다. 1955년 등장한 대형 세단 C300은 오늘날(300C)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명차다. 이 차량의 심장인 최고 출력 300마력짜리 ‘V8 헤미’ 엔진 역시 자동차 역사에서 손꼽히는 명품이다. C300의 숫자는 300마력을 뜻하는 말이다. 강한 출력과 존재감 강한 디자인은 미국 자동차의 상징인 ‘머슬카’를 대표하는 차종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
기술과 디자인 혁신을 통해 미국 자동차 산업을 주도한 크라이슬러도 위기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전 세계에 몰아친 오일쇼크는 회사의 기반을 흔들었다. 현지 업체 인수·합병(M&A)을 통해 진출한 유럽 시장은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유럽 3사를 모두 프랑스 푸조에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상황을 호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크라이슬러는 1920년 맥스웰이 그랬던 것처럼 인물 한 명을 영입한다.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네.” 1978년 7월 13일 오후 3시 미국 디트로이트 인근 디어본의 포드 본사 회장실. 헨리 포드 회장이 아이아코카 사장에게 이같이 통보했다. “이게 회사를 위한 최선의 길일세.”
아이아코카는 포드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포드의 대표작인 머스탱을 개발해 ‘머스탱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아이아코카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고 판단해 그를 해고했다.
포드에서 쫓겨난 ‘머스탱의 아버지’ 아이아코카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아코카가 포드에서 쫓겨난 건 크라이슬러를 위한 ‘최선의 길’이었다. 포드를 떠난 지 4개월 만인 1978년 11월 크라이슬러에 입사한 아이아코카는 회사 경영에 대한 전권을 쥐고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당시 크라이슬러 내에는 무려 35명의 부사장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들 부사장들 간의 협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판매 부진과 과잉생산에 따른 재고, 원칙 없는 자금 집행은 사내 금고를 바닥나게 했다. 1978년 GM은 미국에서 540만 대를 팔았고 포드는 260만 대로 그 뒤를 이었다. 크라이슬러는 포드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20만 대를 팔았다. 게다가 크라이슬러 차량을 구매한 소비자들 중 3분의 2가 제품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대로라면 크라이슬러에 미래는 없었다. 아이아코카는 3년 동안 35명의 부사장 중 33명을 해고했다. 조직의 곪은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낸 것이다. 한 달에 부사장 한 명씩 짐을 싸자 조직에 긴장감이 돌았다. 인력 조정과 함께 제품 혁신에도 나섰다. 1984년 출시한 7인승 미니밴 ‘캐러밴’이 대표적이다. 왜건과 밴의 장점을 섞은 차량으로 왜건보다 널찍한 실내 공간, 일반 밴보다 작고 실용적인 크기가 특징이었다. 캐러밴은 ‘미니밴’이라는 세그먼트를 만들며 블루오션을 장악했다. 도요타 시에나, 혼다 오디세이, 기아차 카니발 등이 캐러밴의 성공을 벤치마킹한 차량이다.
아이아코카의 제품 혁신으로 1980년대 크라이슬러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1980년 미국 생산 대수(미국 내수, 수출 합산)는 75만8000대까지 줄어들며 부진했지만 1988년엔 172만 대로 저점의 2배를 훌쩍 넘을 정도로 호조를 나타냈다. 1980년대는 크라이슬러에 행운이 따르던 시기였다. 아이아코카의 경영과 함께 회사의 캐시카우 역할을 담당하는 효자가 집안에 들어왔다. 1987년 인수한 미국에서 넷째로 큰 제조사, 아메리칸모터스다. 1954년 설립된 이 회사는 ‘지프’ 브랜드를 갖고 있었다. 지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으로 개발됐다.
당시 미 국방부는 ‘최고 시속 80km, 차체 무게 590kg, 적재량 0.25톤, 승차 정원 3명’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고 윌리스 오버랜드의 ‘윌리스MB’가 계약을 따냈다. 특유의 각진 디자인과 오프로드 주행 성능으로 종전 후 민간용으로도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했다. 오늘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원조로 매년 꾸준하게 판매되고 있다.
