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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맑스주의 고전읽기] 시간에 제기된 문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혹은 ‘구분되어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 그러해야 하는가’라는 것은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어제 이야기했던 ‘안다는 것’(인식), ‘불가지론’, ‘상대주의’ 등등에 대한 참고 자료 올려둡니다. 2015년 [고전읽기] 시간에 발표했던 글입니다.
이데올로기와 이론
1
지마에게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말끔하게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이론은 상호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오직 언어적⋅술화적 차원에서 성립하는 변증법적 상호관계와 대립성을 고려함으로서만 적절히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는 “이론이 ‘이데올로기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즉 이론의 주체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이해관계와 대결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이 표현되어 있다.(94) 지마는 하버마스나 아펠과는 달리 가상적인 “이상적 발화상황”을 가정하지 않고 “개별적 차원에서까지 집단 언어들, 즉 사회어들이 충돌하고 있는 실제의 사회 언어학적 상황”(26)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또한 “다양한 사회어들은 모든 개별적 술화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얻는 동시에 이들에 의해서 개인과 사회 집단들이 주체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어의 존재를 해석학이나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중지로 중립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26)고 파악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다. 지마는 이데올로기와 이론을 구분하되 양자의 본질적 관계를 간과하지 않으며 지마에게 이론은 “자신을 낳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부정”2)이다.
지마는 이론에게 과학(진리)을 가능하게 하는 지위를 부여하려한다. 지마는 진리개념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진리를 적극적으로 정의하지도 않는다. 지마에게 진리는 “부정적인 것, 즉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론과 진리를 구분한다. 이데올로기는 진리가 자기 수중에 들어 있다고 착각하는 반면에 이론은 진리 개념을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피안으로 옮겨 놓는다. 이론은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착각 속에 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론이 진리인지 착각에 불과한지는 사회적인 갈등 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밝혀지고 드러날 뿐이다. 즉 진리는 부단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며 지마에게 그런 검증의 과정은 이론과 실재의 대비를 거쳐 자신이야말로 유일한 진리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이론들 간의 비판적 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진리를 말하려는 순간 이론들은 이데올로기적 갈등 상황에 휩싸이게 되며 자신의 이론만이 유일한 진리인양 선전하며 자신과 다른 이론(異論)에 대해서는 귀 닫고 자신과 다른 진리는 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억압하기도 한다. 이론의 존재 이유가 진리를 밝혀 드러내는 일이라고 한다면 진리를 밝히는 일을 방해하고 억압하려 드는 술화에 대해서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해 보인다. 진리 내용에 대한 논의 이전에 진리 자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목숨을 걸어야만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 자체가 이미 진리 내용의 일부일 수밖에 없으며 이론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해진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서 갈등을 넘어 목숨을 건 충돌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포기하게 되는 일부 이론들과 달리 지마는 진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마는 갈등과 충돌의 현실 상황 속에서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하며 “공동의” 진리의 가능성을 이론의 노력에 열어두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대한 지마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진리를 밝혀 드러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이란 “한편으로는 진리라는 목표점이 존재하지 않는 열린 과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관한 생각에 의해서만 추동되는, 즉 이 생각이 없다면 전혀 무의미해져버릴 과정”인 것이다. 과학으로서 진리를 추구할 때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진리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때 진리의 가능성은 커질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이론이라면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못 하도록 방해 받더라도 계속 진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2
지마에 따르면 이원론적 술화는 이데올로기이다. 현상과 개념들의 중의성(重義性)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방해하며 어떠한 양가성도 허용하지 않는 양자택일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442) “애매함⋅양가성⋅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까지도 배신자로 낙인찍고 규탄의 대상이 된다. 즉 ‘우리 편이 아닌 자는 우리의 적’이다.”(428) 지마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이분법들이 현실적 억압을 위한 형이상학으로 군림하는 것을 폭로하고 그 대립 항들의 불가분한 관계에 주목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이분법에 대한 거부를 해방적 실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분별한 추상이다. 구체적인 개별 상황에 따라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애매하지만 똥인지 된장인지, 우리 편인지 적인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을 편들지 않는 이들은 적으로 규정하고 살인적인 폭력을 일삼기도 한다. 그들에게 당하는 자들이 이분법을 포기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당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력 또한 현실 구성의 한 요소라고 이해하고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선별적으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이분화 된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당하는 입장에서는 폭력적인 세력과의 이분화 된 관계를 명확히 드러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당하는 자들은 우리 편과 적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당하는 자들끼리 서로 적이 되거나 다수의 당하는 자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기득권 세력의 편에 서려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 편과 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편이 누군지 적이 누군지 구분조차 못하는 것이 더 문제로 보인다.
