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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 만세 원문보기 글쓴이: 주님만세
영화의 제목은 Most입니다. 이 말은 체코 말로 ‘다리’라는 뜻입니다. 체코와 미국의 합작 독립영화이고요,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아카데미상에도 nominate 될 정도로 작품성이 인정 된 영화입니다. 원래는 33분짜리인데 동영상은 4분 정도 밖에 안 되기에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알려 드리려 합니다.
이 영화는 <도개교: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들어 올릴 수 있는 다리, 영도다리>가 근무지인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여유롭지는 않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개가 그렇듯이 이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구경 가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어느 날 학교를 파하는 시간에 맞추어서 정문으로 마중 나갑니다. 마침 학교를 나오는 아들의 손을 잡고 일터로 향합니다. 행복한 모습으로 걸어가지요.
드디어 아빠의 일터인 도개교에 도착합니다. 마침 전화가 오는데 “30분 후에 열차가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리가 들어올려져 있고 그 밑을 배들이 지나다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되면 내릴 것입니다. 그러려면 시간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여 아버지는 아이에게 말합니다. “30분 후에 기차가 올 거야. 그 때 같이 다리를 내리자. 함께 레버를 돌리는 거야.”
어린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우상입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그 어떤 일이든지 멋있어 보입니다. 아들은 아빠와 함께 다리를 내릴 일을 머리에 그려 보면서 낚시하러 강가로 내려가고 아빠는 작업실에서 근무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리는 열려 있는데, 저 쪽에서 기차가 나타나 흰 연기를 뿜으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뭔가 착오가 생긴 것입니다. 아이는 작업실 쪽에 계실 아빠를 목청껏 불러보지만, 기계를 점검하러 자리를 비운 아빠는 대답이 없습니다. 이대로 두면 수백 명을 태운 기차가 다리 아래로 그대로 추락할 상황입니다.
아이는 아무리 아빠를 불러보지만 아빠는 대답이 없는데 증기 열차는 다리를 향하여 달려옵니다.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좌우를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아이는 레버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아빠 역시 달려오는 열차를 뒤늦게 발견합니다. 반사적으로 망루에 있는 작업실로 달려와 스위치를 조작하려는 순간 창밖을 내다본 아버지는 강가에 있어야 할 아들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더니 이내 사라집니다. 혼자서 레버를 조작하려다가 기계실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야속한 기차는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리를 내며 달려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다리를 내리면 기차는 무사히 다리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은 내려지는 다리에 눌려 죽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다리를 내리지 않으면 아들은 살릴 수 있지만, 수많은 기차 승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물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판단이 안 섭니다. 고통스러운 몇 초가 지나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는 기차를 탄 수백 명의 승객을 살리기로 결정하고 다리를 내립니다. 아들이 희생된 것입니다.
아들을 희생시키는 아버지의 모습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기차는 다리 위를 지나쳐 나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살리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노인들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노래하며,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의 기쁨을 만끽합니다.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을 나누기가 바쁩니다. 그들은 다리를 지나기 전에나 지난 후에나 똑 같은 모습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 여인이 창밖으로 울부짖는 한 남자를 봅니다.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그 남자를 돌아봅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기차는 지나갔습니다.
마치 우리들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릴 위하여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안 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오셨다고는 하나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죄인인 우리들이 그냥 죽어갈지라도 아무런 흠도 없는 당신의 아드님은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랬으면 아버지의 비통함도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비통함도, 아들의 희생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세상이라는 기차를 타고 달려갑니다. 어떤 희생이 있었고, 어떤 사랑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달려갑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렇게 달려가는 기차에 몸을 싣습니다. 울부짖는 한 남자를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느 여인처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관심을 갖겠지요. 한 번쯤은 바라다보겠지요. 그러나 기차는 지나갑니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사람들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십자가상에서 죽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때문에 살아난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오늘도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일 뿐, 자신을 살려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죽으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가 되어주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6-8).
우리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가끔 있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들도 가끔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경건하지 못한 자, 죄인 된 사람을 위하여 죽을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버리고 대신 악한 우리를 품에 안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죽으셨기에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다리입니다. 주님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내시는 다리입니다.
첫댓글 아버지 하나님! 그 크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아버지를 위해 제 생명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