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릉안 조선왕릉전시관을 가다
우리 <문화탐방>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벼락이 내려치나 상관 없이 계속됨다.. 지난달 탐방모임 뒷풀이 시에 7월말 모임(26일)은 무더위가 예상되고 휴가철이라 쉬는게 어떻냐는 소수의견이 있었으나 '선비가 北風寒雪이라고, 오뉴월 炎天이라고 글읽는 것을 거를 수 있느냐' 그냥 쉬지않고 죽~ 가기로 못밖은 바 있다. 이번 행선지로는 몇개월 전부터 입에 오르내리던 '조선왕릉전시관'으로 하였다.
태릉입구역에 내리니 3시 20분전. 걸어서 10여분이면 되겠지 하고 땡볕에도 불구하고 이정표를 따라 갔으나 15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보통 무슨무슨 입구역이란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미 도착한 권옹에게서 두번째 전화가 와서 이제 거의 다 가고 있다 하였으나 가도가도 태릉은 나타나지 않는다. 버스도 지나가지 않고 택시도 없고..에라 그냥 가보자. 땡볕을 30분 쯤 걸어서야 겨우 도착하니 10분이상 늦었는데 해설자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에 늦지말라고 문자를 날린 넘이 늦었으니 이리 미안할데가..
해설자인 박희* 여사는 차분한 외모에서 부터 상당한 내공이 느껴졌다. 1시간 가까이 조선왕릉에 대한 해설 중 기억나는 거, 잘 몰랐던 사실(필자만 몰랐는지도 모름) 등을 단편적으로 순서도 없이 적어본다.
전시관 내부
임금의 국장행열도
총(塚), 능(陵), 원(園) : 총(塚)은 왕이나 당시의 유력자의 무덤인 게 분명한데 주인이 확실치 않은 경우로, 경주 천마총(天馬塚)이나 압록강 북쪽 집안(集安)에 위치한 장군총(將軍塚 :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유력) 등이 이에 해당된다. 능(陵)은 통상 왕의 무덤인데 조선조에는 왕비가 홀로 묻힌 무덤도 왕릉이라 하며 실제 왕의 능과 별 차이가 없다. 원(園)은 세자나 세자빈, 그리고 왕의 부모로서 왕에 오르지 않은 분의 묘, 그외 왕의 자손인 대군과 공주 후궁 등의 경우는 그냥 묘라 한다.
왕릉의 위치 : 조선 왕릉은 궁궐로 부터 10리밖, 100리안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는 왕실을 오랫동안 비워놓을 수 없기에 왕이 능에 갔다가 하루안에 돌아 올수 있는 거리를 고려한 것이다. 예외가 몇건 있는데 영월에 있는 단종왕릉은 폐위되어 그곳에 묻혔던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경우이고, 세종대왕릉의 경우는 원래 서초구 내곡동 지금의 헌인릉 부근이었는데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예종 1년(1469년)에 여주로 옮겨가서 100리 밖에 있게 되었다고..
조선왕릉 왜 이리 많은가 : 조선왕릉은 모두 42기인데 이는 27분의 왕외에도 추존왕과 왕비들의 무덤도 왕릉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왕과 왕비의 묘는 곁에 있는 것이 보통이나 의외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경우도 꽤 되는데, 우선 태조 이성계의 능은 동구릉(태조 능호는 건원릉)에 있고 첫번째 한씨 부인(신의왕후)는 이북 개성(제릉)에 아드님인 정종의 능(후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계비인 강씨 부인(신덕왕후)의 묘는 서울(정릉)에 있다. 우리가 찾아간 태릉(泰陵)의 경우는 중중의 세번째 부인 즉 제2계비인 문정왕후 혼자의 묘로 아들인 명종 내외의 묘인 강릉(그래서 태릉을 태강릉이라 부름)에 가깝고. 정작 중종은 다른 곳(선릉)에 있다.
UNESCO세계유산 : 조선왕릉 남한에 있는 40기는 모두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이북 개성에 있는 2기는 북한이 신청하지 않아 등재되지 않았다.
왕의 장례기간 : 왕이 승하하신 후 장례기간은 3개월에서 5개월인데, 이는 일반인들과 다른 여러가지 장례절차가 있어서 이기도 하고, 엄청난 규모의 왕릉을 조성하는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보통 동빙고나 서빙고에 보관된 얼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묘호(廟號)와 능호(陵號) : 묘호는 왕이 죽은 후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종묘에서 쓰는 이름도 묘호이며 우리가 태정태세.. 하며 부르는 왕의 명칭도 역시 묘호이다. 능호(陵號)는 왕이나 왕비의 능에 붙이는 명칭으로 생전의 업적이나 평판을 고려하여 짓는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묘는 능호가 영릉(英陵)이고 여기 태릉(泰陵)은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능호이다.
