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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어느덧 나는 세월의 빠름이 더욱 실감 되는 70대 후반이 되었다.
이제 좀 조용한 여생을 보내려고 해보지만 지금도 국외 도처에서는 전쟁 중이거나 긴장을 조성하는 소식이 많아 유달리 신경이 쓰인다. 전쟁하면 젊은 날, 베트남전쟁이 현실에서나 꿈속에서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가끔 있다. 나의 국방의무는 60년대 준 전시상황 시대에 최전방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보냈고, 이어서 베트남에 파병되어 전장에 참여했던 일이다.
그런데 참전을 기록하면서 건설지원 위주로 수행하는 비둘기부대 작전 근무가 괜히 자랑 같이 비추어질까 봐 조심스러운 면도 있지만 파병부대 전반적인 현황과 군 생활에 이어 개인의 파병 경위와 전우애,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 결론에서는 장병들의 피땀 흘린 대가로 우리나라 경제부흥에 이바지하게 된 그 성과와 함께 다 같이 나라 사랑의 큰 뜻을 새겨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 군 입대와 파월 준비
1967년 6월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예년보다 유난히 무더운 날씨 속에서 6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후반기는 통신훈련소에서 4개월간 교육받고 일등병으로 진급, 통신병 직책으로 근무처는 중부 전선 최전방 공병대였다.
입동과 소설이 지나자 영하 20도 맹추위가 닥쳐왔다. 야간 근무 중에는 동상 예방을 위해서 제자리에서도 항상 온몸 운동을 해야 했고, 시끄러운 북한방송도 몸서리나게 들어야 했다. 매일 훈련을 일삼다 보니 병사들에게는 하루 이틀 기간이라도 세 가지 소원이 있었으니 배불리 먹어보기, 실컨 잠자기, 푹 쉬어보기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 간첩 31명이 서울에 침투하여 전국이 비상시국으로 전환되었고 최전방은 전시체제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군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총 3년으로 되었다.
모든 전방부대에서는 즉각 ‘5분대기조’를 편성, 항상 완전무장을 하고 야간에도 군화를 신은 채 벽 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즉시 일어날 수 있는 자세로 취침하였으며, 수시로 인근 산악 비상 훈련과 비무장지대 작업도 계속하는 동안 지긋지긋한 추위가 물러가고 1868년 5월에는 상병으로 진급하였다.
한편 베트남전쟁이 한창인 1968년 구정 공세 때 연합군의 손실이 커지자 계속 파병이 늘어났다. 특히 통신병 차출도 많아 지원을 한 결과 이내 베트남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출국 전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훈련장에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1개월간 받았다. 부모님에게는 파병 사실을 숨겼으나 훈련 기간 중 선불 받은 6개월 봉급을 각자 고향으로 송금하는 과정에서 결국 알게 되었다. 가족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 파병 행렬
1968년 6월 30일 늦은 밤, 파월 장병들은 전용 열차를 타고 밤새도록 부산으로 달렸다. 다음 날 새벽, 부산에 도착하여 군용차량에 탑승하여 소리 높이 군가를 부르며 제4 부두로 향했다. 길 가던 많은 시민들이 손을 흔들었고, 그중 어떤 학생과 마주치게 되어 메모지를 던져주면서 종이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하여줄 것을 부탁하였다. 내용은 형님 사무실 전화번호와 함께 오늘 오후에 출국하니 잘 잘 다녀오겠다는 짤막한 메시지였다.
완전무장한 병력은 약 2천 명, 군용차와 각종 장비까지 적재한 대규모 군함에 전원 승선하였다. 오후 2시경 전 장병들이 갑판에 나가자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한 환송을 해 주었다. 그 가운데 멀리서나마 부모님과 형님도 볼 수 있었고, 어머니는 계속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었다. 성대한 환송식이 끝나고 군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든 장병들은 눈물을 쏟으면서도 더욱 큰 소리로 군가를 계속 부르며 팔을 흔들었다. 가족들도 우리들이 안 보일 때까지 목이 메인 채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생사를 눈앞에 두고 애간장 끊어지는 듯한 이 순간 이별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누가 알겠는가. 잠시 후 인파를 뒤로 하고 망망대해로 대한해협을 벗어나 남쪽 나라 베트남으로 향했다.
