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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나눈 이야기」– 닐 도날드 윌쉬 지음 –
• 신과 나눈 이야기 :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체험하고자 하는 영(靈)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던 일들이 하나 둘 씩 실패를 하고, 있던 돈 마저 모두 사라지고, 나의 가족들도 나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할 때, 어느 순간 내 삶에서 오직 남은 것은 고통 뿐이었습니다. 삶이라는 처절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나는 결국 이 원흉인 신이라는 놈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마음처럼 처절하게 추운 어느 날 그 신이라는 놈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글을 쓰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분노를 써내려 가다가 던질려고 할 때, 어떤 힘에 단단히 붙잡히기라도 한 것 처럼 내 손은 종이 위에 그대로 있고, 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흘러나온 것이 "너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을 받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그냥 푸념을 늘어 놓고 싶으냐?" 라고 하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묘한 신과의 대화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 질문 ; 삶이란 일종의 학교 같은 것이고,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교훈들을 배우게 되어 있으며, 일단 '졸업' 하고 나면 더 이상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더 큰 것들을 추구해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맞는 말인가요?
○ 신 : 그것은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너희 신화의 다른 부분이다.
◈ 질문 ; 그렇다면 삶은 학교가 아닌가요? 우리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요?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죠?
○ 신 : '자신은 누구인지' 기억해 내고 재창조하기 위해서다. 너희에게 되풀이 해서 말해 주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너희 스스로 '자신'을 창조해 보지 않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 질문 ;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학교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저는 많은 영적 선생들에게서 삶은 일종의 학교라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당신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 신 : 학교는 너희가 알고자 하는 어떤 것을 모를 때 가는 곳이다. 너희가 어떤 것을 이미 알고 있고, 너희가 원하는 것이 그 앎을 체험하고 싶은 것 뿐이라면, 너희가 가야할 곳은 학교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삶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개 해주는 기회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 뭔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는 무언가를 모를 때 가서 배움을 얻는 곳이다. 그것의 전제는 네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너의 영은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아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삶이라는 것은 그저 너희가 개념으로만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수 있개 해주는 기회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너희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나의 지고한 속성 중 너희가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표현할 때, 너희의 기쁨은 얼마나 큰가?
◈ 질문 ;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됩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 신 : 그럼 이렇게 설명을 해 보자. 영(靈), 너희의 영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영에게 숨겨진 것, 미지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너는 네가 가진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개념이 체험되기 전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단지 사색에 불과하다.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너희와 함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 세상의 나이의 몇 배나 되는 시간 동안, 우주의 나이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색해 왔다. 그러니 나 자신에 관한 내 체험이 얼마나 짧고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 짐작이 가겠느냐?
나의 지고한 속성 중 너희가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표현할 때 너희의 기쁨은 얼마나 큰가? 너희는 더 격렬히 나를 체험하고자 하기 위해, 내가 없는, 즉, 사랑이 없다고 보이는 물질계에 온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전능의 속성인 내가 없다고 보이는 혹독한 물질계에서 너는 버려졌다고 느껴지고, 가난함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너는 무엇을 하게 되는가? 너의 삶을 창조해 나가고 성공으로 나아가지 않던가? 그러면서 너는 돈으로 표현되는 나의 힘의 속성을 체험하지 않았더냐?
◈ 질문 : 또 다시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 자신애 관한 당신의 체험이라고요?
○ 신 : 그렇다. 나 자신애 관한 내 체험 말이다. 태초에 존재는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재 전체는 자신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존재 전체가 곧 존재했던 모든 것이었고,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존재 전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 외에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 전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에 극단적인 비유를 하자면,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거울과 빛이 없이 자신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이제 존재 전체는 자신이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더없는 장대함을 체험이 아닌 개념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갈망한 것은 자신에 대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그토록 장대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나 장대하다는 용어 자체가 상대적인 용어이기에 그런 체험은 불가능했다. 존재 전체는 존재함이 없는 상태, 비존재가 없이는 장대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도 없었다.
비존재가 없는 상태에서는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겠는가?
◈ 질문 ; 조금 이해가 되는 듯합니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요.
○ 신 : 좋다. 존재 전체가 알았던 단 한 가지는 자기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 외부에 있는 어떤 준거 지점에 비추어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런 준거점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오직 단 하나의 준거점만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자기 내부에 있는 유일한 거점, 즉, 존재와 부재, 있음과 없음이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인 전체는 체험으로 자신을 아는 쪽을 택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관찰되지 않는 에너지, 다른 어떤 에너지도 파악할 수 없는 이 순수 에너지는 더 없는 장대함으로 자신을 체험하는 쪽을 택했다. 그것은 이렇게 하려면 내부의 준거점을 이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나는 너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저 완전함 자체였으니까~, 앞뒤, 좌우, 위 아래, 안팎 그 모든 것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준거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자신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기만 해도 전체보다 못한 각 부분은 자신의 나머지를 돌아보고, 그것의 장대함을 볼 수 있으리라는 아주 정확한 추론을 내렸다.
