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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3일(토) 고려대학교에서 열리는
한국번역비평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게 될 글입니다.
번역과 주체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서양사)
출판 후일담
제가 이번 학술대회에 초청을 받은 것은 연전에 출간한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출판 후일담 형식으로 가볍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의 주제가 제한된 인문학 독자층에서만 환영받을만한 것이기에 판매 부수는 신통치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동안 책 때문에 이런 저런 모임에 불려나갔습니다. 모두 세 차례였는데, 서양사전공 학자(교수)들 모임, 교보문고 저자강연,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출판인 협의회(인사회) 등이었습니다. 이번이 네 번째인 셈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모임은 일반 독자들과 출판실무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청중의 호의적인 반응을 현장에서 제가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번역서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 특히 출판편집자라면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난감했던 것은 서양사학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제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순서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국립대에 재직하는 교수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이 분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로 읽으면 쉽지 않나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요즘 젊은 친구들이 하는 말로 ‘확 깨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미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기류가 강한데, 아직 일본 제국주의도 극복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일본어로 독서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말의 뉘앙스로 보아 일본어를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 점에 대해서도 반박을 했습니다. “일본어 전공하는 분들이 들으면 무척 어이없어 할 겁니다.”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철학계에서는 ‘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이 오래 전부터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대 이기상 교수, 서강대 강영안 교수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서양사학계에서는 그 필요성에 대한 인식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성찰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닐까요?”
사실 그 모임에는 처음부터 가기가 꺼려져서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도 몇 차례 사양했었습니다. 저도 대학에서 20년 넘게 근무했고 당연히 학회 활동도 해봐서 같은 전공을 하는 교수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점은 <번역은 반역인가>의 집필을 구상할 때부터 이미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득권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교수들을 설득해서 번역활동에 동참해달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책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눈높이를 대학생과 대학원생에게 맞추었던 것입니다. 마지못해 참석했고 뒷맛도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날 모임에 참석한 것이 헛된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번역의 중요성과 가치에 관한 주제를 놓고 교수들을 설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저의 ‘선입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종홍과 학문의 주체성
이 지점에서 저는 철학자 박종홍 선생(1903-1976)을 떠올립니다. 박종홍 선생은 서양철학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한국의 사상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을 했을 만큼 궁극적 관심사는 한국철학사의 정립이었습니다. 선생의 <한국사상사> 서론으로 씌어진 「한국사상 연구의 구상」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명문인데 여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영어, 불어, 독어로 된 책을 아무리 독파해도 그것만으로 우리의 한국사상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말을 통해 소화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영미사상, 프랑스사상, 독일사상은 될지언정 우리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없다. 남이 아무리 좋다는 사상이라도 그것이 한낱 수입품에 그치어 우리의 생활, 우리의 말로 소화 흡수되지 못한 채로 그저 껍질 외양만 흉내 낼 때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 몸짓을 하며 남의 장단에 춤을 추는 꼴이란 넌센스라기보다도 정녕코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거기에 무슨 활로가 발견될 것이랴. 자기 나라 말을 존중하여 아낄 줄 알고 그것을 잘 살리어 쓸 줄 아는 곳에 독특한 사상도 싹트며 빛을 발하게 됨을 우리는 외국의 사상사에서도 본다.
