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종의 2대조인 혜가는 12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났는데, 80세가 넘었을 때 의발을 미리 제자 승찬에게 전수하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 머리를 기르고 저잣거리에서 살았다.
제자가 "스승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으니 , "나는 환속해서 전생의 업연을 정리하고 가야 한다. 그런데 나의 전생의 업보는 내가 남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야 풀리게 되어 있다. 승려의 신분으로 있다가는 교단에 누가 되고 해서 방편법으로 이리하는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실제 그는 예언대로 훗날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반역죄로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아 세상을 하직하였다.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중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도교(道敎)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인해 북주(北周) 무제(武帝: 560~578) 시대에 법란(法亂: 577년)이 일어났을 때, 대부분의 승려는 환속(還俗)당하고 소수만 남쪽으로 내려가 법란을 피했다. 혜가 대사는 안휘성(安徽省) 안경시(安慶市) 악서현(岳西縣) 사공산 이조사(司公山 二祖寺)와 안휘성(安徽省) 잠산현(潛山縣) 천주진(天柱鎭)의 환공산 삼조사(晥公山 三祖寺) 쪽에서 제자인 승찬(僧璨)과 함께 풀뿌리와 나무열매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대사는 552년 제3조 승찬(第三祖 僧璨)에게 법(法)을 전한 후, 자신의 원(願)대로 만행(卍行)의 길에 들어서 뭇 삶들의 고통과 번뇌, 즐거움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나머지 생애를 지극한 깨달음을 널리 펴기 위해 노력하였다.
혜가 대사의 법력(法力)을 아는 이들이 가끔 자기의 만행을 해 하면 오히려 "이놈들! 내가 내 마음을 길들이는데 무슨 수다들이란 말이냐?"고 하며 그들을 꾸짖기도 하면서 107세가 되던 593년까지 장장 34년간이나 이런 만행을 계속해 오던 중, 하루는 혜가 대사가 당대(當代)의 대강백(大講伯)이라 불리던 변화 법사(辯和 法師)가 열반경(涅槃經)을 강(講)하던 광구사(匡救寺)의 문 앞에 이르자, 이조(二祖)의 법문을 듣기 위해 그 주위로 구름같은 무리들이 몰려들면서 항상 꽉꽉 차던 광구사 법석(法席)은 텅텅 비고 말았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변화 법사가 그 고을의 재상(宰相)인 적중간(翟仲侃)에게 무고(誣告)의 소(疎)를 올려 무참히 처형시키니, 그의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그의 몸에서는 흰 젖이 흘러나왔다.
적중간(翟仲侃))은 혜가 대사의 최후의 모습을 그대로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보고를 했다. 황제는 적중간의 복명을 받고 크게 후회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참다운 보살이었구나. 우리의 실수로 참된 사람을 억울하게 했구나."
조정의 신하들은 혜가 대사의 의연한 죽음으로 해서 발심을 했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로부터 주나라의 불교억 압 정책은 철회되었으며 불법은 다시 흥왕하기 시작하였다.
제자에 선종 제3조 승찬(僧璨)이 있다.
출처 : 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