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올린 글들을 보게되면 자주 "法을 본다. 法을 파악한다" 이런 언급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된다. 붓다의 가르침에 있어 깨우침 혹은 깨달음의 내용 중에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法' 이라고 본다.
붓다가 지적하신 이 포인트를 알게 되는 것이 이 한 生을 사는 진짜 의미이고 이 앎이 세상에서 수 조원의 재산을 얻은 가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도 누구 한사람도 '당신이 전달 하고자 하는 그 法이라는게 대체 뭐요?' 라고 묻는자가 없다. 나는 항상 이것이 의문이었다. '왜 묻지않고 삶의 길을 무턱대고 가기만 하는걸까?', '왜 죽는 그 순간까지 알지 못한 찝찝한 상태로 죽음으로 빨려 들어갈려고 하는가?', '왜 삶을 낭비하고 있나?'.
간단히 정리 해 본다. 法을 모르는 상태는 의식의 구조를 모르는 상태다. 의식의 구조를 모르면 매 순간 의식이 흐를 때 혼란과 모순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상처난 의식은 心의 손상을 가져온다. 心은 죽음으로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 병 들고 피폐해 진다. 이것이 노년에 맞이하는 生의 절벽이다. 그런데 우리의 身은 名身과 色身의 복합체다. 色身은 정신과 관련맺고 있는 물질작용 덩어리, 名身은 물질적 육신과 관련맺고 있는 정신작용의 덩어리. 죽게 되면 色身은 곧 부폐하여 우주 먼지로 사라진다. 그러나 名身은 사라지지 않고 미지의 다음 차원으로의 환원과정을 맞게 되는데, 여기서 피폐해진 心의 상태는 '에너지 보존법칙'에서 말하듯 저열한 다음 차원의 재료로 전이 된다. 이 저열한 재료가 우주 재활용 쓰레기 이고 이러한 쓰레기 생산의 원인이 되었던 前法은 그와 연동된 後法의 차원을 맞게 될 것이다.
물론 붓다가 지적하듯 法을 알지 못하고 名色 만을 보면서 평생을 살 수도 있다. 그러한 무지의 코스트는 살면서 '苦'로 지불하면 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삶이 주어진 것은 그러라고 주어져서 세상이라는 차원에 보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붓다의 말씀이 있는 경전을 인용하며 마무리 하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자나 梵行者라도 생겨나는 想을 곧바로 버리고, 멀리하고, 제거하고, 없애지 않으면 그는 현세에 이미 苦와 절망과 열뇌를 지니고 괴롭게 지내게 되며, 身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불행한 것이 그를 기다린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어떠한 수행자나 梵行者라도 생겨나는 想을 곧바로 버리고, 멀리하고, 제거하고, 없애버리면 그는 현세에 이미 苦와 절망 없이 행복하게 살게되며, 身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는 훌륭한 곳이 그를 기다린다.... " [Sn. vol.2. p.p.152~153]
나는 이 지점에서 흔히 얘기하고 있는 '윤회와 전생' 혹은 종교적 차원에서 말하는 '지옥과 천국' 등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붓다의 통찰을 신뢰하며 붓다의 法을 통해 이 삶에서 검증된 심해탈과 혜해탈의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하며 이는 누구든 수행이라는 경험의 차원에 동참하면 알 수 있는 자명한 사실 임을 천명하고자 할 뿐이다.
경전에 나오듯이, 붓다께도 法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覺)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顯現(나타남)했다 라고.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 주제라는 의미 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글에서는 '法을 본다 혹은 파악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나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 아주 쉽게 한번 설명해 보고자 시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