소설가 박민규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95%의 노동자들이 0.5%의 자본가들을 지지하는 이유는 ‘자본가들을 부러워하고 노동자인 자신들의 처지를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자들을 착취⋅억압하는 구조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본권력의 사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판단된다. 칼 맑스는 자본가-노동자라는 이분화 된 관계를 넘어 계급 자체가 없는 사회를 위해서 노력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으로 이분화 된 세계는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이분화 된 세계를 고정불변의 영원한 질서로 받아들이는 사고는 이원론이다. 지마는 현실의 여러 현상들 및 그 현상들과 주체의 상호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할 때 이론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계급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변화해 왔고 변화해 갈 수 있는가라는 역사적⋅사회적 관계를 역동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개입함으로써 주체의 의식을 결정하는 현실구조가 바뀌기도 한다는 사실 또한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상태가 지양된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이들이 우리 편에서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계급 없는 세상이 되어도 그런 세상에도 우리 편과 적은 존재할 것 같다. 완전하고 완결된 세계는 환상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환상이 서로를 적으로 내 모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환상을 꿈꾸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 또한 변증법적 부정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겠다. 과정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욕심처럼 보이는 환상을 버릴 때 그런 세상이 되어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 우리 편만 있는 세상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 편과 적으로 말끔하게 분리하려는 태도보다는 어떻게든 구분의 선을 희미하게 하려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우리 편은 아니지만 굳이 적도 아닌 관계도 존재할 것이며 중요해 보인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내일을 위한 시간(One night, two days)』에서 내가 받는 보너스가 동료의 해고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이야기한다. 보너스가 동료의 해고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자본가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존속할 수 있다는 착취구조를 보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의 일면만을 보게 되는 셈이다. 동료의 해고 없이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갑을관계에 대한 바람이나 아예 갑이 되어 을과의 관계를 달리 바꾸어 보겠다는 바람을 가져볼 수도 있겠다. 궁극적으로는 착취구조 자체가 해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착취 없는 구조를 만드는 일은 그런 구조를 만들려는 개인들 없이는 힘들다. 몇몇 소수가 그런 구조를 만드는 것은 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소수를 위한 구조로 변질되기 쉽다. 그런 구조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개인들이 더 많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개입함으로써 그런 구조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어떤 식으로든 직접 개입해서 경험해 보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 곳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구조를 직접 만들어가는 개인들의 다양한 시도들은 소중해 보인다. 그것은 자율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제도와 정부를 우리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산드라는 해고를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지 않고 동료들을 만나 보너스 대신 자신을 선택해 줄 것을 동료들에게 호소한다. 어떤 형태든 스스로 함께 상황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은 시멘트 벽 처럼 보이는 현실에 균열을 만들어 냄으로써 변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원론은 사회의 여러 현상들 및 그 현상들을 파악하는 주체 양자를 분리하고 고정시켜 현상들의 관계와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며 그 모든 일들이 마치 나와 상관없는 듯한 태도를 갖게 만든다. 그렇지만 양자의 분리가 아니라 구분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며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되 다른 한 쪽을 최대한 배제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해 보인다. 양자택일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자칫 이원론의 비판이 양비론이나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함으로써 양자의 존재 모두를 부정하게 되는 냉소를 낳을 수 있다. 오히려 양자 중에 어느 한 쪽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태도야말로 양자의 가치를 모두 인정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3
