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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분들하고 인사 나눠볼까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지금 목소리가 약간 약간 아주 이렇게 어떤 소리에 약간 갈라져요. 그래가지고 지금 소리를 조금 조용히 내고 있으니까 양해해 주시고 귀를 조금 더 쫑긋 세워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기도 많이 해주셔가지고 정말 은혜 가운데 안전하게 수련회가 잘 마쳤습니다. 수련회 중간중간에 비가 엄청 많이 올 때가 있었잖아요. 근데 기가 막히게 아무튼 저희들이 일정 진행하는 가운데는 큰 피했고요. 또 속초 쪽에 갔는데 그쪽은 바람이 또 어제 어마어마했어요. 그래가지고 야외 공간 사용 못하게 막 처음에 막고 막 그럴 정도로 여기서 이렇게 우리 같이 시간을 보내도 될까 싶을 정도였는데 차차 바람도 잦아지더니 오후 시간이 좀 충분히 아이들이 교제하고 그렇게 올 수 있는 그래서 안전하게 모든 환경들을 주관해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8개 교회가 연합했는데요. 규모가 좀 있는 교회도 있었고 작은 교회들도 있었지만 함께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또 말씀으로 하나 되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연약함들이 왜 없었겠어요? 오랜만에 또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작은 장소에서 이렇게 모이다 보면 화장실도 불편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거리도 안 맞을 수도 있고 다양한 그런 상황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잘 견디고 또 그 가운데 또 은혜를 누리면서 요근래에 제가 이렇게 아이들이 막 그렇게 찬양할 때 함께 기쁨으로 뛰며 찬양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하나님이 붙여주신 작은 불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붙여주신 그 작은 불꽃들이 우리 가정에 우리 공동체에게 우리 지방에 확장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들 그러한 일을 위해서 더욱더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지금 좀 우리가 깊숙이 보려고 하는데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손자는 누굴까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러니까 야곱의 손자죠. 야곱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정통성을 있게 한 아들은 넷째 유다입니다.
여러분 유다가 왜 구원의 정통성을 잇는 넷째인데 왜 넷째가 그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요? 유다의 행실이 형제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유다는 그의 며느리가 창녀인 줄 알고 동침할 정도로 부도덕한 그런 면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짓밟는 어쩌면 패륜을 저질렀던 사람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를 잇는 그러한 신앙의 선조로서 하나님이 이 유다를 선택하셨을까 어떤 이들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12 형제 중에 가장 궂은 일을 앞장서서 했던 사람이 유다였기 때문에 유다를 택하신 것이다. 물론 훌륭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25장 21절에 보면 쌍둥이가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 리브가의 대 속에서 막 이렇게 같이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유다의 아버지인 야곱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하셨습니다. 아직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 사람들 앞에 어떤 선행이나 또는 부지런한 어떤 모습을 보이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라든지 유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는가라고 하는 그 이유를 우리가 딱히 뭔가 설명할 길이 별로 없습니다. 또 2천년 전 예루살렘에 얼마나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을까요? 그 여인들 가운데는 미모, 지성 또 덕을 겸비한 여인들이 참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인간으로 오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변방에 아주 빈민촌에 생활하던 나사렛의 마리아를 택하시고 그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산하셨습니다. 왜 마리아를 택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께서 행하셨다 가르치셨다고 하는 말씀을 했는데, 세 번째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사도들을 택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 친이 당신의 사도들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 제자들도 면면을 살펴보면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갈릴리의 아주 비천한 어부 출신들이 대부분이고 또는 매국노로 지탄을 받고 멸시받던 세리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어부와 세리만 사랑하셔서 그들만 있어서 그들을 택하신 게 아닙니다. 그 갈릴리라고 하는 호수는요 바다라고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기 때문에 많은 어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세리를 두어서 세금을 걷게 했거든요. 그러니까 세리도 어느 곳에든지 존재했습니다. 근데 하나님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12 제자를 딱 선택하셨어요.
왜 그들만 선택하셨을까? 12명 우리는 그 까닭도 분명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핍박하고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며 죽이며 그 열심을 냈던 사도바울 그를 신약의 주인공으로 선택하신 그 이유와 목적도 우리가 뭐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만히 우리 자신을 둘러보면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먼저 부르시고 나에게 믿음 주셔서 내가 신앙을 갖게 하신 그 이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아서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우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리가 뭔가 잘라서 우리가 먼저 택함을 받았을까요?
어쩌면 우리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는 겸손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먼저 이렇게 택해 주셨다는데 그 뜻 그 은혜가 뭐냐?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신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예수님의 대적이었던 자신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택하셔서 사도로 삼으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말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그 뜻이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델레마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 말은 소망하다고 하는 의미의 델로라고 하는 말에서 파송됐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뜻 그 뜻은 소망, 믿음하고 연결돼 있습니다.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은 별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명처럼 늘 함께합니다. 믿음이 소망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소망의 다른 이름이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특정인을 선택해서 하나님이 부르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여기의 의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바라보는 믿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믿음이다.