“한국말을 통해 소화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영미사상, 프랑스사상, 독일사상은 될지언정 우리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없다”는 말이 절절하게 와 닿습니다. 번역이 전제되지 않는 지적 활동이란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동양철학자 김용옥 교수의 말처럼 제아무리 훌륭한 논문을 써도 그 논문에 관련된 고전의 번역이 없이는 그 논문이 전개한 아이디어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영어 도사들이 많이 출현해도 그들이 ‘우리말’로 그들의 학식을 표현할 수 없는 한 그들은 ‘우리 문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외래 문명의 새로운 개념들은 우리말로 번역이 될 경우 우리의 어휘와 개념을 풍부하게 만들면서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 일본의 번역 활동을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이라고 한 고종석 선생의 평가는 다소 과장되어 보이기는 하나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문화사의 관점에서, 늘상 나를 황홀경으로 몰고 가는 한 시기가 있다. 그것은 유럽문화의 바탕을 마련한 고대 그리스․로마 시절도 아니고, 이백․두보․한유․유종원이 각기 문재(文才)를 뽐내며 세련된 귀족적․국제적 문화를 꽃피웠던 중국 당(唐)대도 아니고, 천재와 완전인(完全人)의 시절이라고 할만한 유럽의 르네상스 시기도 아니고, 서양 르네상스의 한국판이라고 할만한 영․정조 치하 실학의 전성시도 아니다. 그런 돌출한 문화적 개화(開花)들도 어느 정도 내 마음을 뛰게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일본 에도 중기 이래의 란가쿠(蘭學: 네덜란드 문헌들을 통한 서양 학술 연구)와 메이지 시대 이후의 번역 열풍이다. 그것이야말로 한문 문명권과 그리스․로마 문명권을 융화시키며 동서 문화교섭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을 연출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이 네덜란드어 해부학서를 <카이타이신쇼(解體新書)>라는 제목으로 번역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시작된 란가쿠는 초기의 의학에서 화학, 물리학, 천문학, 군사학 등으로 영향을 넓히며, 궁극적으로 세계를 하나의 문명권으로 만들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동아시아는 지구 위에서 유럽인의 발길이 뜸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일본인들의 위대함은 유럽 문화의 전지구화를 마무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게걸스럽게 흡수하면서도 한자라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 유산 속에 완전히 녹여버렸다는 데 있다.
기지촌 지식인과 한국어의 미래
제가 보기에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우리 언어로 만들어진 문화’를 꽃피우는 데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는 ‘문화적 패배주의’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국어로 독자적인 우리 문화를 꽃피워 세계 역사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제국의 문화적 변방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주체에 대한 성찰 없이 중심권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 안달하는 듯한 모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기지촌 지식인 근성’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우리 사회의 잘 나간다는 소위 ‘주류 지식인들’ 사이에 차고 넘친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국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입니다. 2002, 2003, 2004년에는 예산이 15억 원씩 책정되다가 2005년에는 2억이 늘어 17억원으로 증액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20억원이 책정되었더군요.)선정된 과제 수는 각각 42건(2002년), 52건(2003년), 52건(2004년)이었습니다. 2002년부터 3년간 146 과제가 선정되었으니 해마다 평균 50 과제 정도가 예산지원을 받는 셈입니다. 여기에는 서양 고전뿐만 아니라 동양 고전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천 5백만 국민을 위한 정신적 양식을 생산하는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 19세기말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정부에 번역국을 설치하고 수 천 종의 서양 고전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번역하던 수준과 비교하면 실로 ‘언 발에 오줌 누기’ 수준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거지에게 동전 몇 푼 쥐어주는 식’입니다. (일본이 19세기 말에 번역한 서양 고전 중 아직도 우리말로 번역 안 된 책이 수두룩합니다.)