“이데올로기는 대부분 최종 목표에 조준되어 있다”는 지마의 말은 옳은 것이지만 목적론적 술화가 곧 이데올로기적 술화라고 정의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학술적으로 제도화된 이론적 술화들도 목적론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마는 하버마스의 논문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과학」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 논문은 이미 제목에서 논리 전개의 방향, 즉 기술과 과학은 이데올로기적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 미리 목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론적 목적론과 이데올로기적 목적론을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마에 따르면 양자의 본질적 차이점은 이론적 술화의 이론가가 자기 개념과 정리들의 가설적⋅발견술적 성격을 인정하는데 반해 이데올로기적 술화의 이론가는 그 개념과 정리들을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선전한다는 데에 있다. 즉 “진술 주체는 정의하고, 분류하고, 이야기함으로써 하나의 현실을 구성”(633)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현실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의 현실, 때로는 수백만의 현실이 되기도”(634)한다. 또한, “이데올로기, 사회과학, 문학, 종교, 철학의 대상이 정의⋅분류⋅서술을 통해 비로소 구성된다는 사실”(386)이 간과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현실의 이론적 구성,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이데올로기라는 자연주의적 술화를 통해서 현실 자체로 되어버린다”(633) 지마 거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사회어(Soziolekt)는 이처럼 “권위적이고 공허한, 어떤 종류의 비판에도 무감한 술화들을 양산해왔다.”(464)고 밝힌다.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세월호의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정부가 그러한 부모들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해도 모자랄 판에 자식 잃은 부모들을 더 많은 보상금을 받으려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가고 다수의 언론을 통해서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선전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이제 그만하자”라며 유가족들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는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국가기관과 다수 언론의 술화들은 진리를 말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며 국가기관과 다수 언론이 말하고 있는 현실이 마치 모두의 현실인 양 말하는 자기반성 없는 자연주의적 술화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주의적인 술화와 진리를 말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 못지않게 자기반성 없이 그들의 술화를 그대로 옮기는 술화 역시 문제적으로 보인다. 국가기관이나 주류 언론이 선전하는 현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반성 없이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정부 관료나 주류 언론이 “자식 잃은 슬픔은 가슴에 묻는 것”이라고 하면 그렇다고 생각해야 하며 국가가 하는 일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나쁜 일, 혹은 빨갱이 짓이라고 몰아가는 권위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런 반성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권위에 눌려 사태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지는 것조차 힘든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이론은, 대중들은 떠도는 술화들의 진위를 묻지도 따져 보지도 않고, 즉 술화들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려는 노력 없이 국가기관과 주류 언론이라는 지배적인 술화에 지배당하기 십상이다. 이론들이 적극적으로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마치 자신들의 술화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선전하는 국가기관과 언론의 술화들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이론이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며 현재까지 드러난 것이 진실인지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보다 오히려 사태를 덮어 두려하고 그런 태도에 대한 비판에는 권력과 권위라는 방패로 귀 막음으로써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독백은 이데올로기이다.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과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운 이들이 있을 뿐 자신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아니 진실일지도 모르는 그 누군가의 우연적인 진실에 대해서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야말로 이데올로기적 술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론이 진리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술화들과 실제 사태와의 일치 여부를 검증하는 일이지만 있었던 그대로의 실제 사태라는 것 역시 그런 검증 과정 중에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진리에 대해서 말하지 말자고 한다면 진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진리인가. 진리를 왜 알아야 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 역시 진리를 알아가면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진리 자체에 대해서 알아봐야 진리를 왜 알아야하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는지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알아보고 나서 왜 알아봐야 하는지 물어도 늦지 않으며 알아 보다보면 해답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목적론적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이론 혹은 다른 이론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론을 이용할 뿐이다. 