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 대륙 횡단 준비에 힘이 많이 들었지만 이경자(27) 선생과 나정호(51ㆍ휠체어 미 대륙 횡단 준비단) 단장님이 나를 믿어주고 나를 생각해 주는 분들의 마음과 정성으로 마침내 출발하게 되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정강숙(26)선생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12일 아침 해가 떠올랐다.
태평양을 건너 기나긴 장정(長征)의 길을 떠나는 자식이 걱정되어 어머님께서도 오셔서 주무셨다. 그리고 아침 일찍 찹쌀 수제비를 끊여 먹이려고 하셨다. 나는 배탈이 나 몇 숟가락 먹지 못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걸 한 번 더 새롭게 느끼면서 손을 흔드시는 어머님을 뒤로 하고 대구공항으로 출발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권오일 선생님과 해아래집 식구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또 휠로피아 김윤제 사장님도 마중을 나왔다. 해아래집 식구와 김윤제 사장님의 환송을 받으며 LA로 출발하는 비행기에 횡단팀과 함께 올랐다.
12시간이 걸려서 8월 12일 11시30분 LA에 도착했다. 입국 수속을 밟고 짐을 찾아서 나오니 미주한인장애인연합회 파블로 안 사무국장이 회원들과 장애인부모들과 함께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 전동휠체어가 비행기에서 늦게 나와서 오전의 행진행사는 취소되었고 파블로 안 국장은 우리에게 먼저 숙소로 가 있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로텍스호텔에서 연합회 부회장, 장애인 친구, 장애인 부모님들과 점심식사를 한 후 숙소에서 여정을 풀었다.
▶ 8월 23일
오늘 낮부터 정신이 조금 든다. LA 도착 사흘째 되던 날부터 갑작스럽게 시작된 골반 통증은 오늘까지도 계속되어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통증 때문에 병원에도 다녀왔다. 병원에서 X레이도 찍었지만 왜 아픈지 뚜렷한 이유를 대지 못하고 신경성인 것 같다고 했다. 이정남 박사님이 나를 위해 한약까지 지어 주셨다. 그동안 많은 일이 생겼다. 신효철 회장님 등 많은 분들이 찾아오셔서 격려도 해 주시고 후원도 해 주셨다.
이런 고마우신 분들의 은혜를 갚는 길은 우리 팀이 안전하고 건강하고 무사하게 횡단을 성공을 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신효철 회장님 덕분이다. 오늘 저녁 횡단을 하는 데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 네 명이 모두 모여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나는 몸이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일은 일대로 진척도 없다. 겉으론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답답하다.
▶ 8월 25일
지난주에 휠체어를 고치기 위해 왔던 신 회장님 친구 제이씨가 휠체어 조종을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받침대를 만들어 주고 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인디펜던트 리빙센터에서 무리를 했는지 골반 통증이 심해져 남가주대병원에 갔다. 거기서 진통제주사를 맞았다.
▶ 9월 3일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 신효철 회장님을 간호해 주시는 한동희 아주머니가 교회분들과 함께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러 오셨다. 우리가 앞으로 헤쳐나갈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 주시러 온 것이다. 어린 학생들과 자매분들이 오셔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었고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셨다. 나는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우리 대륙횡단팀이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허리와 골반이 아픈 것도 잊을 수가 있었다. 나는 어제도 먹지 못해서 오늘 오후에 밥을 조금 먹고 하도 답답해서 억지로 수동을 타고 동네 한바퀴를 돌고 왔다. 집에 돌아오니 골반 진통이 더 심해졌고 낮에 먹었던 것도 다 토했다.
▶ 9월 4일
괴로워 미치겠다. 아픈 지 20일이나 지났는데도 조금도 낫지가 않는다. 옆에 있는 분들만 더 신경을 쓰게 하고 있다.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남가주대병원에 다섯번째 갔다. 오늘은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했고 X레이 촬영도 다시 했다. 밤늦게 퇴원을 하는데 금발머리 간호사가 아주 친절하게 해 주시고 내가 차 타는 곳까지 나와서 차를 타는 것까지 도와줬다. 이 글을 쓰는데도 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정신이 멍멍하다.
