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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3) 마음의 소리
깊어가는 가을, 퇴근길 저녁 무렵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으로 시작하는 이태선 시, 박태준 곡의 우리 가곡을 들으면 정겨운 귀뚜라미 소리의 가을밤 풍경이 떠오른다.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각종 메뚜기와 각종 방아깨비, 각종 누리와 귀뚜라미다.”(레위 11,22) 구약성경에도 등장할 정도로 친숙한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 소리(음파)는 물체의 진동(떨림)에 의해 발생하고 매질(진동을 전달하는 매개체)에 의해 전달되는 진동의 움직임(파동)이다. 우리가 듣는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 귀의 고막으로 전달되면 청신경에서 전기적인 신호가 발생하고 이를 대뇌의 측두엽에서 인지하는 것이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위는 보통 20~2만㎐(헤르츠) 정도인데, 이것은 1초에 공기의 떨림이 20~2만 번 사이일 때 우리의 대뇌가 소리를 인지한다는 뜻이다. 귀뚜라미는 보통 2000~1만㎐의 소리를 내는데, 노랫말에 나올 정도로 우리 귀에 정겹게 들린다. 파리나 벌은 50㎐ 정도의 날갯짓으로 우리 귀에 ‘부웅’하는 소리를, 모기는 대략 500~600㎐로 ‘애앵’하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여름철 말매미는 6000㎐ 정도인데 이런 소리들은 시끄럽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정겹다거나 시끄럽다는 것은 모두 인간의 관점이지, 곤충들의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피해를 주려고 일부러 날갯짓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물들에게는 인간에 의한 무분별한 환경파괴, 갈등이나 전쟁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자연에 반(反)한 불쾌한 소음일 수 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음파 영역인 20~2만㎐를 벗어난 1초에 20번 미만(초저주파) 또는 2만 번 이상의 떨림(초음파)은 우리가 들을 수 없다. 나비의 날갯짓은 1초에 20회 미만이기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지 그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에는 들리지 않는 수많은 소리들과 아우성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주위의 특정한 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반대로 너무 무심하다.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만 듣고 듣기 싫은 소리는 외면하기 때문이다. 아첨이나 근거 없는 세간의 루머들, 자기 이익에 부합하는 소리는 아무리 작아도 귀에 쏙쏙 잘 들어오지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간절한 소리,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 일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는 쉽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루카 복음서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남들은 들으려 하지 않은 ‘선을 행하라’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0월 2일 시작된 제16차 세계주교 시노드 정기총회 제2회기에서 시노드 논의의 핵심으로 경청을 강조했다. 평신도들에게 교황의 메시지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세상과 타인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보내고 있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한다. 무엇보다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옳은 일을 행하라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과학과 신앙] (4) 감실의 빨간색 불빛을 바라보며
19세기 초에 “모든 물질은 원자라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입자로 되어 있다”는 근대적 원자론을 처음 제창한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은 빨간색을 인지하지 못하는 적록색맹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짙은 회색의 스타킹을 선물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당황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선물한 스타킹의 색이 사실은 신고 다니기에 거북한 빨간색이었기 때문이다.
색맹(Color blind)은 그의 이름을 따 돌터니즘(Daltonism)이라고도 부르는데 색맹은 왜 생길까? 사람 눈의 망막에는 두 종류의 빛 수용체 세포가 있는데 하나는 빛이 강한 낮에 색을 구별하는 원뿔 모양의 세포이고, 다른 하나는 빛이 약한 밤에 밝고 어두움을 구분하는 막대기 모양의 세포다. 원뿔 모양의 세포는 세 종류가 있는데 각각 빛의 3원색인 빨간색·녹색·파란색의 빛을 잘 흡수한다.