즉 이미 이론의 내용을 떠나 이론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론의 내용 자체가 목적론적 구성을 지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앞서 지마의 지적처럼 목적은 존재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목적을 드러내는 과정이 얼마나 현실과 자기 이론 및 다른 이론과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런 반성과 대화가 잘 이루어졌는지는 비판적 대화에 얼마나 개방적인가라는 문제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비판적 대화를 하지 않고 하지 못하는 이론이 독백을 통해서 진리에 이르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런데 그런 독백적 이론이 가능하거나 심지어 그런 이론이 진리인 상황은 존재한다. 반성적 이론이 부재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득권 세력은 자신의 이론이 마치 현실인양 선전한다. 그리고 그 선전에 대해서 이론(異論)이라도 제기 하려들면 공공의 권력을 이용해서 다른 이론을 이데올로기로 만들려고 한다. 국가권력의 이러한 행태가 불편해서 입 다물어버리는 이론은 가능하다. 그럴 경우 대중들은 기득권 세력의 선전을 자연스러운 현실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을 국가와 법을 거스를 만큼 한가한 자유주의자이거나 현실의 패배자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 또한 지배이데올로기의 선전 덕분이겠다. 있었던 그대로의 현실 및 떠도는 술화에 대한 반성이 없는 한 말이 소가되는 현실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맑스의 지적처럼 지배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며 자신의 삶에서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일깨워주기도 한다. 폭력적인 국가를 살아가는 이론가들이 자신의 이론을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생명의 위협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이 만들어 놓은 질서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적 질서로 받아들이고 재 빨리 적응해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술화가 이데올로기인지 이론인지에 대한 판단조차 망설이게 만든다. 그렇다면 목숨 걸지 않고는 이론을 하는 것조차 힘든 곳이 한국이라면 국가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이론은 이론이며 국가기관의 비호를 받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이론은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한국적 상황에 대한 냉소에 지마는 자기반성하면서 비판적 대화를 하라고 말할 것 같다. 힘들지만 필요해 보이는 비판적 대화를 위해서는 모든 실천이 그렇듯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시작하는 수밖에 없겠다. 하다보면 함께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고 그러다보면 더 많은 비판적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비판적 대화 자체에 대한 필요성이나 문제성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4
이데올로기적 술화는 술화의 진술 주체가 자신의 술화와 현실(술화에 의해 다루어지는 지시체)을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마는 이러한 동일화 전략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하나는 진술 주체가 자기 스스로 특정한 신화적 행역자(현실⋅자연⋅신)와 암묵적으로 동일시하여 이 행역자의 대변자로 행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선택한 의미론적 분류법, 행역자 도식 및 이야기 줄거리 등의 특정한 술화 전략을 대상 자체에 내재하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으로 내세운다는 것이다.(468) 지마에 따르면 이러한 “동일성 사유”는 대상구성(Objektkonstruktion)이라는 주객 관계의 본질적 국면을 무시해 버린다. “나는 현재 하나의 가능한 이데올로기 모델에 입각해서 이데올로기적 술화를 가능한 한 정합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때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다른 모델들도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라는 대상이 이 책에서와는 다른 식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468) 지마는 자신이 이 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대한 술화 자체가 하나의 모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진리에 대해 이야기라도 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은 하나의 모델일 뿐이라는 자기반성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모델이 틀릴 수도 있으니 다른 이론들로부터 검증을 받겠다는 자세야말로 진리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곧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검증의 과정은 필요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런 과정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론과 대상이 동일할 수 없다는 정도의 반성조차 힘든 이유에 대한 지마의 의견은 이렇다. “주객관계나 대상 구성의 문제가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가는 이데올로기적 술화의 상대성이 당장에 폭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가는 이 점을 잘 알고 있거나 적어도 그러한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469)는 것이다. 자신의 이론이 틀린 것으로 검증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자신의 이론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발생한다. 나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수 있겠지만 나의 이론이 상대적으로 좀 더 옳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일정한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진리를 위한 대화는 좀 더 용이해 질 것이다. 있는 그대로였던 대상은 주체“들”의 구상에 의해 구성되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고 대상에 대한 나의 이론 역시 있는 그대로였던 대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나와 너, 우리에게 진리가 가능해 지는 시작이겠다. 