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면일여(熟眠一如)>
반가사유상(국보제83호)
수행자가 수행방편을 망각하지 않고 계속 일으킴이
행주좌와일여(行住坐臥一如)하고,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하고,
오매일여(寤寐一如)하고,
몽중일여(夢中一如)하게 되면,
다음에는 깊은 잠 속에까지 한결같게 이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공부의 숙면일여라고 한다.
즉, 행주좌와(行住坐臥)라,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항상 변함없이 한결같다는 말이다.
어묵동정일여(語默動靜一如)라,
말을 할 때[語]에도,
침묵할 때에도[默]에도,
몸을 움직일 때[動]에도,
고요히 있을 때[靜]에도,
수행이 한결 같아지는데,
이것을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 오매일여(寤寐一如)라,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같이 여여하다.’는
변함없는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언제나 흘러 통하는 것이어서 본래 무주(無住)임을 말한다.
그리고 몽중일여(夢中一如)라,
꿈속에서도 변함없이 번뇌 망상에 휘둘리지 않고 한결같아 화두 일념이 여전하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
영겁토록 잊지 않은 생사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이고, 참선은 화두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숙면일여(熟眠一如)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제8 아뢰야 위(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제8 아뢰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돼도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하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함은 못 된다.
그러므로 아뢰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 위(位), 진여 위(位)에서의 숙면일여가 돼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된다.
※분단생사(分段生死)---생과 사를 서로 떨어진 분단(分段)의 세계로 생각하는 생사관이 분단생사이다.
분단생사관에서 보자면 생사가 서로 격절돼 있어서 죽음은 엄청난 공포이다.
범부의 생사관은 바로 분단생사(分段生死)이므로 생로병사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변역생사(變易生死)---생사가 서로 격절된 세계가 아니고 단지 몸만 바뀌어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생사관이다. 생사가 서로 연결돼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라고 생각하게 된다. 생로병사는 춘하추동과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뢰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돼도 결코 죽음으로 인해 다시 매하지는 않는다.
영원토록 퇴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뢰야 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 위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다.
오매일여도 여래 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뢰야 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은 것과 흡사하다.
숙면일여라고 해서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로부터 대종사(大宗師), 대조사(大祖師)치고 실제로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멸(識心分別)이라,
앎에 분별과 차별을 하므로 앞 못 보는 영혼에 불과하다.
장님 영혼이 돼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 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된다.
중처변추(重處便墜)라,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자기의 자유가 조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이라 한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으니,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한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 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이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것 같아도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해 아무 소용이 없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동정일여(動靜一如) 즉 일상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 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여불변(如如不變)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 짓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잠이 푹 들었을 때도 여여한 것을 숙면일여(熟眠一如)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성철 스님
중국 송나라 때였다. 소동파(蘇東坡)의 동생이 시골에 살았는데, 하루는 성 밖에 나가서 운문종(雲門宗)의
오조(五祖) 계(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에 형인 소동파가 오는 것이었다.
그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 아홉이었는데 계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 년이 되던 때였다.
오십 년 전 그의 어머니가 소동파를 잉태했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했다. 그가 바로 계 선사였다. 계 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었다. 소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사실로써 소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알게 돼,
동파는 자기 자신을 계 화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소동파는 비록 유학자였으나 불법에 통달했었고,
실제로 불법을 깨치려고 노력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계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는 많았지만 실제로 깊이 깨치지는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워져버린 것이다. 실제로 옛날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 되고,
영겁불망이 표준이 돼 수도하고 법을 전했지만 계 선사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몇 달 전 어느 분으로부터
“화두를 참구해서 차례대로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돼야만 깨닫게
된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가 어떻게 다른 지, 좀 구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언어에는 본뜻이 있고,
그리고 문화에 따라 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동정, 몽중, 오매를 서술하기에 앞서 일여(一如)가 무슨 뜻인지 먼저 규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첫 번째, ‘일여(一如)’란 여여(如如), 진여(眞如)와 동의어로,
일(一)은 불이(不二, 둘이 아닌 하나),
여(如)는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hata)’로 진여를 가리키며,
불이(不異, 다르지 않음. 같음)를 뜻한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변하지 않는 진리, 모든 존재의 본체, 이체(理體)를 가리킨다.
또 만법(萬法)의 이치는 동일한 것이며, 모든 차별상을 초월한 평등한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두 번째, 화두 참구의 간화선에서는 일여를 ‘한결같음’ 즉 삼매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명하고자 한다.
• 동정일여(動靜一如) ― 본래 의미는 일상(動)과 좌선(靜)을 구분, 분별하지 말고(不二) 하나
즉 일여(一如)로 보라는 뜻이다. 이분법적인 사고로 본다거나 둘로 나누어 보지 말고 하나(一如)로 보라는 것이다. 즉, 진여의 세계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간화선에서는 앉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걸을 때도 항상 한결같이(一如) 화두가 참구돼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 몽중일여(夢中一如) ―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꿈속에서도 같다’는 뜻이다. 동정일여와 오매일여가 대어(對語)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을 때, 몽중일여는 불완전명사로, 완전한 명사는 ‘몽교일여(夢覺一如)’이다. 밤에 꿈을 꾸고 있을 때와 낮에 깨어 있을 때가 하나(一如)라는 뜻으로, 꿈도 허망한 것으로 비실재(非實在)이고, 깨어 있는 상태, 즉 현실도 비실재이므로 분별하지 말라는 뜻이다. 간화선에서는 꿈속에서도 항상 한결같이(一如) 화두가 참구돼야 한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 오매일여(寤寐一如) ― 잠자고 있을 때(寤)와 깨어 있을 때(寐)가 ‘하나’라는 뜻이다. 즉 불이(不二) 일여(一如)이므로 분별하지 말라는 뜻으로, 〈능엄경〉에 나오는 ‘오매항일(寤寐恒一)’, ‘오매상일(寤寐常一)’과 같은 말이다. 의미상으로는 숙면일여(熟眠一如, 숙면 속에서도 같다)와도 같은 말이지만, 대어(對語)로 봤을 때 숙면일여는 불완전명사이다. 역시 간화선에서는 자나 깨나(寤寐) 한결같이 화두를 참구하라는 뜻, 즉 삼매의 의미로 쓰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정(動靜), 몽교(夢覺), 오매일여(寤寐一如)의 원래 뜻은 분별심, 차별심을 갖지 말고 하나[불이이리여(不二一如)]로 보라는 뜻이다. 둘로 나누는 것은 중생의 소견으로 분별 망상이며, 하나로 봤을 때 비로소 진여(眞如)와 합일될 수 있다는 뜻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 만법일여(萬法一如)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간화선에서는 이와는 달리 움직(動)이거나 앉거나(靜), 꿈속(夢中)에서도,
그리고 자나(寐) 깨나(寤) 한결같이(一如) 화두를 참구해야만 깨닫게 된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화두를 참구해서 먼저 동정일여가 돼야 하고 그 다음에는 몽중일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매일여가 돼야만 비로소 깨닫게 된다고 하여 단계적, 경지적(境地的)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리고 오매일여를 낮에는 물론이지만 실제 밤에 깊은 숙면 속에서도 화두가 참구가 돼야
한다는 해석은 과잉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