적록색맹은 빨간색 빛을 흡수하는 세포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타난다. 원뿔 모양의 세포 중 빨간색 빛을 흡수하는 세포가 가장 많아 낮에 우리 눈에 가장 잘 띄는 색은 빨간색이다. 반면 막대 모양의 세포는 어두울 때 녹색 빛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밤에 가장 잘 보이는 색은 녹색이다. 낮에 유독 빨간색 위험 경고판이 잘 보이고 어두운 곳에서 녹색 비상구가 잘 보이는 이유다. 신생아는 망막이 미성숙해 원뿔 모양 세포가 적어서 색맹인 상태인데, 자라면서 서서히 색을 구별하며 정상이 된다.
성당에 가면 그리스도의 현존을 상징하는 감실의 빨간색 등이 유난히 눈에 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성령 강림 대축일·십자가 현양 축일·순교자 축일·사도들과 복음사가 축일 같은 성령에 관한 축일과 순교 축일에 사제는 빨간색 제의를 착용한다. 추기경은 교회에 대한 헌신의 의미로 빨간색 수단을 입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0월 6일 빨간색 수단을 입는 추기경 21명을 새로 임명하며 “눈을 들어 올리고, 손을 모으고, 맨발로 나아가라”는 편지를 보냈다.
전통적으로 빨간색은 피를 연상시킨다. 성당에서 감실의 빨간색 등을 보거나 미사 때 사제의 빨간색 제의를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교자들이 흘린 피를 생각해야 한다. 또 생각은 자신에 대한 성찰·이타심·정의로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가톨릭 신자의 참모습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가끔 텅 빈 성당에 홀로 앉아 감실의 빨간 등을 바라본다. 빨간색 빛은 우리에게 색으로 전해지는 무언의 메시지다. 그리스도의 피와 희생을 생각하며 우리는 그 메시지에 응답해야 한다. 감실을 밝히는 빨간색 불빛이 주는 의미를 내면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면, 그것은 마음의 망막에 이상이 있는 것이며 정신의 원뿔 모양 세포가 기능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의미의 장애다. 두 눈은 뜨고 있지만 색맹이면서 앞을 못 보는 장님과 다름없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의 다음 말씀은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마르 10,51-52)
[과학과 신앙] (5) 소금의 의미
11월은 위령 성월이다. 세속적으로는 12월이 한 해의 마지막 달이지만 가톨릭교회 전례력으로는 성탄을 앞둔 대림 시기 전이 연중 마지막 달이 된다.
위령 성월 기간 가톨릭교회는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한다. 위령 성월은 998년 중세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인 성 오딜로(Odilo)가 수도자들에게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 날 죽은 이를 위해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노래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서는 레퀴엠(Requiem)이란 미사곡을 부르는데 특히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유명하다. 모차르트는 35년 10개월의 짧은 생을 살았는데 그가 레퀴엠을 작곡하다가 사망해선지 레퀴엠이라고 하면 그가 먼저 떠오른다.
모차르트의 고향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로 로마 시대 때 만들어진 역사 깊은 도시이며, 옛날부터 암염(rock salt) 광산이 있어 도시 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잘츠부르크란 이름도 잘츠가 소금(Salz)을, 부르크는 성, 도시(burg)를 뜻하는 것에서 유래했다. 작년 잘츠부르크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암염을 선물로 받았다. 암염이란 땅속의 크고 단단한 지층에 들어있는 소금으로, 주로 수백만 년 전에 바닷물이 증발하여 생긴 것이며 전 세계 소금 수요의 3분의 2 정도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일본·영국의 전통적인 소금 생산 방식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자염(煮鹽)이다. 염전에서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으로 증발시켜 만드는 천일염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시작되었다.
소금의 주성분은 99%가 염화나트륨(NaCl)으로 양이온인 나트륨 이온(Na)과 음이온인 염화 이온(Cl)이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당기듯이 인력에 의해 결합되어 있는 이온결합 물질이다. 소금의 역할은 매우 많다. 음식에 짠맛을 더할 때 필수적이며 나트륨 이온은 동물의 신경계에서 자극을 뇌로 전달하기 위한 전기신호 발생에 반드시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나트륨이 부족하면 심장박동을 위한 전기적 신호전달이 불가능하여 사망할 수 있다.