2005년 4월 12일 오후 서울 플라자호텔 별관에서 개최된 ‘LG경제연구원’ 창립 19주년 세미나에는 서울대 송병락 명예교수와 재정경제부 박병원 차관보, 그리고 베인&컴퍼니 한국지사 이성용 대표가 패널로 초청됐습니다. 세 분 모두 우리나라의 소위 상류층과 주류를 대표하는 친재벌적 관료와 학자들입니다. 이날 송병락 교수와 박병원 차관보에 이어 세 번째 토론에 나선 이성용 대표는 대담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MBA를 거쳤다는 사회자의 소개를 받은 이 대표는 ‘한국에서 서비스산업이 잘 육성되지 않는 것은 언어 문제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영어공용화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는 만약 영어공용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의 IT․서비스산업은 ‘국제시장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고 ‘깜짝 놀랄만한’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는 말이 마치 모국어에 대한 저주처럼 들립니다. 동시에 그의 지적이 정확하게 우리의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이 듭니다. 사실 특단의 조치 없이 현재의 상황이 지속된다면 100년 후의 한국어는 이성용의 주장대로 십중팔구 경쟁력을 잃고 말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의병운동
저는 인류의 고전적인 텍스트를 우리말로 바꾸어 ‘우리의 고전’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 연구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탱해 줄 ‘텍스트’를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현실을 미루어 볼 때, 고전적 문헌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번역․주석’이 균형감 있게 나란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번역 활성화를 위해 현 단계에서 실현가능한 방법은 인문 번역의 의병운동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자연과학 쪽의 번역 실태는 인문학보다 더 형편없다고 합니다만, 이건 저의 능력 밖인지라 논외로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왕과 조정이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 나라를 구한 것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습니다. 의병 이야기를 하고 보니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가 생각납니다.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의병운동을 하다 잡힌 수많은 사람들을 거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의병 지휘관을 했다는 자들이 감옥 안에서 하는 행동거지를 보니 그들 대부분이 도적놈과 다를 바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백범은 개탄을 합니다. “저런 도적놈들이 의병이라고 나섰으니 어떻게 일본군을 이길 수 있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요컨대 의병을 해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대접을 못 받는 번역 일이라지만 독자들은 오로지 그 결과물로 번역자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빈약한 대우를 핑계로 무성의한 번역을 함부로 출간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여론을 뜨겁게 달구었던 대리번역 논란 같은 경우가 여기에 포함됩니다. 작년 말에 제가 신문에 기고한 칼럼―「번역, 사기는 치지 말자」―을 소개합니다.
출판의 자유를 최초로 주장한 17세기 영국 시인 존 밀턴은, 책이란 결코 죽은 물건이 아니며 그 안에 저자의 생명력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영혼과 지성의 정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번역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번역을 하찮게 여기는 우리 풍토에서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나, 한 권의 책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때로 책 한 권을 저술하는 것 이상의 노력과 정성이 투입되어야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현암사 창업자 조상원은 “출판사 사장은 대학 총장 못지않은 사명을 지닌 사람”이라고까지 말했다. 사실 정도를 걷는 출판사 하나는 4년제 명문대 하나 못잖은 중요성을 갖는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설립한 이와나미서점을 빼놓고 일본 근대사를 말하기란 어렵지 않은가. 출판은 한 나라의 역사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여성 아나운서를 앞세운 스타 마케팅이 출판가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대리번역’으로 논란이 되더니 얼마 후 ‘이중번역’이라는 전대미문의 ‘창의적인’ 용어도 등장했다. 독자들은 이 사건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출판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매우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들이 대학원생을 동원하여 원서 한 권을 여러 토막으로 나누어 번역시킨 다음 제대로 검토도 하지 않고 주섬주섬 긁어모아 버젓이 교수 이름으로 출판하는 관행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텔레비전에 자주 얼굴 비치는 유명 교수가 번역한 책은 일단 대리번역을 의심하라는 말까지 생겼겠는가.