전쟁터로 나가는 공포감과 지독한 배멀미에 시달리면서 5일 후 베트남 나트랑 부두에 하선했다. 함께한 백마부대 장병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따로 남은 십여 명은 군용기로 사이공 인근 탄손누트국제공항에 내린 후 다시 군용차량으로 비둘기부대에 도착, 본격적인 파병 근무가 시작되었다.
4.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 병영 생활
비둘기부대는 8년(1965.3.16.~1973.3.7) 동안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 동북쪽에 근접한 디안(Dien)에 주둔한 부대이다. 주위에는 베트남 인민군과 베트남 남부해방전선(베트공) 적군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자체 경비와 인근 지역 작전을 위한 경비대대를 비롯하여 공병대대, 독립 해병공병중대(초기), 이동외과병원, 태권도 교관단 등으로서 합동 민사와 심리전 역할도 수행하는 부대다. 최초 비둘기부대장은 조문환 준장, 본인이 근무할 당시에는 제2대 차규헌 준장이었다. 주둔 초기인 1965년 4월, 월맹 정규군과 베트콩이 합세하여 야간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부대원들은 종합적인 대응과 포격으로 격퇴 시켜 적 사상자 30여 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부대는 넓은 야전(野戰)에 자리 잡고 있어, 초기에 투입된 건설 장병들의 노고가 컸다고 했다. 특히 외곽지대는 산병호(散兵壕), 교통호, 크레이모아 지뢰 지대, 철조망 등으로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경비상황실 근무 통신병들은 샌드백(sand bag)으로 만들어진 벙커에서 상부 기관과 현장 통신병들과의 무전 교신으로 항상 긴장한 상태였다.
당시 비둘기부대 총병력은 2,200여 명이었고, 파월참전 전체 부대 병력은 49,309명이었다. 여기서 사용했던 무기는 당시 한국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M16소총, P-20 등 통신장비, 클레이모어, 조명탄, 방공포 장비 등 전량 미군용 신형장비였기에 장병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한편 공병부대에서는 대민 지원사업 위주로 수행하였다. 사이공 환상도로, 비둘기교를 비롯한 교량 건설, 진료소∙학교 건물 신축, 어린이 놀이터 설치 등 다양한 사업으로 교통 편의와 의료서비스, 교육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경비부대에서는 작업장 경비, 순찰∙야간 매복 작전, 부대 인근 지역 작전, 전입 신병 교육 등이었다. 매번 출동 시에는 생명 안전과 부비트랩 피해 방지를 위하여 안전교육과 훈련, 보호장비 착용은 필수였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을 통한 민사심리전 활동도 매우 컸다.
전투식량은 당초 미군과 같이 C레이션을 이용했으나, 군부대와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김치, 두부조림, 꽁치조림, 밥 등 K레이션을 개발, 공급하게 되어 큰 인기와 호평을 받게 되었으며, 자연적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의 군납 수출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장병들의 제일 큰 관심사는 근무수당이었다. 병장 1일 수당 1.8$(월 54$), 상병 1일 1.5$(월45$)이었다.(1968년 환율:274.6원) 수당 중 80%는 정부 방침에 의거 매월 단위로 본국으로 송금하였다.
수개월이 지나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부분 장병들은 향수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병들은 자신의 기개와 애국심에서 지원한 경우도 많았지만, 갖가지 사연을 가진 장병들도 꽤나 있었는데 매일 저녁 식사 후에는 그리운 가족과 고향 얘기 등으로 정을 나누면서 극복하였다. 이를 감안한 듯 부대장은 서한과 부대 소식지를 발간하여 고국 가족에게 보내고, 본국에서도 지역의 군수(郡守)가 서한과 타올 등 선물을 가족에게 전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위안은 고국 가족들과의 안부 편지였으며, 학생들과 일반인들의 위문편지도 오갔다. 왕래 기일은 10여 일이 소요되었다. 또한 수개월마다 연예인들의 위문공연단이 방문하여 장병들의 사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1968.8.31자 고국의 누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다음과 같은 사연이었다.
