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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光海君 1575∼1641)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3 14.02.17 15: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 (光海君 1575∼1641(선조 8∼인조 19))


 

조선 제15대 왕(1608∼1623). 휘는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恭嬪) 김씨(金氏)이다. 형 임해군(臨海君) 진이 광포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선조가 인빈(仁嬪)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을 총애하고 있어 책봉이 지연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난지 평양(平壤)에서 세자에 책봉된 후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함경도·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탄생하자 서자(庶子)이며 둘째 아들인 그의 즉위를 두고 소북(小北)은 영창대군의 옹립을 주장하고, 대북(大北)은 광해군을 지지해 당쟁(黨爭)으로 확대되었다. 1608년 선조가 광해군을 후사(後嗣)로 선위(禪位)의 교서를 내려 즉위했다. 즉위 후 대북파의 주장으로 임해군을 유배하고 소북파의 제1인자인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했다. 원로대신 이원익(李元翼)을 등용하여 초당파적인 정책을 구현하여 당쟁을 종식시키고자 했으나, 정인홍(鄭仁弘)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611년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다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儒籍)에서 삭제당하자 유생들을 모조리 퇴관(退館)시켰고, 이듬해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많은 학자·문신들을 추방했다. 1613년 대북파가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무고(誣告)하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사사(賜死)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유배시켰다(癸丑獄事). 이듬해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죽였으며 1615년 이원익을 파직하고 대북의 음모로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을 꾸며 많은 학자·문신들을 추방하였다.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삭호(削號)하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명나라와 후금의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를 전개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찬술하였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계인(繼印)하였다. 《동국신속삼강행실(東國新續三綱行實)》과 《동의보감(東醫寶鑑)》을 간행하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사고(史庫)를 설치했으며, 인경궁(仁慶宮)·자수궁(慈壽宮)·경덕궁(慶德宮)을 세우는 등 치적이 많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광해군으로 강봉되고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제주(濟州)에 이배되어 죽었다.


광해군의 험난한 등극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이 서자에다 차남인 까닭에 명나라의 고명도 받지 못했다면서 광해군을 세 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 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 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춰버린다. 이 후 이 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 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하지만 선조는 미처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 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게 된다.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 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왕권안정에서의 피바람

 

그는 즉위 하자마자 우선 왕위 계승 과정에서 계략을 부린 유영경을 유배시켜 죽이는 한편, 왕의 권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하던 동복형 임해군도 유배시켜 죽인 다. 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인조반정의 명분 제공

 

1611년에는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성균과 유생들이 유생들의 이름이 올 려져 있는 청금록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광해군은 이 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서 쫓아내는 조처를 취한다. 이 때문에 그는 등극 초기부터 유생들과 등을 지고 만 다. 그리고 이듬 해 1612년 이른바 '김직재의 옥'으로 소북파 인사 1백여 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 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해 어보, 관인을 위조한 서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 속에 사건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1613년에는 다시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리안치(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했다가 증살(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그 열기로 죽게 하는 것)시키는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들을 삭직시킨다. 이 후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발생해 능창군(인조의 아우)는 물론 이에 연루된 신경희 등이 제거된다. 능창군 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일찍이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 하고 기상이 비범하여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경계를 받아왔다. 당시 죄수 소명국이란 자가 무고하기를 그가 신경 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함에 따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고 이후 살해당할 위험에 처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는 사형당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강, 오충갑 등은 유배되었다. 그래 서 이 사건을 '신경희의 옥사'라고도 한다. 1617년에 이르러서는 폐모론이 대두하여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의 폐모 반대론자들을 유배시키고 이듬해인 16 18년에 인목대비의 존칭을 폐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로써 광해군과 대북파는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인명 을 희생시키고 패륜 행위를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민생안정

 

광해군은 등극하자마자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민간의 세금 구조를 일원화시키고 세무 부담을 줄여주었다. 1611년에는 농지를 조 사하고 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정책인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또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즉위년인 1608년에 준공하고, 1619년 경덕궁(또는 경희궁), 1621년에는 인경궁을 중 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기기도 해 민간의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서 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소실되어 국사를 월산대군의 서가에서 논의해야 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능양군의 반정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의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반 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간 동안 광해군은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1641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폐위 그 이후

 

광해군 폐위 후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네 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이들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것은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정 세력은 이들 네 사람을 한 곳 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부의 동문 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 쪽에 각각 안치시켰다. 이들이 안치되어 울타리 안에 갇혀 살기 시작한 지 두 달쯤 후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자살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기이하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이들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 것 같다. 세자 질은 어느 날 담 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 지가 있었다. 짐작컨대 그는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모종의 내용을 담은 편지를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세자 질이 황해감사에게 전달하려 했던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는 알 수 없지만 추론컨대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를 하여 반정 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 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세자빈 박씨도 이 사건으로 죽었다. 박씨는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 때 나무 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세자가 빠져나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망을 보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세자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 려 오는 것을 목도한 그녀는 놀라서 그만 나무에서 떨어졌고,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반쯤 뒤에 아내 유씨와도 사별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한 때 광해군의 중립 정책을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 사대 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광해군이 폐 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 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 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나름대로 성리학적 사상에 기반한 가치관이 뚜렷했던 여자였다. 그러나 유배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화병을 얻고 말았다. 도저히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리하여 유배 생활 약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마저 죽자 광해군의 가족은 박씨 일가로 시집간 옹주 한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 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해서 그 이후로도 18년을 넘게 생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긴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의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 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 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 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또 그 긴 세월 동안 그는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으로 묵묵하게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 년 귀양생활 18년 수 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정적제거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률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률은 그 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 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 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 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 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 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과 계축옥사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 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 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 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 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 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 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 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흔히 '계축옥사'라고 한다.
대북파의 능창군 제거작업

 

신경희는 당시 수안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1615년 그가 양시우, 소문진, 김정익 등과 함께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 는 소명국의 말에 따라 이들에게 역모 혐의가 씌워진다. 그리고 이 때 이들이 추대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능창군이 라는 자백을 얻어내고 능창군을 유배시켜 죽여버린다. 이 때 죽은 능창군은 후에 반정을 통해 왕이 된 능양군(인조) 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능양군이 반정을 도모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북파는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1618년, 5년 전의 계축옥사를 다시 거론하며 이를 빌미로 인목대비를 폐위시켜 서 궁에 유폐시킨다. 이 과정에서 이이첨 등의 강경론자들은 인목대비를 사사시킬 것을 간언하지만 광해군의 반대로 실현에 옮기지 못한다. 이 후 이이첨은 몇 번에 걸쳐 인목대비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다른 대신들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고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은 세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홍길동전'의 대강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세종 때로 주인공 홍길동은 홍 판서의 서자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가상이 뛰어나고 무술이 남달랐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한을 품게 된다. 이에 홍판서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객을 시켜 그를 죽이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길동은 길을 떠나 도적 두목이 되고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 생활을 하게 된다. 홍길동의 의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전 국 각처에서 같은 이름의 도적들이 나타나 어명으로 잡아들인 홍길동만 해도 3백 명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길동을 체포하지 못한 조정은 홍판서를 시켜 그를 회유하기에 이르고 타협안으로 그를 병조판서를 제수하게 된다. 길동은 한때 병조판서를 지내다가 다시 남경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게 되는데, 남경으로 가는 도상 에서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하고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요괴를 퇴치한 후 율도국 왕이 된다. 이 후 아버지의 부음을 전해듣고 일시 귀국하여 3년상을 마친 후 다시 율도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왕으로 살게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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