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28-31 (하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
성경본문 : 다니엘 4: 8-31
28.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왕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쌔
30.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31.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
출 처| 이성희 목사
사도행전 11: 7-10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
소리는 구약을 대변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소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소리로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오디오’ 시대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하나님은 소리와 모습으로 함께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시대는 ‘오디오 비주얼’ 시대입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들었습니다.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고, 야곱이 그랬고, 사무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듣고 소리대로 살았습니다.
모세도 하늘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백성들을 이끌고 천막을 쳤습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께 일일이 물어보고 전쟁을 하고 백성을 통치하였습니다. 하늘 소리를 듣고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구약시대는 소리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늘 소리를 못 들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입니다. 소리를 듣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영화를 보세요. 아무리 좋은 영상이라도 소리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대사가 모르는 말이라도 소리가 있어야 영화가 재미있습니다. 영어를 못 알아듣지만 아무 소리 없이 자막만 있고 소리가 없다고 가정해 보세요. 소리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먼저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자는 듣기를 원합니다. 지혜가 아니면 듣지 않습니다. 들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아예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교만한 사람입니다. 사실은 교만은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듣는 것이 보는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듣는 것이 결정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고대 수메르어에서는 귀와 지혜는 동의어였습니다.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성경에 12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귀를 가지고 들으라고 합니다.
하루의 9%의 시간은 글쓰기에 소비합니다. 16%는 읽기에 소비합니다. 30%는 말하기에 소비합니다. 그리고 45%는 듣기에 소비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듣는 시간이 이렇게 많습니다. 듣는 것은 이렇게 소중합니다. 들어야 압니다. 듣는 것은 신앙의 기본입니다.
사무엘상 15:22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도 나으니”라고 합니다. 전도서 5:1에는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하늘소리를 잘 듣는 것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로마서 10:17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24에는 “진실로 진실로 내게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하늘소리를 듣는 것은 곧 구원을 얻는 신앙입니다. 많이 들어야 합니다. 듣고 잊어버려도 또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운항 상태가 고르지 못한 비행기 안에서 누군가가 계속 웃고 있었습니다. 그는 헤드폰을 끼고 있었습니다. 아마 코미디 프로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 달랐던 것은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그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으면 세상의 요란한 일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동시에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두 사람에게 이중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베드로에게 가이샤라의 고넬료의 집에 가게 하십니다. 고넬료에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모시고 오게 합니다. 베드로는 환상만 좇아간 사람이 아니라 하늘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늘 소리를 듣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고 하늘 소리를 듣고 하늘 소리에 민감한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이 이미 주신 말씀을 잘 따르는 사람입니다.
11:8에는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왜 거절했습니까? 왜 속된 것 먹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까? 자기 생각, 자기 관습, 자기 고집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신 레위 법전에 이런 부정한 것들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래서 먹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화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문자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말씀이라고 자의로 해석합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듣지 않고, 자기 상식대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가 어려워지는 한 요인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씀을 상징화할 때에 교회는 쇠퇴하는 징조를 보였습니다. 조금은 무식할 정도로 고지식하게 믿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시고, 왜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어린이같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갔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을 가다가 하늘 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에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는 하늘 소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주여, 누구이십니까?”라고 했을 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니 그냥 예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니지요?” “거짓말이지요?” 따지지 않고 하늘 소리가 예수님의 음성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밧모섬에는 지금도 계시동굴이라는 요한이 계시를 받은 곳이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하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대로 적어 내려갑니다. 그래서 그는 계시록 1:19에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요한은 그대로 적어 우리가 보는 계시록이란 책을 씁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을 보세요. 누가복음 15:29에는 그가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이 말은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는 뜻입니다. 이 아들도 아버지의 말씀을 어김이 없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뜻을 순복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했고, 말씀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각을 접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복한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자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11:9에는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순복하고 더러운 것을 이제는 더 이상 더러운 것이러 하지 않고 깨끗하게 된 것을 먹으러 갑니다. 실제로 짐승을 먹으러 간 것이 아니라 더럽다고 생각한 이방인을 전도하러 간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뜻에 순복하는 자세입니다. 이전에는 이방인은 예수님을 믿을 자격도 없다던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이제는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고 간 것입니다. 내 의지가 있어도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바른 신앙적 자세입니다.
그 자세는 예수님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세요.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자신의 의지가 없으면 무기력합니다. 의지대로 하면 고집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이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맡기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바울은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전도하러 가려고 준비하고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서 드로아로 갔습니다. 만일 바울이 자기 고집대로 끝까지 비두니아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더 잘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항상 자신의 계획이 있지만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에 승복하는 사람이 하늘 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안디옥으로 떠날 때에 에베소에서는 오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21절에는 바울이 인정에 끌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끌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과감하게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는 것이 하늘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4:15에는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이라고 합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합니다. 삶과 결정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하늘 소리를 듣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관습에서 볼 때에 더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속된 것을 성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음식을 어느 것은 깨끗하고, 어느 것은 더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합니다.
소는 깨끗하고, 돼지는 더럽고, 개는 혐오식품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건강과 타인의 덕과 환경을 생각하여 먹으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음식에 대한 기준은 조금 다릅니다. 개고기가 몸에 좋다고 합니다. 내가 먹기 싫다고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볼 것이 없습니다. 먹지 않는 사람이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보신탕을 좋아하셨습니다. 교인이 목사님께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보신탕이 좋다고 그랬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목사님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니 좋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묵상주의자들은 간혹 성과 속의 이분법에 빠지는 우를 범합니다. 성과 속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스런 것이라도 잘 못 쓰면 속된 것이 됩니다. 아무리 속된 것이라도 바르게 쓰면 성스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도성과 사람의 도성에서 두 개의 시민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페리그리니’(perigrini) 즉 지상에 거주하는 이방인이고 두 세계에 대한 충성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더러워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이런 환상을 보이신 뜻이 무엇일까요? 더러운 우리를 보혈로 깨끗케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더러워진 사람이지만 보혈로 깨끗하게 씻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더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갑니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십니다. 존귀한 보혈이 내 영을 깨끗케 하십니다.
결론
에릭 리델이란 스코트랜드의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0세기의 유명한 올림픽 육상 챔피언이었습니다.
그는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서 육상 100미터의 금메달을 딴 선수입니다. ‘불의 전차’(Chariot of Fire)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입니다. 그의 누이 제니가 그에게 불평하였습니다. 에릭이 달리기하는데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시간 낭비로 보였습니다. 그 시간에 기독교 사역에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누이는 하였습니다. 에릭은 누이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달리는 능력을 주셨고 달림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다”. “제니, 나는 달릴 때 그분의 기쁨을 느껴.” 후에 2차대전 중 에릭은 중국 북부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에릭과 함께 있던 포로들이 그의 생활에 감탄하였습니다. 이른 새벽에 땅콩기름으로 불을 피워 빛줄기가 창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창문을 가리고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하늘의 소리 때문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하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항상 더러운 것을 깨끗케 합니다. 말씀에 내 의지를 순복하는 삶을 삽니다. 여러분의 삶이 거룩한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응답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하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고 매일 매일 복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