“지금 밤 11시, 아버지께서 목욕하신 후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마당에 꿇어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정한 수를 떠 놓고 소지 종이 10장을 촛불에 태워 하늘에 멀리 날리면서 두 손 모아 기도드리는 그 정성이 눈물겹도록 뜨겁기만 하구나. 부모님의 간절한 사랑을 네가 있는 그곳 먼 하늘에서도 느끼고 감사하게 생각하리라 믿는다.”
오직 자식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부모님의 지극 정성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때 나는 사연을 읽고 북쪽 밤하늘을 쳐다보면서 목구멍에서 솟구치는 격한 뜨거움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객지 설움을 당해 보아야만 가족이 참으로 그립고, 외국에서 살아보아야 진정 애국심이 솟아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생각해보면 부모님 은혜를 제대로 갚지 못한 큰 죄 평생 동안 가슴이 아리기만 하다.
1969년 3월 병장 진급 후 상황실 야간 자정이 훨씬 지난 시점에 매복조 통신병의 다급한 무전 신호를 받았다. 적군들이 철조망과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소리 없이 부대 쪽으로 공격해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크레모어 단추를 꼭 잡고 있도록 연락하고, 동시에 경비대대장께서 상황실에 도착해줄 것을 조수에게 지시한 후, 포병 중대에도 조명탄 투하 준비를 유선으로 연락했다. 그 당시 대대장은 나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일심동체였던 박상문 육군 중령이다.
전화를 받은 대대장은 곧바로 달려왔다. 나는 현재 상황과 지금 곧 조명탄을 투하 해야 된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잠시 후 매복조 통신병은 드디어 살상 범위 내에 접근하였다는 신호가 왔다. 대대장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조명탄이 투하되고, 바깥은 인근 지역이라 대낮같이 밝았다. 이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무기 크레모어에 장착된 700발 총알이 터지는 굉음과 M16 소총 소리와 적의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가 잠시 후 조용해지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다음 날 새벽 현장에 달려간 대대장은 수 명의 적들이 침투하다 전멸한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작전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고 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만약 아군 매복조들이 적 침투를 빨리 인지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잠시라도 자리에서 떨어져 있어 통신병의 다급한 소리를 뒤늦게 알았더라면? 조명탄 투하 지점에 허점이 있었더라면? 우리 부대는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발생 되었을 것이다. 장병들의 성공적인 작전은 신의 도움이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이 작전 후 나는 대대장의 지시로 근무지를 대대장실로 옮기게 되었고 파병 기간도 1년 더 연장되었다. 탄알이 장전된 소총을 항상 휴대하고 대대장, 운전병, 나와 세 사람은 대민 작전 지역, 민사심리전을 위한 민가 방문, 사이공 주재 주월사령부 등지로 출동하였다. 어느 날 사이공에서 군부대로 귀대하는 외곽지에서 시가전 직후 비참한 현장을 목격하였으며, 대민심리전을 위해 민가에서 민간인과 대담하던 중 총격전이 벌어지는 위기도 모면하였다.
참고로,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기록에 따르면 1968년 한 해 동안 비둘기부대 공병∙경비대대 중대급 이하 작전은 4,353회, 파병 시작부터 1973.1.30.까지 총 13,622회나 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우리나라가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으로 구성, 제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5년 3월 16일 비둘기 부대(건설지원단), 10월 제2해병여단(청룡부대), 수도사단(맹호부대)과 주월한국군사령부, 1966년에 백마부대 추가 파병, 군수지원단 및 백구부대 등 총 1개 군단 병력으로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파견 병력은 324,864명(최대 5만 명)이었다. 참전자 중 5,099명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고 10,962명은 부상을 당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조인된 베트남 전쟁 종결을 약속한 협정(파리 평화 협정)으로 한국 참전은 1973년 3월 23일 종결되었다.
나는 1970, 3.13자로 파병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길은 출국 때처럼 군함에 탑승하여 그리운 고국, 부산에 도착하였다. 21개월 동안 베트남 전선 초기에는 상황실에서 통신 근무로 빈틈없이 근무 잘했고, 2차 근무 시는 사방 노출된 경비 1호 찦차 뒷좌석에서 무전기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어쩌면 ‘살아 돌아갈 수 없고 그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각오’가 오히려 나를 살게 해준 메시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본다.