또 소금은 체액의 농도 조절에 중요하며 각종 내장 기관의 생리작용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하루 1g 이상의 섭취가 필수적이다. 소금에 절인 음식은 삼투현상으로 세균이나 곰팡이의 증식을 억제하므로 소금은 방부제의 역할도 탁월하다. 이처럼 소금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우주에는 기본적인 네 가지 힘인 중력·전자기력·강한 핵력·약한 핵력이 존재한다. 나트륨 이온과 염화 이온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인 전자기력에 의해 염화나트륨이 된다. 상반된 전기적 성질을 갖는 두 이온의 결합은 조화로우며 그 둘의 상호작용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조화와 균형’은 ‘어울림과 치우치지 않음’이며 이는 자연의 원리다.
우리는 소금에서 짠맛뿐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섭리를 꿰뚫어 봐야 한다. 류시화 시인의 시 「소금 인형」에 나오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 인형’처럼 우리는 세상과 타인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세속(世俗)의 삶과 영성(靈性)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우리 마음의 깊은 바다로 내려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마태 5,13)
[과학과 신앙] (7) 솔로몬의 지혜와 AI
2024년 10월 8일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 위원회가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를 발표하자 과학계는 술렁였다. 순수 물리학자와 화학자가 아닌 AI(Artificial Intelligence : 인공지능) 개발에 기여한 인물들이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 선정 기준은 ‘인류에 헌신한 정도’와 연구의 ‘독창성’이다. 노벨상위원회의 이번 결정은 앞으로 과학 분야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AI가 끼칠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18세기에 증기기관이 이끈 1차 산업혁명 이래로 인류는 지금 AI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다면 AI는 무엇이고 지금 어디까지 발전한 것일까? AI는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거나 대체하는 기술이나 시스템이다. 1950년대 기계가 인간처럼 학습하고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초기 연구를 거쳐 1980년대에 인간이 입력한 정보만을 분석하던 AI가 1990년대에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스스로 규칙을 찾아 학습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데이터를 분석해 자동으로 규칙을 찾아내는 머신러닝(machine learning)이다.
현재는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딥러닝(deep learning)과 이용자의 요구에 따라 콘텐츠를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생성형 AI(generative AI)시대로 왔다. 생성형 AI는 보고서 작성·그림 그리기·작곡뿐만 아니라 일반 업무에서도 인간의 능력과 대등하거나 능가하는 결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AI 시대는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AI의 대부로 불리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존 홉필드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의 기술 발전은 매우 불안하다. AI 알고리즘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밝혔으며,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도 “AI는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해를 끼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래에 AI는 사무직·회계직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하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인류를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지혜로운 인간이란 뜻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네안데르탈인들을 도태시켰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1000억 개의 인간 뇌신경세포 기능을 뛰어넘는 인공회로망에 의한 AI 혁명이 인류를 또 다른 네안데르탈인으로 도태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인 간, 집단 간, 국가 간의 관계가 더욱 복잡해짐에 따라 각 주체들은 자기보전과 손익계산에 최대한의 지능을 활용한다. 그런 상황에서 AI의 고효율적 지능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AI는 비(非)지성적이다. 가치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은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며 이때 필요한 것이 지혜다. 지혜는 시행착오·고민·노력을 통해 얻어진, 지능 이상의 것이다.
구약성경 속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갈망하고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다. 우리도 솔로몬처럼 지혜를 갈망해야 한다. 삶의 방향은 지능이 아니라 지혜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지혜 6,17)
[과학과 신앙] (10) 1과 1/2
가톨릭 신자는 1년에 두 번 주님 부활과 주님 성탄 대축일 전에 의무적으로 고해성사에 임하고 성체를 영해야만 한다. 이를 판공성사라 한다. 잘못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고해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해소는 자신의 잘못을 고해하는 장소(告解所)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짐과 고통이 해소(苦解消)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1년에 두 번 최소 6개월마다 고해성사에 임한다는 것은 6개월이란 시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마음에 붙어있는 세속적 삶의 때를 씻어내야 할 일종의 유통기한이고, 처음의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야 할 결심을 해야 하는 신앙심의 중간평가 기간이기 때문인 듯하다.