출판, 그것은 사업은 사업이로되 ‘문화운동’과 ‘장사’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좀 특이한 사업이다. 문화운동에만 치우치면 수지를 맞추지 못해 망하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장사에만 치우치면 지식 정보 제공의 사명을 지닌 출판인의 자존심을 찾을 길 없다. 그래서일까. 저급한 상업출판으로 번 돈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돈 안 되는 인문 출판에 기꺼이 투자하려고 하는 출판인도 더러 있다(흔히 인문 출판은 출판의 꽃이라 하지 않던가). 이렇듯 출판은 장사는 장사로되 사명감과 자긍심을 잃어서는 안 되는 쉽지 않은 사업이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단군 이래 최악의 불황에 빠져 있는 출판 현실을 알고나 하는 말이냐’ ‘영세 출판인의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을 한가한 사명감 타령으로 매도하지 말라’고 볼멘 소리 할 출판인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 문제가 된 한경BP 같이 한국경제신문사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출판사가 그런 항변을 한다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아마 진짜 영세 출판인들이 돌을 던지려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다. 백 보를 양보해 문화적 사명이니 뭐니 고상한 소리 걷어치우고, 출판 사업은 오로지 돈벌이를 위한 장사일 뿐이라고 치자. 요즘은 농산물, 공산품에도 원산지 표시가 의무로 되어 있다. 한·미 FTA 협상과정에서 개성공단 제품의 원산지 표시 문제가 부각되는 것도 이것이 상거래의 기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번역하지도 않은(또는 부분적으로만 기여한) 책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출판하는 행위는 무엇이란 말인가. 위조 상표를 붙인 짝퉁 상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제시하는 요구조건은 딱 하나다. 저잣거리에서 통용되는 상거래의 기본이라도 지켜달라는 것이다. 돈벌이, 장사, 다 좋다. 하지만 제발 사기는 치지 말자. (국민일보 2006년 10월 23일)
밀턴의 영어 사랑
근대 초기 서유럽은 신세계에서 유입된 엄청난 상업적 이익으로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습니다. 설탕․담배․노예․향료 등으로 인해,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독일의 함부르크에 이르기까지, 유럽 귀족과 상인들의 주머니는 금화로 두둑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는 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아직 조야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탈리아인, 심지어 프랑스인 정도만 되어도 고대 세계로부터 이어받은 자신들의 장려한 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록 쇠락하고 폐허가 되긴 했지만, 아름다운 건물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과학자․철학자․역사가․시인들은 모두 그들의 위대한 과거를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독일인․러시아인․스칸디나비아인들은 고대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허물어진 방어용 성벽,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아치들은 그들이 과거 로마의 노예로 살았음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그 당시에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유물들―거대한 고딕 성당들,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봉건 시대에 축조된 거대한 성들―뿐이었습니다. 이들 국가의 국민들은 문화적 울타리 바깥에서 성장했으며, 유럽의 변방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화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화적 열등감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17세기부터 이들 국가의 귀족과 부유층은 자제들을 유럽에 여행보내기 시작합니다. 일종의 단기 해외 연수입니다. 하지만 17세기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 대립이 심한 시대였던지라 여행이 널리 활성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들어 전 유럽에서 붐을 이루게 됩니다.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본격화 된 것입니다. 1720년에 이르면,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자처하는 영국인이나 독일인으로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2, 3년을 체류한 경험을 갖지 못하고서는 시골뜨기 취급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특히 이탈리아는 반드시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히고 있었고, 이곳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새뮤얼 존슨(1709-1784)는 “이탈리아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항상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밀턴은 1638년에서 1639년까지 1년 3개월 동안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다녀옵니다. 아직 그랜드 투어가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변두리 국가 영국 출신으로서 열등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밀턴의 애국심을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조국인 영국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모국어인 영어에 존중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2년 후 그는 이탈리아 여행이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야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말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내가 무언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내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다. ……나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 이 섬나라에 사는 나의 동포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로운 일들을 모국어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가 되련다. 아테네인, 로마인, 근대 이탈리아인, 그리고 고대 히브리인의 가장 우수한 최고의 지성이 그들의 조국을 위해 했던 그 일을, 나 또한―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나의 조국을 위해 하고자 한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명예를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런데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함축적입니다. 