“6개 자동차 회사만 살아남는다” 크라이슬러는 M&A와 함께 다른 업체와의 합작을 통한 시장 확대도 노렸다. 미쓰비시와의 20년 인연이 그것이다. 1971년 미쓰비시의 지분 15%를 취득해 협력 체제를 구축한 뒤 미쓰비시에 미국의 크라이슬러 판매망을 이용하도록 했다. 이 판매망은 1981년 미쓰비시가 독자 판매망을 구축할 때까지 유지됐다. 미쓰비시가 4기통 엔진을 크라이슬러에 공급하는 등 기술 협력도 진행했다. 현재 현대차가 크라이슬러, 미쓰비시에 엔진 블록을 수출하고 있다. 이는 현대차가 미쓰비시로부터 엔진 제조 기술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는 1988년 미쓰비시의 기업공개(IPO)를 계기로 지분율을 20%까지 늘렸다. 두 회사의 관계는 20년 넘게 이어졌고 1993년 크라이슬러가 미쓰비시 지분을 매각하면서 종료됐다. 미쓰비시와 협력이 종료된 후 크라이슬러는 다른 협력자를 찾아 나섰다. 1990년대에는 기업의 규모를 키우기 위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들의 M&A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1995년 다임러 벤츠의 수장 자리에 오른 위르겐 슈렘프 회장이 말한 “미래에는 전 세계에서 6개 자동차 회사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미국 빅 3 중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크라이슬러에는 신경 쓰이는 예언이었다. 그리고 슈렘프 회장 취임 3년 뒤인 1998년 다임러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전격 합병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단숨에 글로벌 자동차 강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슈렘프의 예언은 틀렸고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실적은 악화됐다.
크라이슬러는 또다시 세찬 바람에 흔들렸다.
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
파산직전의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를 회생시킴으로써 미국 실업계의 「전설적 인물」로 등장한「리·아이아코카」회장이 펴낸 자서전이 최근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고있다.
『내차보다 좋은차가 있거든 그걸 사시오』라고 자기차를 선전할 정도로 배짱있고 연봉1달러로 자신의 보수를 깎을 정도로 카리스마적인 이 자동차산업의 경영왕은 이탈리아 이민의 후손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오늘의 자리를 구축한 자신의 일대기와 아울러 미국 자동차 산업의 내막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다음은 이 책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외무부>
78년7월13일은 내평생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날이었다.
내가 32년간 몸담아 왔고 회장으로있던 포드 자동차회사로부터 갑자기 해임통고를 받았던 것이다. "파산하면 국민 부담 1백60억불"|정부설득에 성공, 보조받아 재기|소형차 K 개발, GM X카 누르고 大히트…회장 5년만에 빚 8 억불 청산 이 해임통고는 나에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사주인 「헨리·포드」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1946년 21세때 포드에 입사한 이후 이곳에서 청춘을 바치고 24년만인 1970년 회장으로 발탁돼 이미 8년간이나 포드를 이끌어 왔었다..
나를 더욱 분하게 만든 것은 해임통고 이후 포드사가 나에게 제공한 사무실이었다.
나는 공식적인 해임통고일로부터 3개월후에 퇴임하게 돼있어 그동안 새로운 직장을 구할때까지 내 전용사무실로 옮겨야했다. 새 사무실은 본사에서 수마일 떨어진 창고건물의 한 귀퉁이에 책상 하나와 전화 1대가 놓여있는 초라한 곳으로 갖가지 호사로 치장된 지금까지의 회장 사무실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포드에는 적개심>
얼마전까지만해도, 나는 벨만 누르면 당장에 흰 가운을 입은 비서들이 달려와 각종 서비스를 받던 회장실에서 일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권위와 편리함은 고사하고 새로 옮긴 사무실은 갈라진 마루와 책상위의 플래스틱 코피잔이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내가 이 방으로 처음 옮긴날은 공교롭게도 나의 54회 생일날이었다.
이 방에는 그동안 나와 함께 일하던 여비서「도로디」양이 먼저 와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마치 지구에서 다른 위성으로 옮겨온 듯한 생각이 들 정도의 분위기였다. 해고보다도 더한 치욕을 포드사가 나에게 안겨준 것이었다. 대기발령 3개월 동안 나의 정신적 고통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우기 내 가족들은 나이상으로 고통과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다. 가족의 고통을 목격하자 나는 사주「헨리·포드」에 대해 적개심이 일고 살의마저 느꼈다. 결코 그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 살의는 나 자신인지 사주에 대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느쪽이든 살인도 자살도 사실상 가능한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새 창고 사무실을 한번「방문」하고는 다시는 찾지 않았다.
내 나이 54세. 이미 나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할만큼은 성취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있었다. 골프나 치면서 여생을 보낼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이같은 역경을 뒤엎고 재기의 기회가 왔다. 「창고사무실의 아침」이 있은지 수 주일후 크라이슬러사의 회장을 맡게된 것이다.나는 포드사로부터 받은 「의도된 공개적인 모욕」으로 인해 크라이슬러에서 최선을 다했다.