어떤 물질의 처음 양을 1이라 할 때 그 양의 1/2로 줄어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과학 용어로 반감기(半減期, half-life)라 한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는데, 양성자끼리는 같은 양전하를 가지고 있어 서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한다. 이러한 양성자들은 ‘강한 핵력’이라는 더 큰 힘에 의해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결합하여 원자핵을 이루게 된다.
우라늄·라듐 같은 방사성 원소들은 양성자의 수가 매우 많아 같은 전하를 띤 양성자끼리 밀어내는 힘이 강해 원자핵이 붕괴된다. 이를 방사성 붕괴라고 하는데 붕괴를 거듭하다 보면 원자핵이 처음 가진 방사능의 양이 1/2로 줄어들게 되며 이때까지 걸린 시간이 반감기다.
예를 들어 방사성 원소 세슘(Cs)의 반감기는 30년이다. 30년이 지나면 처음 양의 1/2로 줄어든다. 세슘이 처음 양의 1/8로 감소했다면 이것은 반감기인 30년을 세 번 지난 것이므로 결국 90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이러한 원리로 탄소14나 질소15 같은 방사성 동위원소들의 반감기를 이용하면 고대 유물이나 유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반감기는 물질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도 반감기가 있다. 금연이나 금주 계획, 운동이나 다이어트 계획처럼 새해를 맞이하며 다짐했던 목표들, 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의 굳은 결심은 짧게는 며칠, 혹은 몇 달 후 반으로 줄어 이내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이 굳은 결심이 삼일도 못 간다면 그 사람의 의지는 반감기가 1.5일인 것이다. 결국 사람의 마음에서는 반감기가 길수록 처음 결심이 오래 지속될 것이다.
한 집단의 리더는 처음 그 자리에 올라갈 때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존중하며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선한 역할을 하겠노라고 공식적으로,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을 것이다. 또 구성원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권한을 위임한다. 하지만 리더가 가진 마음의 반감기가 짧다면 그 단체의 구성원들은 불행해진다. 구성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며 섬기려 하지 않고 권위적으로 섬김을 받으려 할 때 죄악은 시작된다. 권위는 위에서부터의 강요에 의해 인정받는 것이 결코 아니다. 권위는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를 통해 아래서부터 위로 인정되는 자연스러운 영향력이어야 한다.
오늘, 섬김을 실천할 수 있는 참 리더가 우리 주변에 과연 존재하는지 되물어 본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과학과 신앙] (12) 달력을 보며
2024년이 가고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이제 새 달력을 펼치며 새로운 1년을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보편적인 달력은 태양력(太陽曆)인 그레고리력(曆)으로 1528년에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이 예수회 수도사제이며 천문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에게 제작하게 하여 반포한 것이다. 이는 B.C. 45년부터 시행한 로마의 율리우스력(曆)을 대체하는 것으로, A.D.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춘분일 후 보름이 지나고 첫 일요일을 부활절로 정했다. 율리우스력의 춘분일과 실제 천문학적 춘분일이 일치하지 않아 역법의 개편이 필요해서였다.
태양력으로 1년은 태양이 황도(黃道, 태양이 지나는 가상의 길)를 따라 춘분점에서 출발하여 다시 춘분점까지 돌아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365.24219일이다. 이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1회 공전하는 시간이다. 통상적으로 달력은 1년을 365일로 하고 이를 12로 나누어 12개월로 한다. 원래 로마인들이 쓰던 달력에는 1년이 10개월이었는데, 로마의 2대 황제 누마 폼필리우스가 2달을 더해 1년을 열두 달로 나누게 한 것에서 유래한다.
태음력(太陰曆)에도 1년은 12개월이다. 이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1회 공전할 때 달은 지구 둘레를 12회 공전하며 위상이 변하는 것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365일을 12로 나누면 평균 30일이 나오며 이것이 1개월이 된다.
