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동쪽 중산간에 관광 순환 노선인 810번이 다닌다면, 서쪽에는 820번 노선이 여러 관광지를 훑는다. 810번 버스로는 많은 오름을 찾아가기에 좋고, 820번 버스로는 박물관이나 테마파크와 같은 실내 관광지를 찾아가기에 좋다. 그러나 자연 여행지가 무궁무진한 제주도인 만큼, 820번을 타고 갈 수 있는 멋진 숲이 있는데, 이름하여 산양곶자왈이다.
곶자왈은 이전 제주 여행기에서도 몇 번 소개했었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정확한 뜻 다시 찾아보기)이 합쳐진 제주어로, 화산 활동으로 빚어진 숲이다. 분출된 용암이 바닥에 굳으며 울퉁불퉁한 돌이 되고, 그 위에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나며 독특하고 울창한 숲의 모습을 갖게 된다. 820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창 너머로 먼발치에 넓고 울창한 숲이 보이는데, 그 일대가 전부 곶자왈이라는 가이드의 안내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산양리에 있는 곶자왈이라서 이름이 붙여진 산양곶자왈도 그 일부이다.
산양곶자왈 탐방로의 총 길이는 3.5km.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가 아닐까 싶다. 곶자왈 앞 담벼락에는 커다랗게 이름이 붙여져 있고, 이정표도 보기 쉽게 세워져 있다. 탐방로로 들어가는 길에는 공사가 거의 끝난 듯한 화장실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탐방객들을 더 모으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최근에 작업한 것처럼 보였다.
곶자왈을 걸을 때 힘든 점이 용암이 굳어 형성된 울퉁불퉁한 땅을 걷다 보면 발에 제법 무리가 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양곶자왈은 탐방로에 야자 매트가 깔려 있어 피로도가 덜 했다. 이 역시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찾은 사람이 제법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때는 숲 내에서 탐방객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숲에는 호젓한 분위기가 강하게 감돌았다. 하지만 그런 기운이 오히려 좋았다. 원시적인 숲을 혼자 걷고 있으니 제법 깊은 곳에서 모험하는 기분이었다. 때때로 고립된 느낌이 들기도 했으며, 문명 세상을 향해 이곳을 헤쳐나가고 있다는 영화 같은 상상을 했다. 흥미롭게 봤던 미국 드라마 ‘로스트’의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하나둘씩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산양곶자왈은 제주의 아픈 역사를 우리에게 공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 4.3 사건 당시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마을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먹을 것도 부족했다. 생계를 이어나갈 수단이 필요했다. 주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숯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곶자왈에서 자생하는 구실잣밤나무 등을 재료로 써서 숯을 만들었다. 그래서 산양곶자왈 안에는 숯을 생산했던 흔적인 숯가마터가 남아있다. 그러나 후에 이곳에서 우마를 방목하며 숯가마터들 중 일부는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이 밖에도 산양곶자왈에는 우마를 기르는 데 사용했던 물을 긷던 엉알물(언덕 아래의 물), 철기시대부터 존재하여 4.3사건 당시 마을 주민들이 피신했던 동굴인 궤 두 곳 등 지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적들이 존재한다.
숯가마터
엉알물
궤(동굴)
관광 순환 노선을 이용하면 관광지 간 이동을 편리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이드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산양곶자왈 탐방을 마치고 저지리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님은 내게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식당 한 곳을 알려 주셨다. 이미 점심때를 훌쩍 넘긴 시간이라 허기져 있었다. 가이드님은 식당에 연락까지 하며 식사 가능 여부를 알아봐 주셨다. 그렇게 찾아간 곳은 ‘뚱보아저씨‘라는 식당이었다. (가격, 구성 등) 저렴한 가격에 정갈한 제주식 밥상이 차려졌다. 먹음직스러운 밑반찬을 비롯해 갈치구이와 고등어조림, 성게미역국으로 이루어진 구성은 '밥도둑 삼총사'였다.
점심을 먹고 이동한 곳은 저지오름이다. 저지리를 대표하는 오름인 저지오름은 정상에 깔때기 모양인 원형 분화구가 형성되어 있는 오름이다. 탐방로를 따라 분화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저지오름은 해발 고도가 239m이며, 비고가 100m로 오르기 쉬운 곳이다. 그러나 분화구 둘레가 800m에 달해 둘레를 걷는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오르는 것이 좋다. 날이 흐렸던 탓에 정상 전망대에서는 주변 경치가 뿌옇게 보였다. 남서쪽 해안가에는 나란히 자리한 산방산과 단산이 눈에 들어왔다. 산방산은 가까이에서 뾰족하게 솟은 듯한 모습만 보다가 멀리서 보니 좌우로 제법 널찍하게 산세가 이어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두 오름 사이 바다에 빼꼼 고개를 내민 형제섬도 희미하게 보였다.
산방산과 단산이 나란히 솟아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맣게 형제섬이 보인다.
저지오름에서는 전망을 제대로 못 본 아쉬움을 둘레길을 걸으며 달랬다. 정상의 분화구 주변을 도는 800m 코스와 중턱에서 오름을 한 바퀴 도는 1.6km 코스가 있다. 다른 숲길과 비교해 특별히 빼어나다고 느껴지는 점은 없지만, 거리가 짧고 길이 평탄해 숲 공기를 마시며 그 어느 곳보다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곳이다.
막차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저지문화예술인마을까지 찾아갔다. 예술인들의 영감과 흔적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제주현대미술관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찾아가기 좋은 곳이다. 미술, 특히 현대미술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어 전시를 보는 내내 새로운 문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인생샷을 남기기에 좋은 재치 있는 전시관도 있는데, 이름이 ’1평 미술관‘이다. 주황빛 통로를 지나 문 앞에 다다르면 창 너머로 미술 작품이 보인다. 오롯이 나만 즐기는 미술관인 셈이다. 주황색 배경이 예쁘고 독특해 촬영 포인트로도 입소문이 난 곳이다.
제주현대미술관
1평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