지마는 “동일성 사유”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는 길은 우리 자신의 술화가 역사적 조건에 따라 형성된 우연적이고 가설적인 구성물임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의 주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음으로 양으로 현실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이론의 주체는 (…) 자신의 이야기가 현실, 대상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구성임을 독자나 청중에게 밝힌다.”(625) 이론가 자신이 동일성 사유를 경계하면 됐지 굳이 청중에게 밝혀야 할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스럽긴 하다. 지마 자신이 앞서 밝혔듯이 이데올로기적인 갈등과 대결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초월적인 위치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청중들을 향한 제스처는 자칫 그런 초월적인 위치를 점하려는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의도했건 안했건 초월적인 태도는 현실변화를 위해 모든 행동을 하려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지만 생각에만 그치게 되는 관념론에 빠져들 우려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인식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인식주체에게 불가피한 태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렇게 제시된 인식의 객관적 가치일 것이다. 인식주체가 절대적임을 표방한다고 해서 그 인식이 절대적으로 타당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현실과의 대질(실천)을 통해 객관적으로 유효한 한에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한히 복잡하고 가변적이며 현실과의 대질 역시 끊임없이 새롭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현실과의 이러한 긴장관계를 견딜 수 없어 절대성에 대한 요구를 실재와 혼동할수록 관념론에 빠질 위험은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성에 대한 요구 자체를 죄악시할 이유는 없다. 그 요구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제시된 인식이 그러한 요구에 부합되지 않을 때, 즉 현실과의 대질에서 부적절한 부분이 드러날 때에는 인정할 부분만 인정하고 부적절한 부분은 비판하고 수정하거나 경우에 따라 폐기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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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에 따르면 동일화 전략은 어떠한 반대도 참고 보지 못하는 독백을 산출한다. 독백은 곧 현실 자체인 것이다. 히틀러처럼 자기를 현실이나 진리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이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어리석고’ ‘뻔뻔스런’자들(예컨대 평화주의자들)만이 자기 생각에 반대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649) 이처럼 독백적 술화는 “반대파의 입을 틀어막는 독재자의 태도와 비슷하다.”(649-650) 이러한 독백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특징을 지니는 술화는 “대상의 인식과 대화를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476)한다. 결국 독백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완전한 현실이라고 자처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을 특정한 술화적 도식 속의 주체로서 동원하고 경쟁적인 이데올로기들의 진리 요구를 제압”(428)하려한다.
한편 지마는 히틀러를 술화 구조의 희생자라고 판단한다. 알튀세르의 견해를 따라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히틀러와 같은 주체를 낳았다는 것이다. 히틀러 같은 인물의 등장은 1차 대전 당시 독일을 비롯한 중부 유럽 국가들의 학교에서 권위적이고 독백적인 술화가 지배적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마는 그러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 술화 간의 대화를 제안하며 그 중에서도 이질 집단 간의 대화를 진정한 대화로 본다. 이질 집단 혹은 술화 간의 대화만이 진정한 대화라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의 거리를 점진적으로 좁혀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독백적인 정의가 지니는 특수성과 자의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질적인 술화 간의 대화다. 이로써 이질적인 대상 구성이 서로 비교되고 대상에 대한 점근적인 접근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650)
그에 반해 지마는 동질 집단 혹은 술화 내부의 대화는 ‘위장된 독백’이라고 비판한다. “예컨대 어떤 이론적 정리(가설)가 정신분석학이나 비판적 합리주의, 또는 알튀세르주의 진영 내부에서 간주관적으로 검증된다고 하자. 이러한 주체 간 검증이 과연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각 집단 내에서 통용되는 근본 원칙을 재확인하거나 기껏해야 다소 변형시키는 데 지나지 않는 사이비 대화, 위장된 독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나는 단일한 사회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이론적 대화(간주관성)란 위장된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이질적인 집단적 입장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진정한 대화의 경우에는 더 이상 간주관성과 같은 개인주의적 기준이 통용될 여지가 없어진다.”(651)
독재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은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다. 대화를 허용하는 것, 말하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태도는 틀린 것이며 봐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술화에 복종하는 이들이 필요할 뿐이다. 정치, 경제, 법, 종교, 언론, 대학 등의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위장된 독백’과 담합을 넘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한다. 이러한 술화구조는 사회 전체가 침묵하도록 강요한다. 해서 ‘이야기 하자’는 요구, 진리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계속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득권자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런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말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 충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시작인 셈이다. 