여러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요. 여러 개가 있을 때 선택한다고 그러지 한 개만 있는데 선택한다고 하지 않잖아요. 여러 개가 있는 중에 우리는 그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라고 할 때 선택한다는 말을 합니다.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선택하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야 되는 거죠. 포기하는 게 있어야 되는 겁니다. 단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나머지를 주저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 그게 바로 선택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선택한 이 하나가 나머지보다 훨씬 더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내가 볼 때 더 낫다라 여기기 때문에 이걸 선택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옷 가게 갔을 때 옷 가게에 진열돼 있는 옷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근데 여러분들이 그 옷가게에 있는 옷을 다 나한테 마음에 든다고 다 골라가지고 나오는 분들이 계시나요? 아주 부자들은 그렇게도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싸주세요. 이렇게도 하는 분들이 계시다는데요. 대부분은 그중에 고르고 고르고 입어보고 입어보고 그런 중에 나한테 잘 맞는 가장 잘 어울리고 내 형편에 제일 잘 맞는 옷을 하나를 딱 고르고 가지고 나옵니다.
여러분 그럴 때 누군가가 왜 하필이면 그 색깔 옷을 골랐냐 왜 그 가격의 옷을 골랐냐 왜 그 옷을 선택했냐 이게 더 좋지 않느냐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친한 사람들끼리는 그런 말들을 가끔 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누군가가 그거를 심도 깊게 결정을 했다면 무슨 이유가 있다고 하는 분명한 이유를 우리는 알죠.
그 옷을 구입한 사람의 형편과 그 기호에 따라서 자신이 볼 때 이게 가장 적합하다. 그럴 때 그걸 고르는 거예요. 선택하는 거죠. 이렇게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가 뭔지를 좀 더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요. 우리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먼저 선택해 주신 이유가 무얼까? 우리에 대한 신뢰 소망, 믿음이 있다는 겁니다.
왜 야곱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 속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을까 왜 며느리와 동침할 정도로 패륜아의 삶을 살았던 유다를 선택하셨을까 왜 달동네 나사렛에서 빈민으로 살아가고 있던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로 택하셨는가 왜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과 지탄의 대상이었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왜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못한 연약한 나를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가 그 답은 지금 이야기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뭡니까? 야곱을 믿으셨고, 또 유다를 믿으셨고, 마리아를 믿으셨고, 제자들을 믿으셨고, 바울을 믿으셨고, 형편없는 죄인 같은 우리를 믿으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먼저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늘 우리는 중요시합니다. 신앙은 믿음에 따라서 성장한다고 우리의 믿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요.
근데 여러분 물론 우리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믿어줬다는 그 사실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더러운 나 같은 인간을 믿어주지 않으셨다면 나를 위해 예수님을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시기까지 하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믿어주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놓으며 그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이전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시고 우리에 대하여 소망을 품으시고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가 믿음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기 전에 우리를 믿어주신 우리에게 소망을 품어주신 그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다.
여러분 믿음에 대한 좀 더 다양한 폭이 넓어지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믿음의 유일한 토대는 먼저 나를 믿어주시고 나에게 소망을 품어주시고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주님의 은혜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믿겠습니다. 아멘 거기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도를 택하셨습니다.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사도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사도라는 말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라는 의미를 가지고도 있지만, 사도라는 말은 세상에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도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이 세상 가운데 주님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하는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여러분 사도는요. 원어적으로 아포스톨로스라고 하는 보낸다고 하는 말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보냄 받은 사람을 사도라고 해요. 우리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가는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사도야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도라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사람의 뜻을 붙들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가는 사람을 사도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도 이 시대에 사도로 하나님이 택해 주셨습니다. 사도는 뭐라고요?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품고 그 메시지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사도라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말씀에서 잠깐 나누었던 것처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 안에서만 신앙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쫓아 살아가는 것, 그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 그게 바로 사도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말을 쓰는데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근데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이요. 처음 신앙인들이 부르기 시작한 단어가 아닙니다. 신약이 쓰여지기 천 년 전부터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썼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여러 도시에 에클레시아들이 있었어요.
근데 이 에클리에시아는 원래는 도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났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또 같이 의논하고 또 뜻을 모으는 시민들의 대표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민회 공의회 이런 말로도 불리기도 했습니다.
근데 단순히 그렇게 세상에 있던 에클레시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어떤 논의 기간으로만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말을 썼다는 거예요. 교회를 향해서 사람들이 당시에 사람들이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모임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 이미 있었다고 했으니까. 근데 아니 분명히 여기 사람들이 에클레시아 모임이라고 하는데 자기들이 알고 있는 에클레시아의 기능이 아닌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고 자기들을 이야기하면서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반문합니다. 저의 클래시아는 도대체 뭐 하는 집단이야? 아니 듣도 못한 하나님의 클래시아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라고 모임을 갖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그들은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영향력이 사람들에게 확장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주님의 믿음에 의한 일반적인 선택 그 선택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내가 뭔가를 잘해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 주셨고 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구원의 문을 우리는 들어오고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로서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을 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예요.