이처럼 달력은 해와 달 같은 천체의 주기적인 운동을 기준으로 인간의 경험적인 지혜와 지적 연구가 만들어 낸 시간의 규칙이다. 하루가 24시간인 것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하루를 아침 1구간, 낮 10구간, 저녁 1구간, 밤 12구간으로 나눈 것에서 시작됐다. 이것은 지구의 자전주기인 23시간 56분 4초와 큰 차이가 없다. 또 1시간이 60분인 것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60진법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시간을 ‘움직이지 않는 영원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 혹은 이후에 따른 움직임의 횟수와 범위’라고 규정했다. 뉴턴은 1687년 「프린키피아」에서 물체의 운동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외부의 어떠한 것과도 관계없이 시간이란 균일하게 흐르는 ‘절대적’인 것이라 했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물체의 운동 상태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며 시간은 ‘상대적’이라 했다.
우리가 시간의 본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인간과 자연의 미숙함을 성숙하게 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은 계절의 변화를 만들고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시계추가 되어 꽃이 피게 하고 낙엽이 지게 하며, 아이가 자라게 하고 어른을 노인으로 변화시킨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은 우주의 무한한 시간의 일부다. 지금 이 시각 내가 있는 이곳은 무한한 시공간의 어디쯤일 것이다.
달력을 보며 나에게 묻는다. 유한한 내 삶의 달력에 나는 어떤 가치들을 기록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에페 5,15-16)
[과학과 신앙] (14)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되고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인 1969년 7월 20일 세 명의 우주비행사가 지구를 떠난 지 4일 만에 지구에서 38만㎞ 떨어진 달 상공에 도달했다. 달 착륙선 선장인 닐 암스트롱과 조종사 버즈 올드린은 달 표면에 착륙해 인간의 발자국을 남겼으며 닐 암스트롱은 인류 역사상 달 표면을 밟은 최초의 인간(first man)으로 기록되었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달착륙이라고 하면 닐 암스트롱의 이름을 떠올리지만 두 번째로 달 표면에 발을 디딘 버즈 올드린과 달 상공에서 사령선을 타고 대기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는 잘 모른다. 하지만 달 착륙선을 조종해 달 표면에 착륙하도록 한 버즈 올드린과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며 달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마이클 콜린스가 없었다면 닐 암스트롱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에는 우주비행사 ‘버즈’가 등장하는데, 이는 두 번째로 달 표면을 밟은 버즈 올드린을 기념하는 캐릭터다.
1953년 두 명의 젊은 과학자인 미국의 제임스 왓슨과 영국의 프란시스 크릭은 20세기 현대 생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논문을 발표한다. 이 공로로 왓슨과 크릭, 그리고 또 다른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는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왓슨과 크릭은 모리스 윌킨스의 동료 연구자였던 영국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연구 업적이 없었다면 DNA 이중나선 구조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X선 회절 촬영법을 이용하여 실험적으로 DNA의 구조를 밝히려 많은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이를 공개했다. 그녀의 데이터를 토대로 DNA의 분자모형을 구축하여 이론적으로 DNA의 실체를 규명한 것이 왓슨과 크릭이다.