그런 대화의 과정을 생략하고 소수 당하는 자들이 기득권자들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술화를 통해 사회를 바꾸겠다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안타까운 실험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밀폐된 술화의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간다. 동질집단 내에서도 합의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으며 설사 ‘위장된 독백’이라고 비판 받더라도 내 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동질집단 내의 대화가 훨씬 편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굳이 이질집단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역시 진리를 위해서이겠다. 밀폐된 술화는 그들에게 현실의 대체물이자 개인적 집단적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받침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맹목적 광기는 밀폐된 술화에서 경험적이고 대화적인 검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특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론적 술화는 사실이나 사건들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어느 때라도 경험적 검증과 대화적 검증을 허용하는 개방적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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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마는 이론가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요청한다. 1)모든 이론가들은 ‘내가 대변하는 관심(이해관계)과 가치가 나 자신의 술화 구조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자문해보고 이에 대해 성찰하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술화의 이론성은 바로 이러한 연관성을 발견하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데에서 얻어진다.(481) 2)이론의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언어의 이원론에 변증법적인 태도로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의 사회적 언어적 입지와 의미적 통사적 처리 방식을 반성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처리 방식이 우연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이를 열려 있는 대화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론의 주체는 대화를 통한 객관화, 즉 자신에 대한 거리 유지를 통해서 자기 입장의 특수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93)
이론가로서 지마는 자신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반성함으로써 스스로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한 자신의 이론이 사회적 갈등상황의 정도에 따라 적용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가령 자본주의연구회 등에 대한 공안 수사, 어릴 때부터 학습노동에 시달리면서 다른 문화와 가치를 탐구할 수 없는 환경, ‘불온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군대, 가부장 문화 등 한국사회의 다양하고 중첩된 갈등들을 과연 지마가 주장하는 ‘비판적 대화’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다. 지마의 비판적 대화는 갈등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갈등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술화 주체들에게도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중요해 보인다.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현실을 구성하는 주체들은 살기 좋은 현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지마에게도 문제는 진리인 셈이다. “(…) 진리 개념은 잠정적이고 발견술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도 진리 개념이 결코 무제한적 다원주의나 상대주의의 위협 앞에서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리 개념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타자와 이질적인 것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진리 개념의 옹호는 오히려 나의 대화 상대의 타자성을 무제한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타자성만이 나의 자기반성적 태도와 진정한 공동의 진리 추구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지마는 이원론⋅동일성사유⋅독백을 지양하고 변증법⋅자기반성⋅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요청한다. 강요 아닌 무관심이나 냉소 아닌 요청이라서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말하게 하고 말을 들어 줌으로써 말할 수 있고 말을 들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요청을 참고하면서 스스로 해 나가는 과정자체가 이론이게 하고 진리이게 할 것 같다. 진리에 대해 듣고 말하다보면 진리는 드러날 것이다. 지마는 진리를 위해서 함께 이야기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으로써 있는 그대로 였던 대상을 있으면 좋을 대상으로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리를 독점하려들기 보다 함께하려할 때 진리의 가능성은 커질 것 같다. 그게 더 진리일 것 같다. 이론이라면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러려고 노력해야겠다. 그것이야 말로 이론이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다. 언제 이론을 멈추고 행동할 것인가를 미리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구체적인 현실을 부단히 따라잡는 일에 충실할 때 행동하고 실천해야 하는 최적의 순간을 선택하기가 용이해 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