포드사에 대한 분노의 에너지를 그 결과가 성공이든 재앙이든 관계치 않고 새로운 일에 모두 쏟아 부은 것이다. 클라이슬러에서의 1년은 나의 애쓴 보람도 없이 회사의 도산위기라는 새로운 시련에 시달린 한해였다. 포드사에서 해고에 이어 이번에는 크라이슬러라는 배를 타고 함께 침몰하는 선장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크라이슬러는 기사희생했다. 나는 오늘날 영웅처럼 받들어지고 있다.
지난 38년간 오로지 자동차업계에 투신해온 내 인생이 다시 「잿더미」위에서 일어선 셈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그 「창고사무실」에서 겪었던 모욕과 새로운 결단의 덕분이었다. 78년 12월2일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신문은 『크라이슬러사 적자 최고, 「리·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 회장취임』 이란 두줄의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실었다. 크라이슬러사는 내가 취임하던날 사사상 최고의 분기적자인 1억6천만 달러를 발표했다. 나는 『최악의 상태니 더 이상 악화되지는 않겠구나』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적자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날 크라이슬러주식은 약간 올랐다. 나는 그것이 나의 취임에 대한 신임투표라고 생각했다. 첫날 나는 얼핏보기에는 하찮은것 같지만 크라이슬러사 병폐의 일단을 보여주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사장실이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역들이 손에 코피잔을 들고 수시로 사장실을 통과해 지나가는 모습을 나는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것만 봐도 이회사가 지금 무정부상태에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나는 기강을 잡는것이 시급한 일이라고 작정했다.
또 한가지는 사장여비서가 자기전용 전화를 갖고 있는데 상당시간을 전화 잡담하는데 소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서가 놀아나는 곳은 속속들이 썩은 회사인 것이다. 첫날의 인상은 정확했다. 크라이슬러사는 하나의 회사로서 움직이고 있느것이 아니고 마치 1860연대의 이탈리아 같았다.
회사안에는 여러개의 조그마한 영주들이 버티고 있으면서 서로 자기가 프리마돈나인양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크라이슬러에는 부사장이 35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이 관장하고있는 업무를 서로 연결시킬 위원회도 구성되어 있지 않아 모두 남의 일엔 관심도 없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판매와 생산을 한 부사장이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두 분야는 방대하고 서로 다른 기능을 갖고있기 때문에 마땅히 분리 되어야 된다.
<약점투성이 회사>
크라이슬러를 운영해온 최고경영자들은 대부분 경리 출신으로서 자동차 생산업을 좋아하지 않는자들이었다. 처음 중역회의에 참석했을때 나는 중역들이 포드의 중역들에 비해 자기분야에 대한 정보가 어둡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미국 10위의 대기업을 운영한단 말인가. 나는 회장이 된다음 조심스럽게 이들의 결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중역들뿐 아니라 하급직원들도 모두 겁에 질려 책임전가만 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자발적으로 하는게 없었다. 적성은 무시하고 재능위주의 인사관리를 한 결과 모두 능력은 있으면서 자기분야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회사 기밀도 마구 새나가고 있었다.
이런것들이 다른 자동차회사들은 호경기를 누리고 있는데 유독 크라이슬러사만 허덕이고 었는 이유였다. 78년 GM과 포드사는 판매에 신기록을 세웠다. GM은 5백40만대를 팔았고 포드는 2백60만대를 팔았다. 크라이슬러는 겨우 1백20만대를 팔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것은 크라이슬러가 1년만에 자동차 시장점유율 12·2%에서 11·1%로 떨어진 사실이다. 트럭 점유율도 12·9%에서 11·8%로 떨어졌다. 모든 사업이란 결국 사람·상품·이익의 세단어로 집약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사람이 제일 앞선다. 팀이 좋지 않으면 나머지 두가지는 어떻게 해볼 재간이 없다.
나는 포드사를 떠나면서 포드사의 현·전직 중역들의 전력을 적어놓은 노트를 가져왔다. 나는 그 노트 속에서 같이 일할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 접촉하기 시작했다. 판매·생산·디자인등 중요분야의 전문가들을 수명 스카우트했다. 일반 소비자들은 대기업을 대단히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쁜 자동차가 나오면 기업이의도적으로 그런 차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처음부터 차를 잘 만들려고 노력한다.
나는 정부의 채무보장을 얻어내기 위해 설득전을 벌이던 79년의 어려운때에 다른 부문에서는 감원을 시키고 있었지만 공장에는 품질관리원 2백50명을 새로 고용했다. 그렇게해서 크라이슬러차의 품질에 대한 불신을 없애려 한 것이다. 인선이 끝난다음 나는 크라이슬러가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불황이 닥쳤고 이란의「팔레비」가 물러남으로써 석유값이 폭등했다.