너네가 나의 일부를 보면서 흔히 아름답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너는 어제 밤에 너의 곁에서 잠들던 반려동물의 모습에서,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에서, 그리고 바다와 산, 등 자연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느끼지 않았느냐?
그리하여 존제 전체는 영광스러운 한 순간에 자신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었다. 처음에 이것과 저것은 서로 멀리 떨어져 존재했다. 그럼에도 둘은 함께 존재했다.
그 어느 쪽도 아닌 전체가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불현듯 여기 있는 것과 저기 있는 것,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있지 않지만 여기와 저기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무(無)이고, 공간을 지탱해주는 것은 비공간이며, 부분을 지탱해주는 것은 전체이다. 너네들의 물리학에서도 물질은 결국 에너지이며, 대부분의 공간은 비어있음을 보지 않았더냐?
◈ 질문 :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믿고 안 믿고는 일단 내버려 두고요,
○ 신 : 좋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 보자. 지금 모든 것을 지탱해주는 이 무(無)를 신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이 아닌 어떤 것, 곧 무가 아닌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하므로 정확하지 않다. 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망라한 전부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렇게 위대한 보이지 않음, 즉, 무 또는 사이 공간으로 설명하는, 동양 특유의 신에 대한 신비주의 정의, 역시 신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규정하는, 서양 특유의 실용주의 설명 만큼이나 정확하지 않다.
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제 신은 여기 있는 것과 저가 있는 것을 창조하여 신 스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부로부터 일어난 이 엄청난 폭발의 순간에 신은 상대성을 창조했으며, 그것은 일찍이 신이 자신에게 안겨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따라서 관계는 신이 일찍이 너희에게 안겨 준 가장 큰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무로부터 모든 것이 솟아났다. 덧붙혀 말하자면 이것은 너희 과학자들이 빅뱅 이론이라 부르는 것에 딱 들어맞는 영적인 사건이었다. 그 모든 요소가 앞으로 내달릴 때 시간이 창조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처음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에는 저기 있으니...
여기에서 저기까지 가는데 걸리는 기간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 존재의 보이는 부분들이 자신들을 서로 관련된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부분들 역시 그렇게 했다.
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 사랑의 절대 대립물인,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드디어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너희는 사랑의 부재가 있어야 사랑 또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너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비천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이 지구의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투쟁과 전쟁, 천사의 군대와 악마의 전사들, 선과 악의 힘, 빛과 어둠의 힘들이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갖춘, 꽤 정교한 신화들을 만들어냈다.
이 신화들은 인류가 그 혼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으나, 그 정신으로는 좀처럼 인식하기 힘든 우주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해 주기 위해서 생겼다.
신은 자신의 나눠진 변형으로 우주를 있게 하면서 순수 애너지로부터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만들어냈다. 달리 말해 그렇게 해서 신은 물질 우주 뿐만 아니라 비물질 우주까지 창조한 것이다.
존재와 부재의 등식 중에서 부재를 이루는 신의 부분 역시, 전체보다 작은 무한히 많은 수의 단위들로 폭발했다. 이 에너지 단위들을 너희는 영이라고 부른다. 너희의 종교 신화들 중 일부는 이 사건을 아버지 신이 많은 영적 자신들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인간의 체험에 견준 이같은 비유는 현실에서 일반 대중에게 갑작스러운 출현이라는 개념, 즉, 하늘 왕국에 무수한 영들이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점에서 보면 너희 신화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궁극의 진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전체를 이루는 무수한 영들은 우주적인 의미에서 내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너도 그렇다. 즉 신이 아닌 것은 없다. 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수 없이 많은 부분들 각각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 주었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 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 말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우리의 신체가 서로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우리의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우리는 같은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같은 성질이다.
우리는 똑같은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허공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가 영적인 자신인 너희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너희를 통하는 것 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에 대한 내 목적은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하는 것, 즉, 너희가 신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해 보이지만 더 들어가면 아주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방법은, 우선 너희 자신을 나 아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가 아주 미묘해질 테니 내 이야기를 따라오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준비 되었느냐?
◈ 질문 : 그런 것 같습니다.
○ 신 : 좋다. 이런 설명을 요구해 온 것은 너라는 것을 명심하라. 너는 여러 해 동안 이것을 고대해 왔다. 너는 신학 교리나 과학 이론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평이한 용어로 이런 설명을 요청해 왔다. 네가 요청한 것이니 내가 답을 하겠다.
