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즉생(死則生) 생즉사(生則死)의 법> 사순 제5주일(요한12,20~33)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례미야 예언자는
“보라,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예레31,31).” 라고 선포합니다.
이 예언이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때가 왔음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비로소 싹이 나와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고
또 많은 열매를 맺고 영광스럽게 들어 높여집니다.
이 말씀은 골고타의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할
예수님 당신 자신의 운명과 사명에 대한 엄중한 예고이며 확증입니다.
이후에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언덕 위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이 죽으심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즉생(死則生) 생즉사(生則死)의 역설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죽으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언뜻 보면 모순 같이 보입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죽어야 합니다.
인생은 자아(自我)가 죽는(死) 과정입니다.
자아의 야심(野心)과 빗나간 욕망을 죽일 때 자기 성장과 자아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편견, 내 고집, 내 주장, 내 자존심, 내 아집, 내 자아 등을 죽이지 않고서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마르14,36)”
겟세마네의 기도를 생각나게 해주고 충분히 그 고뇌를 반영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생각하면 괴로움을 느끼십니다.
그리고 이 때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울부짖습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7~8).”
이렇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끌어안고 죽임을 당하십니다.
밀알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인간 구원을 설명하는 예언적 상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수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600년 전에 예언한 새로운 계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몸과 피를 통한 계약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성체성사로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화석처럼 딱딱하게 박제된 율법에 따라 사는 때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 한편에 새겨진 새 계약에 따라 회개하는 시기입니다.
옛 계약이 하느님의 법을 머리로만 아는 것을 말한다면,
새 계약은 하느님의 법을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고, 손과 발로 실천하는 계약입니다.
새 계약의 법은 돌판이 아니라 가슴에 새겨진 법이며, 사즉생 생즉사의 법입니다.
사순절은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이 죽는 때 입니다.
죽지 않고서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 자신이 다 부수어져야 합니다.
새싹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찢어지고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죽을 때 자아(自我)는 새로이 태어나고
창조 때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회복하고 실현합니다.
부서지고 썩음을 통해 거짓된 자아에서 죽음으로써
사랑의 새 계약을 실천에 옮기는 거룩한 은총의 사순절을 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