X선을 이용한 실험은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안타깝게도 프랭클린은 DNA 실체 규명에 그 누구보다 크게 공헌했지만 38살의 젊은 나이에 난소암으로 사망했으며, 그 당시 과학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주의와 사망한 과학자에게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는 관례 때문에 노벨상도 받지 못하였다. 1등이었던 왓슨과 크릭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프랭클린을 기억하기 위해 지금은 많은 생물학 서적에 그녀의 사진과 연구 업적인 ‘51번 X선 회절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첫째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그 외는 주목받지 못하는 현상은 경쟁주의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을 스포츠·학교 성적·대학입시·직장 성과주의·정치 선거 결과에서 종종 목격한다. 그러나 첫째 뒤에 가려진 둘째와 꼴찌들의 노력과 존재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1등이란 것은 특정 부분에서만 인정된 가치이지, 그것이 다른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세속적 논리로 첫째로 인정하는 가치들이 하느님의 논리로는 꼴찌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공동체를 대표하는 첫째는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자기 역할에 충실한 수많은 2등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의 시선은, 그리고 1등의 시선은 1등 속에 가려진 수많은 2등과 꼴찌에게 향해야 한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6)
[과학과 신앙] (1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공식적인 첫 작품은 후원자였던 리아리오 추기경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술 취한 바쿠스(1497)’였다. 이 대리석 조각상은 로마의 술(포도주)의 신 바쿠스가 흥건히 취해 술잔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로마인들이 신의 축복이라 부른 포도주는 인류 역사와 함께한 대표적인 술이다.
하지만 포도주를 포도주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다. 미생물의 이 놀라운 역할은 1864년에 와서야 프랑스 화학자이며 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서 밝혀진다. 파스퇴르는 프랑스 북동부 릴 대학 화학 교수로 있을 때 지역 양조업자로부터 포도주 제조 시 제대로 발효되지 않고 시큼해지는 현상에 대해 조사 의뢰를 받고 해결책 찾기에 몰두한다. 파스퇴르는 포도주 제조 때 사용하는 도가니에 효모가 아니라 유산균이 들어있는 경우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아세트산균에 의해 포도주가 시큼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과학사에서 빛나는 파스퇴르의 업적은 발효나 부패, 질병의 원인이 되는 미생물의 존재를 밝혀낸 것이다.
포도주의 주재료인 포도의 포도당 1분자가 효모에 의해 분해되면 최종적으로 에탄올 2분자와 이산화탄소 2분자가 생성되는데 이 과정이 에탄올 발효다. 효모 같은 단세포 생물의 생화학적 작용이 술의 에탄올을 만들어준다. 만약 포도주가 산소에 노출되면 아세트산 발효가 진행되어 식초가 되어버린다. 먹다 남은 포도주의 마개를 제대로 밀봉하지 않으면 시큼해지는 이유다.
2000년 전에는 포도주를 만들 때 포도를 으깨서 양이나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부대에 담아 발효시켜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에탄올과 함께 생성되는 이산화탄소 기체는 가죽 부대를 부풀게 한다. 오래된 가죽 부대는 탄성이 떨어지고 뻣뻣해 결국 가죽 부대가 터지게 되어 술을 버리게 된다. 설사 터지지 않더라도 부푼 부대의 갈라진 틈으로 공기 중의 산소가 들어가면 포도주는 아세트산 발효가 일어나 시큼해져 마시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새 술은 탄력이 있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성경에도 이에 대한 말씀이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이 말씀은 우리 삶에도 적용된다. 2025년이라는 새 술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우리 사회는 그 술을 담는 부대이다. 정치·경제·문화·예술·교육·신앙 등 모든 분야에서 2025년은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초심을 잊지 말고 발전과 도약을 모색해야 할 시기다. 초심을 잊지 말자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 본질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정치인은 정치의 본질, 교육자는 교육의 본질, 의료인은 의료의 본질, 신앙인은 신앙의 본질을 잊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과 역할과 시스템을 바꾼다고 새 부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건전한 철학과 결단력, 구습을 타파하려는 행동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초심을 회복해 기본으로 돌아가 본질을 회복하려 노력할 때 진정으로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인 개개인이 모두 새로운 각오로 거듭나 새 술을 담을 만한 새 부대가 되기를 기도한다.