그때까지 나는 가정생활을 소중히 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일을 집에까지 가져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크라이슬러에 온 이후로는 밤에 잠이 깨는 때가 자주 생겼다. 불안한 속에서 끊임없이 일했다. 때로 내가 제정신인가 의심할 정도의 상태도 있었다. 이때쯤 크라이슬러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해서 우리가 곧 파산할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시작했다. 이런 풍문을 없애기위해 우리는 소비자들이 품고있을법한 의문, 즉 크라이슬러가 망하고있는가, 크라이슬러차는 기름을 많이 먹는가, 크라이슬러의 경영진은 위기를 극복할만큼 강력한가등을 제시하고 이에대해 자세한 해명을한 광고를 신문에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금도 문제를 호도하려 하지 않았다. 이 광고의 효과는 좋았다. 79년 여름이되자 크라이슬러사를 구출하려면 어떤 획기적인 처방이 아니면 안되겠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우리는 위험수역으로 밀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했다. 이제 우리힘으로 익사를 면할 능력은 없었다. 나는 이 위기를 벗어날 방도가 꼭 한가지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전력을 쏟아 그 쪽으로 나갔다.
이념적으로 나는 자유경쟁론 신봉자다. 나는 적자생존론을 믿어 왔다. 내가 포드 사장이었을때 시간의 반은 워싱턴서 보냈다. 그때의 임무는 정부가 기업에 간여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크라이슬러사장으로 워싱턴에 나타나 정부의 도움을 요청하고 다니자 모두들 『당신이 어떻게 그런소리를 하는가』 고 반문했다. 나는 『그외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고 되물었다. 우리는 이에 앞서 모든 방법을 탐색했다.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1백명은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가짜들이었다. 하나의 예외는 「카쇼기」였다. 그는 석유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었고 미국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전쟁물자건 투자건 알선해주고 두툼한 구전을 먹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만나 아랍이 크라이슬러를 장악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는 능력은 있었으나 결국 뛰어들지 않았다. <카터도 적극 지지> 서독의 폴크스바겐사와 합작하는 문제도 논의했었다.
폴크스 바겐의「토니·슈무커」와는 포드시절부터 친면이 있었다. 나는 플크스바겐과 크라이슬러가 같은 종류의 차를 만들어 팔자고 제의했다. 그건 천생연분이라고 나는 설득했다. 이 논의는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에까지 갔으나 폴크스바겐측이 우리사의 대차대조표를 검토하고 난 후 그들은 우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이흥정도 끝장이 났다. 크라이슬러가 정부의 구원을 받는 문제에 대해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했다. 예상했던것이지만 가장 강력한 반대의견은 기업측에서 나왔고 특히 GM사가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들의 논리는 정부의 보조는 미국기업 정신에 대한 이단이란 것이었다. 이들은 파산이란 건전한 시장을 위한 카타르시스이며 기업에 대한 재무보증은 자유경쟁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험 없는 사회는 보상 없는 사회라느니 자본주의에 있어서 실패란 기독교에 있어서의 지옥과 같은것 이라느니 하는 돼먹지 않은 낡은 경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정부보조가 건전한 시장경제 경신에 위배된다면 정부가 철강·조선·항공기·농업·주택 등에 보조를 할때는 왜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나는 우리 입장을 반대한 실업인들 모임에 나가서 그들이 이중인격자들이라고 욕해줬다.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야 나도 자유경쟁하의 자본주의를 1백% 지지한다.
그러나 정부규제가 불공평했기 때문에 한 회사가 곤경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것인가? 크라이슬러는 물론 경영진의 잘못도 있었지만 정부규제가 가중되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게 된것이다. 나는 크라이슬러가 파산하면 우리 회사뿐 아니라 우리에게 납품하는 많은 군소 회사들도 견뎌날수 없을것이라고 설득했다. 데이터 리소스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크라이슬러사의 파산은 1백60억달러의 손실을 납세자들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한다. 크라이슬러사의 장래에 대한토론이 전국적으로 일고있을 때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톰·워커」는 크라이슬러사의 생산시설을 자동차대신 대중교통수단생산으로 전용하라는 글을 썼다.
