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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당하시는 여호와의 종
이사야 52:13~53:3
오늘 우리가 살펴볼 대목은 고난당하시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러 올 그의 종이 고난당하는 모습에 대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전에도 몇 차례 예언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0:6 말씀에,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느니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시편의 저자 다윗도 대속의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바가 적지 않습니다. 시편 22편은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윗 본인은 수족이 찔린 바가 없고 옷을 빼앗긴 적이 없으나 그가 그 시편에서 노래하기를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구체적으로 겪으신 고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구약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저렇게 예고하곤 하셨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52장 13절 이하로부터 이사야 53장 전체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의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의 예언의 말씀을 유대인들은 어떤 한 개인으로서의 여호와의 종을 가리키는 예언이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해당한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여호와의 종이라는 견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대한 형벌은 본인 자신이 받아야 해결되는 것이지, 어떤 한 개인이 대신 형벌을 당함으로써 대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의 대속의 고난을 당하는 여호와의 종을 자꾸만 이스라엘 전체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채찍에 맞으며 살아 있는 자에게서 끊어지고 악인들과 함께 있고 부자의 묘실에 그 시신이 묻힌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이 본문 말씀의 예언은 한 민족 전체를 두고 한 말이 아니요 한 사람 개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족에 찔리고 채찍질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완전한 사망에 떨어지고 무덤에 묻히는 이 여호와의 종은 분명히 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학자들도 이 본문 말씀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지워버리거나 억지로 해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오실 그 메시야가 단지 영광 중에 와서 원수들을 다 쳐서 멸하고 로마 제국과 같은 세상 나라의 군대를 다 물리치고 자기들을 구원해내고 옛날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우실 분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분명히 여호와의 종 곧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인데, 그 예언된 그리스도 여호와의 종이 이 본문 말씀에서 처절하게 고난당하는 분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묘사된 그리스도, 여호와의 종이 곧 이천년 전에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시고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고 애굽에 잠시 갔다가 나사렛에서 자라나심으로써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리우시고 공적 사역을 행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8:16,17에서도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가 함을 이루려하심이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인용하여 그 말씀의 성취가 예수님에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네 깃으로 나눠 한 깃씩 얻고 그의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서 군인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고 하였는데, 이것이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9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도들이 그렇게 증언하였고, 성령께서 그를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신 것들을 통하여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인 이 이사야서 52장 13절 이하와 53장의 예언의 말씀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곧 대속의 주님의 고난을 예고한 말씀인 것을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하여 어떠한 예언이 있었으며 그것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삶에 성취되었는가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성령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하여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을 먼저 선포합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말씀에서 ‘내 종이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형통하다’라는 히브리어 원문 단어는 ‘샤칼’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분별하다, 지혜롭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매우 신중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의 뜻들로부터 ‘형통하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는 지혜롭고 분별력을 갖추어 신중하게 행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아름답게 형통하게 성취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셨을 때에 그 부모의 행함도 그러하고 예수님께서 공중 사역을 행하실 때에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셨음을 복음서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헤롯 대왕과 그 후예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보호자인 요셉과 마리아가 신중하게 움직여 애굽으로 피신살이도 하고 나사렛 촌 동네 깊숙이로 숨어 들어가서 은인자중하였고 때가 되며 예수님께서 나이 서른 살 때에 세상에 나오셔서 행할 때에도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 무리들이 그를 잡아죽이려고 하거나 나사렛과 베뢰아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가 그를 노릴 때에도 신중하게 움직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각오를 다지면서 한 발 한 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는 매우 신중하며 지혜롭게 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종이 그처럼 지혜롭게 신중하게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어가심으로써 마침내 그 결과로 지극히 높여지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받들게 되다”, “높이 들린다”. “지극히 존귀하게 된다”고 세 겹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게 됨을 예고한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 주님께서 지혜롭게 맡겨진 십자가 대속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여 인류 구속의 사역을 다 성취함으로써 지극히 높여지신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빌립보서 2:5 이하에 잘 나타나 있는 사상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5~11)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낮아지시고 굴욕을 견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존귀하게 높이셔서 모든 무릎이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사람으로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이라고 시인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 주님을 본받아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주님의 종들이 됩시다. 주님 나라의 형통한 열매를 맺어갑시다. 특별히 주님을 본받아 겸손과 순종으로 섬깁시다. 그리할 때에 장차 우리 주님께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신 원리를 따라 우리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이어서 이사야 52장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렇게 형통하고 존귀하게 되기 이전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상하다’라는 단어는 ‘파멸하다’라는 뜻인 ‘샤하트’에서 나온 단어로서 매우 파괴되어 형체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파괴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놀랐다’라고 예고하는데, 이 ‘놀라다’는 단어는 ‘경악하다. 