묘호 조(祖)와 종(宗) : 나라를 건국한 왕이나 국가가 풍전등화에 있을 때 이를 지켜낸 왕의 묘호엔 보통 조(祖)를 붙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확립한 세조, 임진왜란의 와중에 있었던 선조, 그리고 병자호란에서 비록 청나라에 항복을 한 임금이지만 인조 등에 조(祖)자가 붙는 것은 이해가 간다(으뜸을 나타내는 宗보다 조상을 나타내는 祖가 한 등급 위인듯). 그러나 예외가 몇이 있는데 영조 정조 순조 등이다, 영조와 정조가 나라를 잘 다스렸다면 세종대왕에는 조(祖)가 왜 안 붇는가. 특히 안동김씨 외척정치의 시작인 유약한(?) 순조에 祖자가 붙은 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 단초에 고종이 있었는데, 고종이 황제로 등극(허울만 이지만)하며 앞의 왕 5분에게 묘호를 바꿀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서 그렇게 된 거라는 해설자의 말쌈.
금천교(禁川橋), 홍살문, 정자각(丁字閣) : 왕능에 들어가려면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를 지나기 전 몸을 깨끗이 하고, 입구라 할 수 있는 홍살문에 이르게 된다. 홍살문과 능 사이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돌길이 2개 나란이 있는데 약간 높게 조성된 것이 神道로써 보통 향불이 지나가는 길이고, 좀 낮은 곳은 祭主인 왕이 가는 길이란다. 정자각 앞에는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넓은 공터가 있는데 능을 향해 왼쪽에는 종실 사람들이 오른쪽에는 초대받은 이들이 위치한다고(전에 수원 융건릉 해설자는 왼쪽이 무관 오른쪽이 문관의 자리라 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인듯함)
홍살문(태릉)
정자각(태릉)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묘인 태릉
총론에 해당하는 조선왕릉전시관을 나와 각론으로 들어가 지척에 있는 태릉을 보러 갔다. 해설을 들어서 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태릉이 소시적에 막걸리나 비우던 그저 잔디가 잘 가꿔져 있는 그냥 무덤이 아니었다. 능 주위에 들어선 많은 향나무와 소나무 숲이 무더운 날씨에도 오히려 서늘한 감마져 들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세번째 왕비로 첫번째 부인은 중종반정에 반대한 아버지를 둔 덕(?)에 쫒겨나시고 두번째 부인마지 일찍 죽자 별 노력(?)없이 오랫동안 왕실의 안주인이 될수 있었고, 죽은 후에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변옹 왈, 경쟁자들(?)이 도와주는 바람에 그리고 오래 버티신 바람에 호사를 누리고 문정왕후란 시호에 태릉이란 능호도 받게 되셨다고 한마디. 쎈넘이 살아 남는 게 아니고 살아 남은 넘이 쎈거라오^^
첫댓글 이 무더위에 돌아가실때가 한참남앗는데도 불구하고 ( 요즈음 부쩍 동네개가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괴소문이...) 미친듯이 묘자리를 알아보러 돌아다니는.... 더구나 감히 왕궁자리를 널럼널럼! 하여 문화계일각에선 신종 늙은이 도굴꾼들이 작당을하여 돌아다닌것이 아닌가하여 의심의 눈초리가 번쩍 뻔뜩거립네다
비밀리에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뽀록이 다 나버린겨?
이 바탕음악을 선택한 분은 뉘신가요..딱이야 따악...차기 문화 탐방 코스로 선능 (지하철 2호선 선능 역) 강추 함다. 소생 삼다수 물병에 내용물 바꿔치기 한 후 낼로 뛰어 갈 수 있습니다...김밥 두줄, 야끼만두 2인분 들고...많이 배웠슴다..감사...
선릉(성종 릉)의 경우 옆에 있는 정릉(중종)까지 합해야 2기인데..... 동9릉이나 서5릉 또는 서3릉 등 여러명(?)이 누워 계신 곳부터 가야 졸하기 전에 왕릉 40기를 다 섭렵 할 듯하오만... 위로부터 압력이 쎄면 내부적인 조율을 좀.....^^
많이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