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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아 목사
도입
희랍 신화에 레테호수의 이야기라는 그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개 이렇습니다.
한 여인이 스틱스강에서 이제 영원한 나라로 강을 건너가려고 하는 시간입니다. 뱃사공이 그에게 말해줍니다 "이 강을 건너기 전에 레테호수의 물을 마시고 갈 것인지 마시지 아니하고 갈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이 여인은 다시 물어봅니다. "그래 이 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뱃사공은 이제 말해줍니다. "이 물을 마시게 되면 지난날의 괴로움을 말끔히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여인은 눈을 반짝이면서 "아 그럼 빨리 마셔야지요. 고통스러운 일, 지난 과거들 말끔히 잊어버리고 싶은데요" 했더니 뱃사공이 다시 한 마디 덧붙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동시에 기뻤던 일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 여인은 고민에 빠집니다. 아프고 괴로웠던 일 잊어버리고 싶지요. 그러나 동시에 기뻤던 일도 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마시지 안겠어요"하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 잊어버리고 몽롱한 가운데서 평안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민하며 고통을 느끼며 걱정하면서 행복한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여건에 관계없이 항상 행복합니다.
일이 생기면 기회가 주어졌다고 좋아합니다. 고독하면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좋아하고, 건강하면 일할 수 있다고, 병들면 조용히 기도할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하는 일이 순탄하면 만사를 형통케 해주심에 대하여, 역경에 처하면 자신을 단련시키고 정화시켜주심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복음의 길이 열리면 하나님의 일을 하니 좋고, 다치고 고난 당하고 순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두 때 사이에 인간을 두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형통한 날 곤 고한 날 즉 상을 주시는 날 벌을 주시는 날을 두사 좋은 명성을 값진 진주보다 더하게 하셨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 하신 것은 깨달음이 많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의 책망이 어리석은 자의 칭찬보다 낫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인내하는 것이 자신을 교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상의 원리인 것입니다.
곤고한 날이 있음으로 형통의 축복을 감사하게 하시고 형통을 경험해야 고통이 의미가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형통한 날 곤 고한 날을 병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래 일을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역풍과 순풍을 불게 하십니다.
형통할 때
날 때/거둘 때/치료시킬 때/세울 때/웃을 때/춤출 때/돌을 던져 버릴 때/
/안을 때/찾을 때/지킬 때/꿰멜때/말할 때/사랑할 때/평화할 때
곤고할 때
죽을 때/심을 때/죽일 때/헐 때/울 때/슬퍼할 때/멀리할 때/버릴 때/찢을 때/침묵할 때/미워할 때/전쟁할 때
이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참지혜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주님의 주권을 믿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지혜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1.지혜가 무엇입니까? 탈무드에 지혜에 대하여 4가지
1)지혜는 하나님 자신
2)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
(잠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3)지혜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가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편
4)지혜를 통하여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없어도 삶에 지혜가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인간에게 두 가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아는 지혜/하나님을 아는 지혜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혜 없이는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가치는
(전 7: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전 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1)유업과 같이 아름다움/햇빛을 보는 자(살아있는 자에게 유익함)
(잠 3: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2)생명을 보존시킴/물질보다 더 귀함
(잠 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주권 적으로 곤고한 날을 형통한 날로 바꾸실 수 있고 곤 고한 날을 형통한 날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설 때 뒤에서는 바로 군대가 앞에선 홍해가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고 하였습니다.
두 가지 병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전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하다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형통하는 날에는 기뻐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형통한'( :토브)이란 말은 '좋은', '선한', '아름다운'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이란 '성공한 날', '번영의 날', '평안의 날',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성도가 하는 일마다 잘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즉 육신 적으로 강건하고, 사업이 잘되고, 영적으로 평안한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해야 형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순종할 때입니다.
신명기 29장 9절에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여호수아 1장 8절에도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수1:7,왕상2:3).
2)하나님을 구할 때입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5절에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3)교회를 사랑할 때입니다.
시편 122편 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4)회개할 때입니다.
잠언 28장 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5)부지런할 때입니다.
시편 128편 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도 형통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저들의 진노에 불과합니다.
잠언 23장 17절에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24:19).
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됩니까? 그것은 악인의 형통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21장 4절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가능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부지런함으로 살아갈 때 형통케 됩니다.
결코 인간의 잔재주를 가지고 형통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할 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형통할 때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뻐하라'는 말은 '좋게 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좋은 시대에 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좋은 때를 이용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형통이 있을 때 선교하며 구제하며 선한 일에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건강할 때 주를 위해 봉사하며 헌신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평안한 기회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힘써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일이 잘될 때, 형통하게 될 때 방탕하기 쉽습니다. 그 형통을 육체의 기회로 삼습니다. 가난하고 궁핍에 처했을 때에는 하나님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는데, 부하게 되니 교만하여지고 방탕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도의 모습들이 비쳐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평안할 때, 형통할 때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 수 있는 연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메리왕시대에 신앙을 위하여 옥에 갇힌 성도들이 후에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 후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 믿음에서 떠나 대부분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아도 환난과 핍박이 있을 때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순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박해가 없을 때는 오히려 세속화되어 타락하는 경우들이 많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시대를 만났으면 또한 언제든지 좋지 못한 곤 고하다 날이 다가올 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변함 없이 믿음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는 환경을 초월하여 변함 없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2장 4절에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형통한 날을 만났을 때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 기회를 잃지 않고 선한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3장 12절에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라고 하였습니다.
