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9: 10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 -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
교회가 전임 봉사자들에게 주택을 제공하고 생활비를 드리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일이다.
1]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1) 오로지(전혀)
이 단어를 '전혀'(altogether, KJV), 혹은 '전적으로'(entirely, RSV)로 번역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9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은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로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토스'(*)는 '확실히'(assuredly, certainly)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Hodge, Goert).
2]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 소망을 가지고
바울은 본 절에서 자신이 인용한 구약의 계명이 문자적인 뜻으로는 일하는 소에게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뜻은 인간을 위한 것으로서 밭갈고 씨뿌리는 자들이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소망을 갖고 일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고전 9: 11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
‘신령한 것’은 복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육신의 것’은 의식주에 관한 것을 말한다. 신령한 것은 영원한 것이지만, 육신의 것은 100년 동안만 유용한,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물질에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가치를 안다면 그 진리를 연구하고 전하는 주의 종들에게 하는 물질적 필요의 공급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0절에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일한 대가로 그에 상당한 임금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제 본 절에서는 앞 구절의 비유들에 빗대어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신령한 것'(*, 타 프뉴마티카), 곧 한없이 고귀한 영적인 씨앗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뿌렸으므로 그들에게 '육신의 것'(*, 타 사르키카) 즉 세상에 속한 것으로 영적인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미미한 것을 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