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자유총연맹 강석호 총재가 8일 탐라자유회관 광장에서 거행된 강승우소위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고 있는 모습
한국자유총연맹 제주특별자치도지부(회장 김양옥)는 8일 제주시 탐라자유회관에서 ‘백마고지전투 3용사 고(故) 강승우 소위 추념식’을 거행했습니다.
호국 보훈의 달과 6·25전쟁 73주년을 맞아 6·25 한국전쟁 당시 열한 전투 중 하나였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산화한 육탄 3 용사 고(故) 강승우 소위를 기리기 위한 행사입니다. 김양옥 회장은 “강승우 소위와 호국영령들의 못다 이룬 유업을 받들어 호국 의지를 굳게 다지고 애국을 실천해 나가자”라고 밝혔습니다.
이날 추념식에는 중앙에서 한국자유총연맹 강석호 총재를 비롯해 연맹의 각 시·도지부 조직 간부들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으며, 제주에서는 김광수 제주특별자치도 교육감과 김희현 제주도 정무부지사를 비롯해 도내 보훈·안보단체장과 회원, 그리고 유가족 등 2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강 소위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출신으로 1952년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두 명의 소대원과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들고 북한군 진지에 돌진해 진지를 모두 파괴하고 산화,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 유족회에서는 유가족 대표로 참석한 강응봉 도지부장을 비롯해 최홍도 제주시지회장, 변영근 서귀포시 지회장과 회원 2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사무국에서는 오을탁 차장, 김소양 과장이 참석했습니다.
‣ 강승우 소위는 누구인가?
강승우 소위는 일출봉이 바라보이는 성산읍 시흥리에서 강치원 옹과 부남근 여사와의 사이에서 1930년 11월 28일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심성이 착하여 부모의 사랑은 물론 동네 어른들로부터도 귀여움과 칭찬받으며 자랐다.
1944년 당시 성산서초등학교(현 동남초등학교)를 졸업한 강승우는 집안에서는 착하게 자라며 부모님께 기쁨과 미덕을 드리는 효자였다. 또한 동네에서 낮에는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청년운동과 밤에는 야학당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18세가 되는 해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같은 동네 김춘일 여사와 결혼하였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신혼의 꿈도 행복도 마다한 채 군에 자원입대하였다.
1951년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강승우는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어 백마부대와 인연을 맺었고, 백마고지 전투에서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의 화가가 불을 뿜은 가운데 육탄으로 돌진하여 난공불락의 적 기관총 진지 3개를 모두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인 이 전투에서 육탄돌격을 감행한 강승우 소위는 ‘백마고지의 영웅’, ‘삼군신’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정부는 그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1953년 7월 1일 을지무공훈장 수여와 중위로 추서하였다.
※ 약력
• 1930. 11. 28.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출생
• 1951. 12. 08. 육군 소위 임관
• 1952. 10. 12.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
• 1953. 07. 01. 을지무공훈장 추서 및 육군 중위 특진 추서
• 1995. 04. 우리나라 호국 인물 100인에 선정(전쟁기념관 사업회)
• 2014. 10. 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 영웅
‣ 강승우 소위 공적
故 강승우 소위는 성산읍 시흥리에서 1930년 11월 28일 태어났다. 1944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과 청년운동에 앞장서다가 18세 때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가 발발하자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하였다. 1951년 12월 육군소위로 임관된 후 최일선인 9사단 백마부대 1중대 3소대장으로 배속되었다.
6·25 당시 우리 백마부대와 중공군 사이에 무려 24회에 걸쳐 진퇴를 거듭한 난공불락의 백마고지 적 진지에 부대원인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를 지휘하여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갖고 육탄으로 중공군 진지를 폭파하고 산화함으로써 백마고지 탈환의 신화를 이룬 3군신의 한 분이다.
故 강승우 소위의 적진지 탈환으로 우리 아군은 그 여세를 몰아 북으로 올라가게 된 진격의 혈로를 열어 놓은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 10일 동안 이곳에 퍼부어진 피아간 포탄만도 26만 발로 확인되었으며 사상자는 아군 3천 4백 23명, 적운이 1만 4천 3백 89명으로 주변 호수가 시체로 모두 메워질 정도다.
전투가 끝난 뒤 길이 3킬로미터 폭 1.5킬로미터의 백마고지의 형체는 높이가 1m 가량 낮아졌고, 만약 백마고지를 우리가 탈환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휴전선은 최소한 30km 남쪽으로 그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정부에서는 1953년 7월 강승우 소위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고 이보다 앞서 1953년 2월 미국 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여 그의 호국정신을 추앙하였다.
강승우 등 세 용사의 충용스럽고 살신성인의 그 신화는 그 뒤 ‘삼군신’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당시 백마고지 탈환의 신화를 창조해 낸 이 고귀한 순국은 우리 제주인의 기개인 동시에 영원히 길이 빛날 위국충절과 호국정신의 귀감이 될 것이다.
‣ 백마고지 전투는?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과 철원 북방의 395고지를 빼앗기 위해 1952년 10월 6일부터 10월 15일까지 12차례의 공방전 끝에 14차례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거듭하여 고지를 확보한 전투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 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으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례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며칠 동안 5차례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연대와 제30연대는 재편성을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12일 아침 번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하여 이를 재탈환하였으나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리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 능선 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여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 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다.
백마고지는 395고지에 중공군 포탄 5만여 발, 아군 포탄 21만여 발이라는 막대한 양이 집중돼 전투 후 민둥산으로 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자료출처 : 한국자유총연맹 제주특별자치도지부 - 故 강승우 소위 추념식 팜플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