이제 문제를 단순화 하기 위해, 논의를 위한 토대로 신의 자식이라는 너희의 신화 모델을 이용해 보자. 그것이 너희에게 친숙한 모델이기도 하고, 또 여러가지 면에서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 모든 영적인 자식에게 자신들을 내 부분으로 인식하게 한, 한 가지 방법은 그냥 그들에게 얘기해 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영혼이 자신을 그냥 신, 또는 신의 일부, 신의 자식, 또는 하늘 왕국의 상속자로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설명 했듯이, 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 개념으로 안다는 것 만으로는 너희에게도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비범한 착상이며, 가장 빛나는 합작품이다. 내가 여기서 합작품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너희 모두가 나와 더불어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계획하에 순수 영혼인 너희는 이제 막 창조된 물질 우주로 들어가게 된다. 물질성이야말로 너희가 개념으로 아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해주는 확실한 길이기에, 내가 맨 먼저 물질 우주와 우주를 지배하는 상대성 체계와 그 밖의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까닭도 사실 거기에 있다.
내 영적 자식들인 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무언가가 작다는 것을 알려면 반드시 그 대립물인 그보다 큰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즉, 신의 대립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를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을 통해 너희 자신을 규정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이제 궁극의 앎에서 곧 너희 자신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경우에, 직접 창조해보기 전까지는 자신을 창조주로서 체험할 수 없다. 또 너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을 때까지는 너희는 자신을 창조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기 위해 너희는 먼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내 말을 이해하겠느냐?
◈ 질문 :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 신 : 좋다. 너희 존재에 대한 그 미묘한 느낌, 그 느낌에 계속 머물러라. 물론 너희가 너희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너희는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것이다. 순수하고 창조할 수 있는 순수한 영일 뿐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을 벌였다. 즉,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잊게 만든 것이다. 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덕분에 너희는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너희가 완전한 선택권을 가진 존재, 즉, 규정상 신인 존재로서 자신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신의 일부라는 이야기를 듣는 데서가 아니라, 신의 일부가 되고자 선택하는 행동 속에서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문제라면 너희가 어떻게 선택할 수 있겠는가?
너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너희는 내 자식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너는 그 사실을 잊어버릴 수는 있다. 너희는 지금은 신성한 전체의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 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er)]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쪽을, 너희의 전체인 신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너희의 직무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이 원래 무엇인지(신임을) 알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것이 너희의 직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영혼의 스승들이 하나같이 해온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유일한 목적이다. 다시 말해 너희 영의 목적이다. 하나 하나의 영혼은 모두 선각자 들이다. 개개의 영혼은 지금이라는 순간마다 자신의 더 없는 고귀한 목적에 맞고, 가장 빨리 자신을 기억해내는 데 적합한 상황과 조건을 창조한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옛날에 자신이 빛인 걸 아는 한 영혼이 있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영혼이어서 체험을 갈망했다. 그것은 "나는 빛이다", "나는 빛이다" 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것의 어떤 앎도, 또 그것의 어떤 말도, 그것의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생겨난 영역에는 빛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영혼이 다 위대했고, 모든 영혼이 다 장엄했으며, 신의 광채로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작은 영혼은 햇빛 속의 작은 촛불 같았다. 작은 영혼은 자신의 그 일부인 그 위대한 창조주의 빛 속에서 그것은 자신을 볼 수도 없었고, 자신을 참된 자[신]으로 체험할 수도 없었다.
이재 그 영은 자신을 알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지내게 되었다. 그 바람이 너무나 커서 하루는 내가 이렇게 말했다.
"작은 영혼이여, 너의 바람을 충족시키려면 뭘 해야 하는지 아느냐?" 작은 영혼은 물었다.
"오 신이시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답했다.
"우리에게서 너를 떼내야 한다. 그러고 난 다음, 자신을 어둠이라고 불러야 한다" 작은 영혼이 물었다.
"오, 거룩한 신이시여, 어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가 아닌 것이다."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작은 영혼은 그 말 뜻을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영혼은 전체에서 자신을 떼어냈으며, 거기다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는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이 영역에서 자신의 체험 속으로 온갖 종류의 어둠을 불러들이는 힘을 행사하여 그것들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그 영혼은 더 없이 깊은 어둠 속에서 소리쳤다.
"아버지시여,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너희가 가장 암담한 순간에 소리치듯이 그렇게 말이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너희를 버린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너희 곁애 서 있다.
늘 변함없이 참된 너희를 기억시킬 채비를 갖츤 채, 너희를 집으로 들일 채비를 갖춘 채.... 그러므로 어둠 속에서 존재하는 빛이 되어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그리고 너희가 자기 아닌 것에 둘러싸인 순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고, 그같은 창조를 이룬 자신을 칭찬하라.
너희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애쓸 때 조차도...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의 순간에 행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달으라. 너희가 창조하는 체험은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과 이유를 알아차리고 나와 신을 발견하는 체험의 삶의 목적을 이루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