형통한 날은 주님으로 더불어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기쁨은 참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2. 곤고한 날에는 생각할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곤고하다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곤고하다 날'이란 환난의 날이요, 실패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요, 재난의 날을 말합니다. 고통과 슬픔이 지배하는 때를 말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실망과 좌절에 빠질 것이 아니라 환경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조용히 그 고난과 사건의 의미를 뜻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생각하라'( :라아)는 말은 '보다', '관찰하다', '숙고하다'라는 뜻입니다.
괴로움의 시절은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적당한 때입니다.
여태껏 보지 못하던 것을 곤 고하다 때에는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곤고하다 날에 그 곤고하다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고진감래라는 말도 있지만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사람이 곧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벌'의 작가로 유명한 러시아의 문학가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닌 간질병과 사형수로서의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는 생텍쥐페리라는 인물도 평생동안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작가로서의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는 포기해버리는 일도 있지만 생텍쥐페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끊임없는 여인들과의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헬렌켈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귀머거리와 벙어리와 소경이라는 신체적 조건이 오히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아닐는지요. 링컨 대통령도 평생을 도전과 실패의 연속에서 마침내는 성공을 거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통 그 자체는 불행이나 불운이 결코 아닙니다. 고통이란 도리어 행복과 은총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희생인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아를 성장시킬 중요한 기회를 얻게 되며, 그러한 고통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용광로 속에서 아름다운 금이나 은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인간은 시련과 고통의 곤 고하다 날에 쉽게 비관하며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역대하 28장 22절에 보면 "이 아하스 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하고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곤고한 날에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그러면 곤고한 날에는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자신의 잘못과 연약함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불 신앙으로 살았던 어리석음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위로 받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해 주기 위함입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나도 그 아픔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으십시오" 라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곤고하다 날에 주님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곤고하다 백성을 구원..."(삼하22:28)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곤 고하다 날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34편 6절에 "이 곤 고하다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라고 하였고, 시편 22편 24절에서도 "그는 곤고한 자의 곤 고하다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곤고하다 날에 모세의 기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시90:15). 아픔을 당한 만큼 고통스러운 날만큼 형통케 하여 주시옵소서...
John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면제받은 신을 예배하고 경배하기가 어렵다. 나는 아세아의 여러 나라에 있는 불교의 절을 방문하여 부처 앞에 서 있었을 때가 많이 있었다. 부처의 모습을 보면 부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있다. 그는 눈을 감고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모습, 고난을 알지 못하는 모습이다. 나는 고난과 아픔을 알지 못하는 부처상 앞에 서있을 때마다 십자가상에서 홀로 외롭게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온몸에는 상처투성이 뿐인 예수님,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있고, 등에는 태장을 맞은 자국이 있으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써 이마로부터 피가 흐르며, 옆구리는 창으로 찔려 있고, 입은 목말라 타고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절규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의 이 고난은 황금알이 잉태되는 귀중한 시간임을! 지금의 이 고난은 우리 안에 있는 각종 아름다운 씨앗들이 알알이 영글기 위해 필요한 보석같이 귀한 시간임을 깨닫고 인내하며 기다립시다.
왜 우리가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몸소 고난을 당하셨고 그 고난을 치료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결코 저주가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괴로움들은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불청객으로 다가오는 곤 고함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돌아보고 회개하여 믿음으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이 두 가지 병행하십니다.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사 그 장내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과 곤 고한 날이 병행하여 우리 앞에 파도처럼 몰려 올 것입니다.
언제 형통의 날이 오는지 곤고하다 날이 우리 앞에 언제 다가설지 모릅니다. 또한 그 미래는 알 필요도 알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미래는 내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두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미래일 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1)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늘 불안하고 불확실하기에 주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2)기도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을 뻔히 알고 있는데 왜 기도합니까? 주님께 무릎 꿇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3)불안과 걱정으로 소망이 없게 될 것입니다.
형통한 날은 몰라도 불행이 닥친다고 예상해 보세요 불안해서 잠을 자겠어요. 죽는 날을 안다면 소망이 어디 있겠어요? 못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우리가 모르니까 깨어 경성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형통한 날은
기뻐하여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맞게 드리고 쓰는 헌신의 삶을 사시고 곤고한 날이 다가오면 주님 앞에 엎드려 곰곰이 생각하여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왜 고난을 주셨을까 그 의미를 찾아 회개하여 돌이키시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하실 것입니다.
곤고한 날은
주님을 바라보고 절대주권자인 주님께 의지하여 믿음을 회복하고 사명을 회복하고 주입에 손들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주께서 고난의 날만큼 형통의 은혜를 주십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 고하다 날에는 생각하라" 두 가지 병행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