▶ 9월 12일
밤새 잠을 설치다가 새벽 늦게 2시간 정도 잠을 잤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나는 밤에 별별 생각을 다 했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벗어나 엘 몬티, 퍼모나에 도착했다. 오늘은 출발 행사 때문에 늦어져 7시간 운전하여 40마일을 횡단했다. 추석 대보름달 아래서 과일로 간단하게 요기하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힘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힘이 솟는 일도 많았다. 도시들을 지나오면서 많은 미국인들이 기도해주었고 “원더풀, 넘버 원”이라며 격려했다. 조금 전에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러 온 미국인 두 사람이 우리 횡단팀을 위해 기도해 주셨다. 오늘 전동휠체어로 횡단 도중에 골반이 덜 나아서 그런지 골반과 허리가 아프고 목까지도 아파서 통증이 심해서 휠체어를 조종하기가 아주 힘이 들었다.
우리 팀들은 오늘 낮에 잔디밭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달빛을 보면서 과일로 식사를 하면서 소풍 나온 기분을 만끽했다. 그러나 앞으로 경비도 모자라고 차에서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얼마나 고생이 심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 미안하기만 한다.
▶ 9월 14일
팜 스프링스에서 유황온천을 운영하는 마음 좋은 사장님을 만나 이틀 동안 차에서 웅크려 자다가 오늘은 편안하게 쉬게 되었다. 맥도널드 앞에서 8시30분에 출발했다. 레드랜드에서 출발하여 유카피아, 배닝을 거쳐 팜 스프링스에 도착했다. 오늘은 높은 산도 넘고 우리 나라의 시골길과 비슷한 길도 지나왔다. 말이 시골이지 땅이 커서 작은 사막을 연상케 했다. 영화 속에서 보던 사막의 풍력(風力) 발전기도 보았다.
이틀 전에 지나가는 기차를 보았을 때 길이가 매우 길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길 옆에서 지나가는 기차를 보고 칸 수를 헤아려 보니 110칸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 나는 마음 속으로는 미국 땅이 그렇게 크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가볍다. 이제까지 국도로 왔는데 국도가 끊어지고 고속도로가 나와서 본부장님과 정 선생이 다른 국도를 찾다가 길이 없어서 다시 돌아와서 차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안 좋았다. 왜냐 하면 휠체어로 횡단한다고 했는데 차로 고속도로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내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서였다. 차를 타고 잠시 가다가 이 선생이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길을 찾아냈다. 그래서 다시 차로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곳으로 돌아가서 횡단을 계속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1시간쯤 갔는데 그 길도 끝이 나버려 다시 차에 올랐다. 그리하여 밤도 깊었고 길을 헤매다가 팜 스프링스에 밤 9시에 들어왔다.
▶ 9월 20일
화물차 전용 주유소. 총총히 박힌 별빛 하늘 아래 누워서 오늘 하루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주 위험한 하루였던 것 같다. 미스터 잭과 기념촬영도 하고 선물도 받고 전송을 받으면서 길을 떠났다. 출발한 지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2차선 갓길로 가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가 순식간에 나의 전동휠체어를 치고 갔다.
나는 휠체어를 탄 채로 도로 옆의 흙길로 5m나 튕겨 나갔다. 행운의 여신(女神)이 나를 도우셨는지 나는 왼손만 가볍게 상처를 입고 전동휠체어만 부서졌다. 앞에 먼저 가 있던 본부장님도 오시고 경찰과 미스터 잭도 왔다. 나는 사고차 운전자에게 일부러 부딪친 것이 아니고 지나가다가 그런 것이니 전동(電動)만 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고를 낸 청년은 코카콜라 직원이었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전동휠체어가 대충 움직일 수 있도록 수리를 해 주었다.
