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먼 곳을 다녀오는 길. 오후 울산공항에 도착하고 택시를 타면 아이들 만나는 시간이 충분하다 여겼다. 아이고. 날벼락이다. 택시가 파업을 한 통에 택시는 눈을 씻고봐도 보이지를 않고. 방향맞는 버스 기다리기를 15여분. 잡아타고 빨리 달리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버스는 제 시간에 맞추어 안전하게 이동했다. 근처 정거장에 내리자 마자 뛰기 시작했다. 땀 흘리며 내달렸지만, 지각하고 말았다.
새로온 친구까지 가지런히 상을 펴고 기다리고 있다. 예쁜 녀석들이다. 지난시간 "사랑이 머꼬"를 공부할 때는 무척 마음이 힘들었는데, 오늘은 왠 일? 즐겁게 따라 온다. 내용을 읽어가면서 한 참 설명하는 중에, 한 아이가 묻는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가 쓰는 거 없습니까?" "어.. 오늘은.... 그냥 글 읽고 .. 대화하면.. 좋겠는데..." "에이, 그러면... 재미 없심더~" 매번 하던 쓰기를 빼놓았더니 허전했던 모양이다. 다음에는 빼지않고 쓰기도 진행하기로.. 하고...
철학이 머꼬?
아리스토텔레스와 행복윤리학
8강 보금자리
희망의 인문학
서양철학에는 큰 양대 산맥이 있어. 관념론(idealism)과 실재론(realism)이야. 관념론은 플라톤으로 시작되고,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출발하고 있어. 플라톤의 눈은 하늘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은 땅으로 향한다고들 말하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야. 마케도니아의 가장 유명한 사람 하면 누가 떠올라? 그렇지. 알렉산더대왕이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궁중의사였어. 그도 역시 알렉산더대왕의 개인교사가 되었고 말이지. 부자간에 대단한 역할을 했던 사람인 것 같아.
아리스토텔레스는 18세 약관의 나이로 아테네로 내려와서 플라톤이 만든 아카데미아에서 20년간 철학을 공부했어. 공부에 매진하던 중 31세의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2세(알렉산더의 아버지)의 초청을 받아 알렉산더의 개인교사가 된 거지. 그때 알렉산더의 나이는 13세. 3년 동안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배웠는데, 헤겔의 말에 의하면 철학적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말해. 반대로 러셀의 경우에는 별 영향을 못주었다고 말하지만 말이지. 아무튼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는 사실이 인상적이라는 점은 부인하긴 힘들거야.
나이 49세 때 아테네로 돌아와서 리시움(Lyceum)이라는 학원을 세워서 12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어. 총 47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철학‧논리학‧자연학‧윤리학‧정치학‧시학을 망라하는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걸쳐 진행되었어. 한마디로 압도적이고 엄청난 학자였던 셈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은 그가 62세의 일기로 죽고서 300년이 지나고 1세기 아드로니쿠스(Andronicus)에 의해 정리되고 재 발간되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와 달리 알렉산더가 죽은 후 아테네인들에 의해 신을 모독한 죄로 사형에 처하여 했을 때, 에우보에아(Euboea)로 도망했어.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함으로 철학을 모독한 아테네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철학모욕의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Ethica Nicomachus에서 윤리학을 다루고 있어.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궁중의사였던 아버지의 이름이야. 사람은 목적을 가진 존재이고, 목적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고 보았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목적인(final cause)이 사람을 행위 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말했어. 최고의 목적이란 ‘행복’이라고 보았어.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란 ‘행복해 지는 것’이라는 것이지.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는 거야. 다른 모든 목적들은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고 주장했어.
행복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데는 크게 이견이 없는 거 같아. 그런데 말이지. 궁극적인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쾌락을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입장이야.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증가시키고 성취함을 통해서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 다른 하나는 물질이나, 쾌락이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어. 인간의 욕망이 밑 빠진 항아리처럼 끝이 없기 때문에, 쾌락이나 재물에 대한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쾌락을 물리치고 욕망의 마음에서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라는 주장이 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채움과 비움이라는 위의 두 가지 행복추구의 길과 구별되는 독특한 행복의 길을 제시하고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고 이야기 해.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란 할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 인간에게는 중요한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하나는 영양을 섭취하는 일과 감각 그리고 이성이라는 세 기능이 있다고 말해. 영양섭취와 감각을 정욕(passion)으로 묶을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인간에게는 정욕과 이성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욕적인 기능과 이성적 기능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피하는 중용적 위치의 상태가 행복이라고 보았어. 예를 들면, 경솔과 비겁의 사이에 있는 용기. 낭비와 인색의 사이에 있는 절제. 무례와 아부의 사이에 위치한 예의 바름을 추구하라고 말해. 정욕과 이성을 조화시킨 상태에서 가장 덕이 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다면 중용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수학적인 중간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중용의 기준은 상황과 처지에 따라서 위치가 바뀔 수 있는 것이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중에 어떤 사람이 하루에 10시간을 공부하고, 다른 사람은 1시간을 공부한다면, 5시간을 공부하는 것이 중용일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야. 여기에서 중용은 평시에 공부를 꾸준하게 하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주어진 상황에 적절하고 적중하도록 행위 하는 것이 중용의 의미가 되는 거지. 이런 중용적 지혜는 선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어릴 때부터 경험하는 꾸준한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어. 플라톤은 지식이 선천적이라고 보았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을 통해서 얻는 이성적 판단으로 중용을 결정하게 된다고 보았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보다, 알렉산더대왕과 야사에 대해 더 관심이 있어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흥미롭지는 않아도, 사랑, 행복, 덕에 대한 이야기에서 우리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짚어주고 싶었다. 행복에 대한 주제답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학이란,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학문인 만큼, 늘 익숙한 내용에도 질문들을 붙여 되물었다.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친구에게, "성공이 뭐야? 어떻게 하는 것이 성공일까?"를 물었다. 애인을 사귀면 행복할 것이라는 친구에게는 "사귄다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질문을 받으면 잠깐 당황한 듯, 버벅거리다가도, 고심하다.. 이래저래... 답변하며 끙끙거리는 것이 귀엽다.
어느새 수업은 끝이나고, 정선생님이 차려내온 맛난 저녁밥상을 받았다. "빨리 기도하이소~ 배고파예~!" "알았어." 기도하기가 무섭게 입안으로 밥과 찬들이 말려들어간다. 식사를 끝낸 후 한 친구가 고민이 많다고, 개인적으로 기도해 달라고 한다. 차분하게 손을 잡고... 하나님께 이야기하듯.. 기도했다. 배웅 나온 녀석들과 포옹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택시도 없고,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달이 밝아 별들이 숨었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