[과학과 신앙] (16)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신경과학자 로저 울컷 스페리 박사는 1970년대부터 뇌 연구를 통해 좌뇌·우뇌 이론을 만든 인지과학의 선구자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좌뇌와 우뇌로 구분되는 인간의 뇌는 특정한 기능에 더 특화돼 있다. 예를 들면 좌뇌는 논리적·합리적·이성적 판단 및 분석적 사고, 감정 절제와 관련돼 있고, 우뇌는 창의적 사고의 뇌로 직관적·주관적 판단·감정 표현에 관여한다. 좌뇌에서 나오는 신경은 목 쪽으로 향해 있는 뇌의 한 부분인 연수에서 신경이 교차해 우리 몸의 오른쪽 부분을 지배하고, 우뇌에서 나오는 신경은 그 반대로 우리 몸의 왼쪽 부분을 지배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감정 표출에도 영향을 준다. 정서와 관련된 기능은 우뇌가 좌뇌보다 더 정교해 똑같이 웃는 모습을 해도 우뇌의 명령을 받는 왼쪽 얼굴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사람의 얼굴에는 80여 개의 근육이 있는데 이 중 40여 개가 웃는데 영향을 준다. 사람이 웃거나 어떤 표정을 지을 때 왼쪽과 오른쪽 얼굴의 미세한 근육 운동의 차이가 보는 사람에게도 차이를 만든다. 동·서양의 많은 초상화가 인물의 왼쪽 얼굴을 표현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왼쪽 얼굴을 보이며 미소 짓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1973년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심리학자 이안 크리스토퍼 맥매너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16~20세기 서유럽 초상화 1400여 작품 중 남성은 56%, 여성은 68%가 왼쪽 얼굴이었으며, 2012년 미국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 심리학자 제임스 시치릴로는 왼쪽 얼굴이 오른쪽보다 상대방에게 더 매력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국내 미술사학계의 대가 이강칠 선생이 우리나라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수록하여 펴낸 「한국명인초상대관」에도 196명의 인물 초상화 중 174명의 초상화가 왼쪽 얼굴이다.
2000년 전 유다인들은 왼손을 부정하게 여겨 자기보다 약자인 사람의 뺨을 때릴 때 오른쪽 손등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렸다 한다. 오른 손바닥으로 상대방의 왼쪽 뺨을 때리는 것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뺨을 때린다는 것은 폭력이며 상대방에 대한 멸시와 우월 의식을 드러낸다. 순우리말인 얼굴은 어원이 얼골이며 ‘얼’은 정신, 혼을 의미하고 ‘골’은 골짜기, 모양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따라서 얼굴은 얼이 드나드는 통로이므로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 뺨을 맞았을 때 더 큰 정신적 상처와 치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마태 5,39)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참된 뜻은 폭력에 대한 비폭력 저항으로 받아들여진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처럼 가장 정서 표현이 잘 되는 왼쪽 얼굴을 보였을 때 상대에게 진심이 어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오른쪽 뺨을 맞았을 때 왼쪽 뺨을 돌려대는 용기와 진심을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저항을 통해 실천했다.
일부 군중들의 폭력 사태가 언론에서 보도되는 등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어수선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비폭력 저항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과학과 신앙] (19) 본 걸 믿는 걸까, 믿는 걸 보는 걸까
얼마 전 17세기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을 보기 위해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바로크 시대 미술에 큰 발자취를 남긴 카라바조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볼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특히 이번에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은 요한 복음 20장의 한 장면을 그린 ‘성 토마스의 의심’이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은 카라바조의 원본은 아니고,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 작가가 완성한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 소장본이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와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한 이 그림은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옆구리 상처를 손가락으로 찔러보는 장면을 묘사했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와 극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마치 현장 상황을 보는 듯한 ‘성 토마스의 의심‘은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그림을 통해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좀처럼 그림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믿음이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이며, 믿음에 대한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을 떠올리며 가톨릭 신자로서 삶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았다.이 세상에는 안 보고도 믿어야 할 것이 있으며, 그와 반대로 반드시 눈으로 보고 믿어야 할 것이 있다. 전자는 신앙적 측면에서의 믿음이며 후자는 세속적 삶에서 접하게 되는 사회현상과 뉴스들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첨예한 정치적 의견 대립과 이에 따른 집단 간 갈등으로 시끄럽다. 이는 이분법적으로 갈라선 서로의 정치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다.