사고난 직후고 몸도 많이 놀래서 점심 먹고 쉬다가 1시30분에 출발했다. 3550피트 높이의 산을 하나 넘고 보니 산 속에 오트맨이라는 마을이 나왔다. 그 마을은 미국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와 말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아주 순박하게 보였다. 나는 이 마을의 아름다움에 도취가 되어 오전의 교통사고 고통은 잠시 잊을 수가 있었다. 오전에 교통사고로 인해 허리 통증이 너무 심해 내일 횡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방금 전 정 선생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는데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고통을 숨기려고 하니까 더 괴롭고 힘들다.
▶ 9월 30일
오늘은 교회를 숙소로 빌려 휴식을 취하고 정신이 멍멍한 것을 가다듬으면서 이 글을 쓴다.
이 말은 아직까지 쓰려고 하지 않았는데 써야 되겠다. 나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몸이 말할 수 없이 아프고 괴로웠다. 우리 횡단팀이 안 그래도 힘들어 하는데 나의 몸까지 좋지 않은 것을 내색하면 더 신경을 쓸까봐 참았다. 하지만 오늘 새벽부터 참을 수가 없을 만큼 골반과 허리의 고통이 심했다. 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했는데 이 선생이 낮에 자전거를 타고 이일 저일 하느라 피곤할 텐데도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고 피곤한 몸으로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 주었다. 진짜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 또 정 선생까지도 새벽에 일어나 아픈 부위를 치료를 해 주었다. 나 때문에 고생을 하는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내 몸 아픈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데 우리 팀원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심적으로 힘이 드는 것 같다. 골반의 통증이 더욱 심해서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조금도 진통이 가시지 않았다. 통증을 참아가면서 횡단을 했는데 견딜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와서 중앙선을 넘어가기도 했다.
진통제를 먹어서 그런지 저녁을 몇 숟가락을 먹지 못하고 다 토하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정신이 더 희미해지는 것 같다.
▶ 10월 18일
골반 통증으로 횡단을 중단한 지 보름이 넘었다. 몸의 경직이 심해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고통의 연속이었는데 아침 일찍 동방한의원 원장님 내외분이 오셔서 침을 놓아 주시고 무소뿔로 마사지를 해 주신 덕분인지 몸의 경직이 많이 이완되었다. 오후에는 제일한인종합병원에 예약이 되어 있어 진찰을 받으러 갔다. 원장님께서는 일주일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더 이상 무리하면 안된다면서 그렇게 되면 횡단도 불가능하고 한국에 돌아갈 수도 없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도 이해가 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고 시작한 것인데 몸 때문에 포기한다는 것이 내 자신도 허락이 되지 않는다. 하늘이 나의 뜻을 안다면 몸 아픈 것을 다시 재발되지 않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몸이 이렇게 좋아진 것은 이사님 내외분들께서 너무나 신경을 써 주셨기 때문이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 10월 29일
시카고를 출발한 지 일주일이 되어 피닉스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보냈다는 휠체어는 백영훈씨 댁에 도착해 있지 않았다. 피닉스에서 재정비를 하면서 생각해보았다. 경비도 부족하고 몸 상태가 나빠 횡단이 불가능하니 본부장님과 정 선생을 설득해서 귀국하도록 하고 이 선생과 나는 이곳에 남아서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생각했다. 본부장님이 한국에 돌아가서 대책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나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쨌든 나 개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나의 목숨이 다한다고 해도 꼭 성공하고 말 것이다.