2002년 여러분들 머릿속에 기억나는 큰 이슈가 있었죠. 2002년 벌써 2002년이 20년이 지났어요. 시간이 우리 다들 빨간 옷 입고 월드컵을 응원했던 그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렇죠 근데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을 했을 때 나라가 뒤집혔죠. 막 상상도 못한 일 전대미문의 기록이 이루어졌습니다. 앞으로 이 기록이 또 깨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죠.
근데 이 기록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 누구냐면 그 당시에 히딩크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심히 뛰었던 태극 전사들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우리나라의 감독을 마치고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으로 갔을 때 우리나라 이영표 선수가 이제 그곳으로 가서 또 명성을 알리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이영표 선수가 선수로 뛰던 중에 돌아왔을 때 도대체 2002년 월드컵 그때 그렇게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 비결이 도대체 뭐냐라고 이영표 선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이 이영표 선수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프로 선수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최선을 베스트를 다하지 않는 경기를 치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내 기량을 넘어선 투혼으로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평생 자기가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프로 선수라면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어느 정도 사람들의 눈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가지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자기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혼을 발휘하는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월드컵은 모두가 후자 자기의 기량을 뛰어넘는 초원을 발휘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히딩크 감독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믿음 히딩크 감독이 먼저 믿었어요. 그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너희들은 할 수 있다고 그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선수들은 자신을 믿어주는 그 감독에게 그 감독의 그 믿음에 부응하고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투혼을 발휘하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한국 축구에 말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이룬 겁니다.
여러분 이런 스포츠 경기에서도 이런 믿어주고 그 믿음에 대한 부응으로 이런 투혼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한다면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시고 우리를 사도로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시고 우리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에 대한 소망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면 우리가 그 믿음에 응답하여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삶에 정말 우리의 에너지를 다한다면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역사들은요. 그 당시에 믿음의 사람들이 투혼을 발휘한 역사예요. 죽음을 각오하고도 막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사자굴에 들어가더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선포합니다. 왜요?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들에게 소망을 품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함으로 그들은 투원을 발휘했다는 사실입니다.
양화진 건너편에 절두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절두산은 대원군이 그 언덕에서 1만 명의 천주교인들이 머리를 잘라서 절두산이 되었습니다. 이 절두산 성지에 꾸르실료 교육관 지하 입구에 이렇게 큰 현관판이 있는데 거기에 글귀가 뭐냐면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기록한 문구를 그렇게 딱 붙여놨네요.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연약한 미물에 불과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믿어주고 계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놀라 영광스러운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주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격려와 소망이 있을까요? 제가 우리 동역자들을 양육하는 과정 속에 어떤 군인 동역자의 이런 이야기를 들어봤어요. 저는 사병이었기 때문에 별 달고 있는 사람을 거의 만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있는 부대에 별 한 개만 와도 부대가 발칵 뒤집혀요. 청소부터 해서 페인트 칠, 잡초 제거까지 온갖 일들을 다 하는데 이분은 보니까 장교 출신이기 때문에 포스타까지도 같이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근무를 하는 일을 했대요.
근데 여러분 포스타 하면 우리가 그냥 지금은 솔직히 공청회 공문회 막 이런 데 나와가지고 막 질책받고 이런 대상자가 되어버렸지만 솔직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근데 그 존재가 만약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거 정옥아 그냥 지나가는데 유정옥 병장 아니 유정옥 대령 이렇게 불러주기만 해도 나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내걸 정도로 충성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상상이 되시나요? 여러분들은 그 정도 군 생활 안 해봐가지고 잘 모르시겠죠? 여러분들이 직장생활을 하는데 말단 지금 직원인데 사장이 지나가면서 노효철 사원 오늘 멋있어요. 조그만 구멍가게가 아니라 대기업이에요. 근데 만약에 그런 나를 알아주고 나를 인정해 주는 그 사장 회장 옆에 있다면 어떻겠냐고요. 어깨가 으쓱하면서 그냥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신대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너무나도 큰 격려가 되고 소망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믿음에 응답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변함없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실 줄 믿습니다.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그 축구 감독의 그 작은 믿음이 선수들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그들이 그 믿음에 반응하여 투혼을 발휘했던 것처럼 이 천지만물을 움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주신대요.
우리에게 소망을 품고 계신데요. 여러분 그 믿음과 소망에 반응하는 우리가 될 때 이 시대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 사도행전에 일어난 이 역사가 신 사도행전의 역사가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 이 시대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시니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러분 이 말씀을 믿기를 원합니다. 이 저녁에 이 말씀을 붙들고 여러분 우리가 믿기 전에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기 전에 먼저 나를 믿어주시고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그리고 나의 삶을 책임져주실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일들을 통해 신 사도행전을 써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