공포스럽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황폐화된 모습, 전쟁이 일어나 미사일로 온 도시 전체가 다 무너진 가자지구나 우크라이나 도시들을 보면서 우리가 공포스러움을 느끼듯이 그렇게 놀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그것을 보면서 공포스러울 정도로 놀라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철저하게 채찍질당하고 두드려 맞으셔서 일그러지고 허벅지 살이 뜯겨나가고 등어리가 갈기갈기 뜯어지고 손과 발에 대못을 박히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 모습을 우리가 직접 보았다면 우리도 그렇게 경악할 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절하게 고난당한 모습, 인간적으로 공포스러울 정도로 파괴된 모습은 그 반대로 놀라운 구원의 효과로 나타난다고 이어서 선지자는 말합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의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참혹한 고난을 당한 것은 그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놀라운 구원의 확산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나라들’은 이방 나라들을 가리킵니다.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단어는 ‘가자’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난하주 3번에 보면, ‘열방에 뿌릴 것’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가자’라는 단어는 제물의 피를 뿌리는 제사법적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놀라게 하다’라는 단어로 번역해놓은 것보다 ‘피를 뿌린다’고 번역함이 원문 뜻에 맞은 것 같습니다. 놀랍게 주님의 고난과 그 흘리신 피는 이방 나라들에게 피 뿌림의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피 흘림의 공로가 이방 나라 백성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들 곧 이방 나라의 왕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을 다물게 됩니다.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방 나라 왕들은 우리 구주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 낮아지심, 철저히 자기를 버리신 섬김의 삶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 전혀 다른 가르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왕으로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섬김을 받는데 급급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만왕의 왕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만민의 구원자이신데도 자기를 버립니다. 기꺼이 낮아지십니다. 종처럼 자기를 굽혀 발을 씻겨줍니다. 그리고 죄인들, 반역한 자들을 살리고자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리까지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열방의 왕들은 입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 새로운 소식, 구원의 복된 소식에 대하여 놀라고 구주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복된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깨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극히 높여져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구주 앞에서 모든 이들이 다 굴복하며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장차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늘 돌아봅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늘 힘씁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시 진술하기 시작합니다. 그 일부인 1절로부터 3절까지를 한 절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53장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성령께서 예고하시는 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구원의 팔을 내밀어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 곧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의 고난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일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할 것을 예고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예고대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온갖 이적을 보이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럴수록 물러가고 그를 더 죽이려 들었던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바 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리스도 곧 여호와의 종은 참으로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 사람들 눈에 보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라나는 과정 곧 어린 시절에 ‘연한 순’ 같습니다. 이 연한 순은 가지치기를 당해야 하는 포도나무 가지와 같은 신세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같은 과일나무에 봄이 되면 여러 순들이 나오는데, 다 그대로 두지 않고 일부만 남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바로 순을 따 버려주어야 할 그런 연한 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뿌리인데, 그 뿌리의 바탕이 어디에 토대를 두었는가 하면 ‘마른 땅’입니다. 이미 몰락해버린 다윗 가문, 가난한 집안인 요셉 가문에 그 토대를 두어서 예수님은 자라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 영양가도 없고 파삭파삭한 마른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그렇게 형편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신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 보니 없는 것 투성입니다. 먼저 ‘고운 모양’이 없습니다. ‘토아르’라는 이 히브리 단어 ‘고운 모양’은 멋짐, 호감 감, 훌륭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호감 가거나 멋지거나 훌륭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출생이 형편없고 가문도 안 좋고 가진 것도 없습니다. 직업도 천한 목수입니다. 호감이 전혀 안 가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풍채도 없은즉’이라는 말처럼 풍채가 없습니다. ‘풍채’란 히브리어 ‘하다르’로서 꾸밈, 장식, 영광, 존중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장식이 없습니다. 꾸민 것이 없습니다. 아무런 장신구도 없고 허름한 작업복만 계속 입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누구도 존중하지 않은 채 그렇게 사셨습니다.
또한 없는 것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이라는 단어 ‘메르에’는 아름다운 옷, 고운 피부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거무튀튀한 그을린 몸입니다. 그 당시에 지체가 높은 사람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피부가 곱고 근육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수 일로 노동자처럼 근육만 있을 뿐입니다. 피부는 거칠고 그을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온통 없는 것 투성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그는 이렇게 대접을 받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얕보였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거절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원문은 ‘이쉬 마케오보트’로서, ‘고뇌의 사람, 슬픔의 사람, 비탄의 사람’이라는 명사형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 비탄의 사람이셨습니다. 기도만 하면 그냥 한없이 밤을 새며 울 수밖에 없었던 분입니다. 그의 고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통절한 눈물은 그 날 하루만의 특별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는 늘 이렇게 기도만 하면 눈물과 비탄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들 때문에 울고, 자기 백성들의 완고함 때문에 울고, 그들이 당할 무서운 심판의 처참함 때문에 불쌍해서 울고, 많은 능력과 은혜가 필요하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하기 위하여 울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 원문의 뜻을 따라 말하면 병을 그는 체험적으로 아는 자였습니다. 그는 직접 병을 겪으셨고 그 고통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질병에 시달릴 때에 함께 아파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실제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문에서 심문을 당하였을 때 그 집의 종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봉지 같은 것을 씌우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누가 때렸는가 맞춰보라며 선지자 노릇하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귀히 여기다’는 단어는 ‘계산하다, 인정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존재감이 없는 사람으로, 투명인간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처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취급을 당할 것을 미리 아셨고 단단히 준비하셨고 그 일을 당하셨을 때에 기꺼이 그 모든 수모와 고통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당하신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며 우리도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모든 고난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주님의 것에 비하면 언급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미약한 것입니다. 도리어 그러한 고난을 당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인하여 감사하며 주님께서 받으신 그 복스러운 영광에도 동참하게 됨을 인하여 기뻐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