꿈에도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고향 산천과 부모님, 가족들 품에서 한 차례 휴가를 보내고 36사단에서 제대특명을 받았다. 군 생활 35개월을 마감한 날은 봄이 한창때인 1970년 5월 9일이었다.
5. 파병 성과
베트남 파병으로 얻게 된 국가적인 큰 성과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많은 병력이 실전 경험과 현대 장비 운용을 전수하게 되어 한국군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또한 월남에 많은 기술 인력 파견으로 고용증대가 이루어졌고, 1970년대에는 중동 진출로 이어져 국가 경제가 급속하게 상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한∙미간 새로운 협정으로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어 한국방위 보장에 이어 군사경제 원조액으로 군 현대화 추진과 국방력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경제 발전에 대한 자료를 보면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로 국민 소득이 크게 향상되었다. 1964년에 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우리의 두 배였고, 그 당시 한국의 GNP는 76$, 북한은 135$였다. 그러나 참전 이후인 1966년부터 우리나라에 10% 고도성장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양국 수교에 이어 경제와 문화교류 추진과 함께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펼쳐왔으며, 2022년 12월 22일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호칭은 ‘남조선’에서 ‘한국’으로, ‘월남’에서 ‘베트남’으로 변했다. 2024년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은 약 24만 명으로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 수는 9,000개, 기업인과 주재원 수는 2만여 명이며 베트남은 중국,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의 4대 교역국이 되었다.
다음으로 생존한 월남참전유공자를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보훈부 자료를 보면 2024년 8월 말 현재 생존자는 170,469명, 90세 이상은 675명으로서 0.4%에 불과하고, 95세 이상 생존자는 총 14명이다. 정부에서는 매년 1만 명 이상 사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유공자 중 고엽제 후유증은 37%인 63,152명으로 나타났다. 한편 생존한 6•25참전유공자 총인원은 35,982명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실질적인 혜택을 폭 넒게 부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만 국민 모두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고 정부의 국방정책도 충실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6. 맺음말
우선 남베트남이 패망한 원인과 교훈을 깊이 인식해야 된다고 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세 가지 원인을 꼽았다.
첫째,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한 남베트남 정부,둘째,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라고 인식하면서 국민들의 민족주의 의식과 집단 이기주의로 적으로 싸웠던 북베트남을 지지하였으며,
셋째, 무사안일에 빠진 남베트남 군대가 원인이라고 지적하였다.
끝으로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는 한반도 지형적 위치를 보아 최우선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둘째, 모든 국민은 올바른 국가 정신을 가지고 굳건한 정신 무장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올바른 국가 정신이 없는 국민은 백약이 무효이다.
보시게나! 무시 안일에 빠진 남베트남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잃었고 나라는 없어졌다. 지금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세계인들은 울부짖고 있다.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끝)
陣中詩 -베트남전쟁 당시 비둘기誌에 게제된 작품
병사의 사연
헤일 수 없는 거리를 두고
흘러온 아픔을 망각으로 오열하며
알알이 부푼 바램은
눈먼 허공에서병사의 순정을
울음하고 있다.
밤별 하늘에 불꽃이 튀고,
산산이 어둠을 파열하는 포화에도
승리의 환희가 있었던 이 땅에서
아 당신의 뜨거운 대화는
차디찬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사랑이 그리워 울던 병사여 -
피빛 짙은 전선에 햇빛이 찾아들고
찬란한 꽃망울이 맺힌 그리움은
설익은 능금빛 순정을
아직도 꿈꾸는당신의 사랑인데
눈부시게 간호해줄 설레임으로
병사는 오늘도 기다림에 산다.
부모님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1968년 3월






2026년 6월 대한민국월남참전전우회 주관으로 대구보훈병원에서 베트남전 참전 기념사진전시회 개최 시 일부 사진 촬영하여 다음과 같이 게제합니다

2026년 6월 대한민국월남참전전우회 주관으로 대구보훈병원에서 베트남전 참전 기념사진전시회 개최 시 일부 사진 게제









참고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베트남전쟁, 한국군의 작전, 파병의 결과 및 영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론)
∙월남전선의 한국군 화보집(주월한국군사령부 발행, 1969)
∙기타 인터넷 다수
위 글은 2024년 대구행정동우회지(誌)에 수록 된 글을 옮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