특히 악랄한 것은 윌스트리트저널지였다. 그들은 사실뿐 아니라 기사로도 우리를 못살게 굴면서 미쳐 날뛰었다. 나쁜 사실은 빠짐없이 보도하면서 희망적인 사실은 보도하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우리가 정부 보조를 받기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때 『위엄을 갖고 죽게하라』는 사설을 썼다. 이제 그만 크라이슬러의 고통을 끝내주라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미국의 언론 자유가 얼마나 악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전으로 역사에 남아야 할 것 같다. 나는 화가나서 그 신문의 펀집국장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환자가 처방약을 반쯤 먹었는데 완쾌하지 않았으니 죽여 버리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주치의가 아닌게 다행이오』저널지는 구시대에 살고 있지만 독점지이기 때문에 GM처럼 오만해져 있다.
크라이슬러에 대한 정부 보조문제는 의회에까지 비화했다. 나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갔다. 상원과 하원의 청문회장은 진술하는 사람을 겁주도록 꾸며져 있다. 위원들은 높은 단을 이룬 반원형의 탁자에 둘러앉아 증인을 내려다 보도록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러니 증인은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되어 있다. 늘 올려다 보며 말을 해야 되는데다가 TV 조명이 눈을 부시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증인」으로 불렸지만 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피고」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나는 여러시간 거기 앉아서 크라이슬러가 경영을 잘못한「죄」를 문초 받았다. 의원들은 일본인들이 휘발유 갤런당 30마일을 뛰는 자동차를 만들어 낼 것을 왜 우리가 미리 예견하지 못했느냐고 따졌고 심지어 이란의 「팔레비」가 쫓겨나는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데 대해 질책 당했다. 나는 우리 보다 더 정보가 많은「카터」「키신저」「록펠러」국무성도 그 사태를 예측 못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느냐고 반박했다. 「카터」대통령은 크라이슬러에 채무보증을 해주는안을 지지해 주었다. 그의 지지없이는의회에서 채무보증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을 것이다. 「카터」씨는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 두 번 내 사무실을 찾아 왔었다. 그는 크라이슬러가 번창하는데 큰 긍지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낳은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심정일 것 같다.
<"기업정신의 이단">
법안을 표결에 붙이기 직전「오닐」하원의장의 지지발언이 결정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그는 의장석을 떠나 매사추세츠주 의원자격으로 열성적인 발언을 했다. 그는 주로 크라이슬러가 망하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법안은 하원에서 2백71대1백36. 상원에서 53대44로 통과되었다. 이 법안이 통과됨으로써 크라이슬러는 회생의 전기를 잡게 되었다. 우리가 할 일은 전쟁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크라이슬러를 구하는 전쟁의 선봉장이었다. 나는 나의 보수를 연봉 1달러로 중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는 순교자가 되기 의해 보수를 그렇게 깎은 것은 아니다. 노조위원장을 만날때 『이 개새끼야, 너는 무슨 희생을 했기에 우리 보고 감봉을 감수하라느냐?』는 질문을 미리 막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될 것 같았다. 내가 감봉을 했다고 해서 굶게 되는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앞으로 해야할 일을 다같이 해야 된다는 연대감을 조성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를 구출해준 제품은 K 차였다.
이차는 도시주행에서 갤런당 25마일, 고속도로에서 41마일을 달리는 소형차로서 GM의 X차를 능가했다. 우리는 이 차야말로 외국제 소형차에 대한 미국의 도전이라고 선전했다. 82년 전운이 걷히고 나자 좋은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취임할때 크라이슬러가 손익 균형을 이루는 점은 차 2백30만대를 파는 선에 있었다. 그러나 3년간의 노력으로 균형점은 1백10만대로 내려졌다. 그것은 엄청난 성장의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83년쯤에는 위기 이후 처음으로 신주를 상장했는데 원매자가 줄을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83년 7월13일 나는 워싱턴내셔널프레스 클럽에 나가 크라이슬러사의 8억 달러에 달하는 은행빚을 일시불로 갚겠다고 선언했다. 이 발표는 『승리의 선언』 같은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이날은「헨리·포드」가 나를 해고한지 5년이 지난 바로 그날이었다. .
Profile
본명(Full): Lido Anthony Iacocca (Nick: Lee Iacocca)
- 출생: 1924년 10월 15일 (92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앨런타운
- 직업: 포드사 사장, 크라이슬러사 회장
- 배우자: Darrien Earle (1991년–1994년), 페기 존슨 (1986년–1987년), Mary McCleary (1956년–1983년)
- 부모: Nicola Iacocca, 안토니에타 페로타
-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윌리엄 앨런 하이 스쿨, 리하이 대학교
- 형제자매: Delma Iococca
- 저서: Iacocca: An Autobiography, Where Have All the Leaders Gone?, Straight Talking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