▶ 11월 4일
아파트에서 생활한 지 이틀째 되는 어제부터 시작된 골반 통증을 견딜 수가 없다. 오늘도 나는 큰 은혜를 입었다. 한국일보의 차진식 지사장님이 소개해 주셔서 태멘한의원의 임선희 원장님께서 오셔서 하나에 12달러나 하는 금침을 74개나 놓아 주셨다. 원장님은 나를 진맥하신 후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나를 다시 횡단할 수 있도록 낫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나보다도 더 힘든 이웃에게 내 힘 닿는 데까지 돕는 것이 은혜를 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고통이 가시지 않아서 이 선생이 아르바이트를 1시간만 하고 돌아왔다. 처음으로 이 선생이 주급(週給)을 받아왔다. 그것을 보자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 11월 8일
미국에는 날개없는 천사들이 많이 사는 것 같다. 백영은님도 우리를 걱정해 주었는데 오늘은 소꼬리까지 고아서 곰탕을 만드시고 반찬, 음료수, 과일, 아이스크림까지 다 갖다주셨다. 이렇게 세밀하게 우리들을 신경을 써 주신다. 바로 이런 분이 날개가 없다 뿐이지 천사들이다. 임선희 태멘한의원원장님께서 오늘도 오셨다. 오늘은 60개의 금침을 놓아 주시고 인삼, 녹용이 들어간 보약까지도 만들어 오셨다. 내가 태어나서 이런 보약은 처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 보약은 한국에서도 비싸 1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나를, 고국에서 왔고 아프다는 그 소리만 전해 듣고 온갖 정성을 다 들여서 치료를 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침을 맞고 나니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원장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침을 맞은 쪽 왼쪽 몸이 머리에서부터 허리까지 건강한 사람의 몸처럼 느껴졌다. 왼쪽이 솜털같이 가볍고 왼쪽 눈이 더 잘 보이고 왼쪽 귀도 오른쪽에 비해서 더 잘 들린다. 혀와 이빨도 왼쪽이 더 가볍고 시원하다. 새롭게 태어난 것 같고 왼쪽 심장도 더 좋아진 것 같다. 천사분이 치료를 해 주어서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내 기분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지로 그런 것이다.
▶ 1월 23일
원장님께 죄송스럽다. 원장님 형편도 어려우실 텐데 비싼 금침을 자꾸 맞자니 송구스럽기만 하다. 또한 원장님과 모든 분이 염려해 주신 덕분에 걱정했던 비자가 잘 해결이 될 것 같다. 오늘 집에 돌아와 보니 반가운 편지가 와 있었다. 김영각 사장님과 동포 분들이 보내주신 편지였다. 우리를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주신 것도 고마운데 또 큰 돈까지 같이 넣어서 보내 주셨다. 마음으로 빌어 주시는 것도 나한테는 더 큰 힘이고 용기인데 그 어려운 형편에 돈을 보내 주셔서 말할 수 없이 나의 마음이 아프다. 지금 한국은 구정이다. 지난번에 어머님이 아프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올해는 더욱 더 건강하시기만을 구정을 맞이하여 머나먼 미국에서 빌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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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현씨는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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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뇌성마비… 30세까진 방안에서만 지내
최창현씨는 1965년 12월 2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부터 선천성 뇌성마비 증세를 보여 양팔과 양발, 언어 장애가 있다. 뇌성마비 1급 판정을 받았다. 30년 동안 방안에서만 지내다가 1995년부터 집밖으로 나와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쳤다.
1995년부터 대통령과 각 정부기관에 정치에 관한 의견과 장애인 복지 개선을 위한 글들을 올리기 시작, 청와대와 보건복지부, 시청, 구청 등에 장애인 복지 관련 정책 건의를 수십차례 했다. 1996년 1월 1일 장애인 인권 보호 모임인 ‘밝은 내일회’ 모임을 만들어 현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7년~ 98년 복지개선을 위한 1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청와대 및 정부기관에 제출. 1998년 5월 10일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때 장애인 복지시설 에바다 농아복지원의 비리를 고발했다. 중증장애인 공동체가정 ‘극복인의 집’을 운영했고 중증 장애인 배움터인 ‘늘푸른 학교’를 설립했다. 2000년 1월 1일 새천년 맞이 지리산 등정(달궁휴게소에서 노고단 정상까지)을 했고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1999년 10월부터 38일간 휠체어를 입으로 조정하여 1500km 국토 종단에 성공한 바 있다. 홈페이지(www.where.co.kr/hy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