변방 언어인 영어로 써봤댔자 유럽 문명의 본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에서 명예를 얻을 전망이 희박하고, 라틴어로 글을 써야 전 유럽으로부터 명성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모국어인 영어로 작품을 쓰겠다는 것입니다. 밀턴은 그랜드 투어 이전에도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그 방향성을 확고하게 해주었습니다. 밀턴은 위대한 영어 시인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고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긴 하지만, 만일 밀턴이 영어로 쓰지 않고 라틴어로만 글을 썼다면, 오늘날 영어의 위상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밀턴의 생각은 앞서 말씀드린 박종홍 선생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 중에서 특히 안타이오스에 흥미를 느낍니다. 거인 안타이오스는 대지의 여신 테라의 아들입니다. 그는 그의 발이 어머니인 대지에 닿아 있는 한 문자 그대로 천하무적이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그와 대결하게 되었을 때 헤라클레스는 꾀를 내어 안타이오스를 번쩍 들어 공중에서 목을 졸라 죽여 버렸습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진 안타이오스는 이미 썩은 통나무같이 무력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안타이오스에게 대지가 힘의 원천이었듯이, 우리에게는 모국어가 우리 문화를 살려내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국어의 운명에 대해 서슴없이 저주를 퍼붓는 우리 사회 주류 인사들의 인식을 과연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면 때로 암담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괴테의 독일어 자랑
에커만이 쓴 <괴테와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괴테는 어느 날 자택을 방문한 한 영국인에게 독일어의 탁월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우리 독일 문학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독일어를 잘 배워두면 다른 많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기 때문이오. 물론 프랑스어만은 예외이긴 하지요. 프랑스어는 사교 언어여서 특히 여행 때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일거요. 프랑스어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느 나라를 가든 뛰어난 통역관의 도움 없이도 프랑스어만으로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 이탈리아어와 에스파냐어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민족의 대표작들은 매끄러운 독일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특수한 목적이 아닌 한 그들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라 많은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지요. 외국의 모든 것을 나름대로의 특색대로 평가하여 이질적인 특성에 순응하는 것이 독일인의 천성이오. 이러한 사실에 더해 또 독일어는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독일어 번역본은 철저히 원작에 충실해서 완전한 작품이 되는 거라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본이 있으면 대단히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오. 프리드리히 대왕은 라틴어를 하지 못했소. 하지만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키케로를 읽었는데,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소.”
독일어의 지적 인프라와 부가가치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19세기의 문호 괴테를 보면서, 우리는 21세기 한국어의 위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은 제가 여러 해 전에 표정훈 선생과 함께 조그만 모임에서 번역 문제로 공동 발제를 맡으면서 괴테의 이 말을 인용했었는데, 얼마 후 표 선생께서 이 말을 멋지게 패러디해 주셨습니다.
“귀국의 젊은이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잘하는 일이오. 왜냐하면 우리 한국 문학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를 잘 배워두면 다른 많은 언어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기 때문이오. 물론 영어만은 예외이긴 하지요. 영어는 국제 공용어여서 특히 여행 때는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일거요. 영어는 누구나 알고 있어서 어느 나라를 가든 뛰어난 통역관의 도움 없이도 영어만으로 볼일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오.
하지만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고전 중국어(한문) 등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들 민족의 대표작은 매끄러운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아주 특수한 목적이 아닌 한 그들 언어를 힘들게 배우느라 많은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지요. 외국의 모든 것을 나름대로의 특색대로 평가하여 이질적인 특성에 순응하는 것이 한국인의 천성이오. 이러한 사실에 더해 또 한국어는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국어 번역본은 철저히 원작에 충실해서 완전한 작품이 되는 거라오.
또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좋은 번역본이 있으면 대단히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오. 김대중 대통령은 고전 중국어를 하지 못했소.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으로 <사기(史記)>를 읽었는데, 우리들이 원어로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었소.”
우리도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외국인들을 향해 이런 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이 한국 문화의 특징이라 할 정도로 척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러 못난 조상을 탓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아갔습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겨졌습니다. 후손들에게 우리가 어떤 조상으로 평가받을 것인지를 고민할 때가 온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100년 후 한국어가 경쟁력을 잃게 될 경우,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를 못난 조상으로 지목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오늘의 이 모임이 이런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