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결혼예식’을 ‘예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 어떤 장례식에 참석하고 와서 -
김택규 | petertk28@gmail.com
‘세기의 천재’,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현대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아직 젊은 나이인 56세를 일기로, 너무도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도 수많은 I T 계의 새로운 것들을 혁신적으로 창출해낸 천재였지만, 그 자신 마지막에는 1층 침대에서 통증 때문에 웅크리고 있다가, 허무하게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였을지라도 자기 수명의 길이를 1인치라도 연장하지는 못했습니다.
천재이건 보통사람이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서민이나, 잘 생긴 사람이건 못생긴 사람이건, 누구나, 그렇게, 때가 되면, 우리 인생은 각자 ‘인생의 종착역’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버스나 기차역(驛)에서, 떠나는 사람들을 전송하듯이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하며, 이 땅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그리고 이 종착역에서의 이별을 우리는 ‘장례식’이라는 이름을 붙여, 장중한 예식을 거행하며 고인을 떠나보냅니다.
한 친구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장례 예식을 집례하기도 하고 또 참석도 해 보았지만, 그 장례식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가지 새로운 면을 보면서, ‘바람직한’ 장례 예식과 그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평소 생각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선, 장례 예식의 용어부터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장례식’ 혹은 ‘영결식’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대체로 ‘장례예배’, 혹은 ‘영결예배’ 등의 용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많은 교회들이 ‘천국 환송 예배’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장례식 또는 장례예배를 ‘funeral Service’ 혹은 ‘burial service’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장례식에서는 대체로 ‘관’(시신)을 앞에 모시고 예식을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주로 ‘funeral service’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러나 시신 없이 할 때는 주로 ‘memorial Service’ 라고 합니다.
미국 연합감리교단의 예배 규범에서는, ‘Service of Death and Resurrection’(죽음과 부활의 예배)이라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service’ 란 용어는 물론 ’예배‘ 혹은 ’예식‘ 둘 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장례 예식’이나 ‘결혼 예식’이 과연 ‘예배’인가 하는 것입니다. 캐톨릭교회에서는 장례식이나 결혼식도 예배(미사)에 속합니다. 그래서 성찬식이 포함됩니다. (물론 생략될 수도 있지만.) 개신교에서도 물론 전통적으로 장례식을 예배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장례식이나 결혼식을 ‘예배’가 아닌, 하나의 ‘예식’으로 보는 경향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엄밀한 의미에서, 개신교 예배학의 관점에서 보면,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예배’로 보기는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1)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2)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받는 것인데, 과연 죽은자의 장례를 위한 예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할수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더구나 ‘천국환송예배’라고 하면, 죽은 자(인간)에 대한 ‘송별’인데, 그것을 어떻게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거나 산자를 위하거나 ‘환송예배’라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가끔 보면, 무슨 아무개 송별예배, 아무개 총회장 취임예배, 졸업예배, 개업예배 등의 용어를 쓰는데, 그런 것들은 예배학적으로 보면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송별식, 취임식, 졸업식, 개업식 등으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따라서 장례식이나 결혼식도 장례예배, 혼인예배라는 용어 대신 단순히 ‘장례예식’, ‘결혼예식’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천주교 신부들이 ‘시국미사’라는 것을 하는데, 그것도 ‘미사’(예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시국을 위한 기도회’라면 몰라도.
다음으로, 우리 한국인들의 장례식에는 ‘설교’ 순서가 반드시 들어가 있는데, 그것은 장례 예식을 ‘예배’로 보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을 ‘예배’로 본다면 설교 순서가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장례식을 단순히 ‘예식’으로 간주한다면 ‘설교’가 꼭 있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참석했던 ‘장례식’에서는, 설교 순서가 없었습니다. 근간에 와서 미국인들의 장례식에서도 거의 ‘설교‘ 순서가 없습니다. 대신 가족들, 친지들의 고인에 대한 ‘증언’(witness), 고인을 기리는 ‘추모의 말’(eulogy) 순서들이 있습니다.
제가 참석했던 그 장례식은 집례목사의 간단한 ‘예식사’가 있은 후, 찬양팀의 멋있는 ‘찬양’(악기 동반)으로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참 의미 있게 보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관한 몇 안 되는 문헌들에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장례식이 슬픔과 애통의 영결식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에 찬, 축복의 예식이었습니다.
2세기 초, 트라야누스 황제의 극심한 박해 때, 소아시아, 비디니아(Bithynia) 지방의 총독이었던 플리니(Plini)는 황제에게 기독교도에 대하여 편지를 몇 번 보냈습니다. 그편지에 “기독교도들은 참 이상한 자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거나 울지 않고 오히려 기뻐한다. 관을 메고 가면서 그들은 계속 노래를 부른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누가 죽으면, 그날이 바로 그가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는 ‘생일’ 날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문화권의 전통 속에 살아 온 서구인들이나 미국인들은, 동양인들과 달리, 장례식에서 통곡하거나 울지 않는 것이 관습이 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참석했던 그 장례식은 한 시간이 채 안 걸려 끝났습니다. 그전에 제가 참석했던 또 어떤 장례식에서는 긴 설교, 여러 명의 한국어, 영어 추도사, 또 한국말을 영어로 통역하고, 많은 음악 순서 등, 수많은 순서들을 포함시켜서, 무려 두 시간 이상을 끌기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장례식은 1시간 이내로 끝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조객들 중 많은 경우는 다만 간단히 조의를 표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일 고인에 대해 더 다양한 추모 및 ‘celebration’ 순서를 갖기를 원한다면 가족 및 가까운 친지들 끼리만 따로 ‘추모식’을 갖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인생은 올 때는 순서대로 오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인생이 길어 보이고, 또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참석해서도, 이런 일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제 갑자기 ‘부름’을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국에서 경제 부문에 신화를 남겼던, ‘왕 회장’으로 불리던 유명한 분은, ‘나는 120세까지 문제없이 산다.’라고 큰소리쳤지만, 결국 86세에서 인생의 종착역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나의 ‘종착역’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준비를 잘하면 그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종착역’에 가까이 왔거나, 혹 가족 중에 그런 분이 있어, 미리 준비를 하시는 분들에게, 혹은 장례식을 주관하는 교역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과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