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작전에서 마지막으로 북한 피난민을 싣고 나온 배는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Meredith Victory)호였다. 미군 대령이 이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에게
피난민을 태우고 부산까지 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이 화물선에 더 태울 수 있는 정원
여유는 열두 명뿐이었다. 하지만 선장은 주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이 태우고 가겠다"고
답했다.
12월 22일 밤 9시 30분부터 시작된 승선은 밤새도록 계속되어 이튿날 낮 11시 1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선원들은 공간이란 공간에는 모두 피난민들을 밀어 넣었다.
화물 선창을 층층이 피난민으로 채운 뒤에는 갑판을 채우고, 나중엔 창고와 보트 계류장까지
채웠다. 장장 13시간 40분에 걸쳐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오른 피난민의 숫자는 무려 1만
4천 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갑판에 들어차 있어 선원들이
돌아다닐 수조차 없었고, 늦게 승선한 사람들은 항해 내내 서 있어야 했다.
12월 23일 오후 흥남항을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항해는
쉽지 않았다. 배에는 의사도 통역관도 없었고, 음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항로에는 적군이
설치한 4천 개 넘는 기뢰가 널려 있었다. 근해에 잠복해 있을 적의 잠수함도 언제 어뢰
공격을 해 올지 모르는 가운데, 배의 창고에는 미처 하역하지 못한 항공유가 잔뜩 실려 있어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배가 송두리째 불구덩이로 변할 수도 있었다.
눈앞에 닥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추위였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갑판에서 벌벌 떠는
승객들이 밤새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선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놀랍게도 항해 중 인명피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승선 당시보다 승객이 다섯 명이나
늘었다. 항해 도중 아기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한국의 대표적 음식인 '김치'로
아기들의 임시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첫 번째 아기는 '김치 1', 두 번째 아기는 '김치 2'
하는 식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24일 낮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산은
이미 백만 명이 넘는 피난민들로 북적이고 있어 더는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다는 이유로
하선이 거부되었다. 선장은 우선 미군 보급창에서 먹을 것을 얻어다가 피난민들이 저녁식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다음날 다시 항해를 시작한 빅토리 호는 몇 시간 후에 거제도에 도착해 승객들을 무사히
하선시켰다.
피난민들이 모두 배를 떠난 날 밤, 라루 선장은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 명 무사히 상륙시킴.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전쟁터라는 열악한 조건에서 피난민 1만 4천 명을 구출한 것은
지고한 인도주의의 발현이었다.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원들의
공로를 인정하여 표창장을 수여했다. 1960년 미국 정부도 선장에게 훈장을, 선원 모두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2004년에는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세계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 이야기는 <생명의 항해>(2010)라는 뮤지컬로, 그리고 같은
제목의 책 (2015)으로도 만들어졌다.
- 강규형, 김용삼, 남정욱, 정경희, 주익종 공저, ‘6ㆍ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