과연 누가 옳은 것인가? 인간은 어떤 사회현상이나 인간 행동에 대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확증편향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현대의 뇌과학이 지금까지 밝혀낸 믿음 혹은 신념의 형성은 분석적이고 합리적 과정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 경험·기억·감정 등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대뇌 속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서로 다른 영역들이 복잡한 신경망들과 연결되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뇌는 인체의 몸무게 중 단 2% 정도이지만 하루 중 섭취하는 에너지의 20%나 소비한다. 따라서 에너지를 소비하며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기보다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주관적 믿음을 바탕으로 어떤 현상을 바라보며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내리는 효율성에 따라 작동하기도 한다. 거짓뉴스와 선동가들에게 현혹되기 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럴 때일수록 피상적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해야겠다. 지금 나는 세상에 대해 보는 것을 믿고 있을까, 믿는 것을 보고 있을까?
[과학과 신앙] (20) 재의 수요일에
환경부 소속 국립 생물자원관의 국가생물 다양성센터 자료에 의하면, 현재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물 중 동물의 종류는 대략 100만 종이 넘고 식물은 32만 종이 넘는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몸은 부피와 질량을 갖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백질·지방·탄수화물 같은 유기물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물질들은 화학반응에 의해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원소(element)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재 100여 가지 원소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약 25가지가 생명체의 구성 및 생존에 필수적이다.
특히 탄소(C)·산소(O)·수소(H)·질소(N) 등 네 가지 비금속 원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96%나 된다. 이외에도 생명체 몸에는 칼슘(Ca)·칼륨(K)·나트륨(Na)·마그네슘(Mg) 같은 금속 원소가 존재하며 이들은 우리 몸을 구성하거나 중요한 생명현상 기능을 담당한다.
물질적 관점으로만 봤을 때 원소(원자)들의 집합체인 생명체는 죽음에 이르러 또 다른 생명체인 미생물에 의해 다시 개개의 원소로 분해되고 흩어져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원소로 회귀한다. 풀과 나무 같은 식물은 30여 종의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식물을 태우면 탄소(C)·수소(H)·산소(O)·질소(N) 등의 비금속 원소들은 산소와 결합해 기체로 날아가고 나머지 대부분의 금속 원소들과 비금속 원소의 일부는 고체 산화물 형태로 남아 재를 이룬다. 따라서 재의 성분은 주로 산화칼슘(CaO)·산화칼륨(KO)·산화나트륨(NaO)·산화마그네슘(MgO) 등인데, 이들은 모두 염기성이다.
염기성 물질 중 물에 잘 녹는 것을 알칼리(Alkali)라 부르는데 어원은 아랍어에서 왔다.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하는 아랍어 정관사가 ‘알(al)’이며 칼리(kali)는 ‘식물을 태우고 남은 재’를 의미한다.
비누가 없던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풀과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를 물에 녹여 빨래할 때 비누로 이용했다. 잿물은 비누와 같은 염기성이라 단백질을 분해하므로 빨랫감의 묵은 때를 깨끗이 씻어냈기 때문이다. 또 밭에 재를 뿌려주기도 했는데 이는 재의 금속 원소 성분이 작물에 미네랄을 제공하는 천연비료 역할을 하여 생육을 도왔기 때문이다. 또 재의 염기성 성질은 잎과 줄기 및 토양 속 해충 접근을 막아줘 뿌리를 보호하는 천연 농약 역할도 하며 밭작물에 해가 되는 세균 증식을 억제하는 살균 효과도 있다.
죽음과 소멸을 상징하는 재가 이처럼 옷에 묻은 세속의 때를 씻어내어 새로움을 주고 풀과 나무가 잘 자라도록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생명과 죽음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영원의 연결고리이며 하느님 섭리가 아닐까 싶다.
3월 5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이었다. 이날에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에 얹는 재의 예식을 치르며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는 말씀의 뜻을 깨닫도록 해준다. 재의 수요일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참 의미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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