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워질 때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러 13번 종점 가까운 논둑에 간 적이 있다. 오토바이 꽁무니에 매달려 가도 좋았다. 신혼이라는 이름은 그저 사소함에도 기뻤다. 허리춤을 꼭 잡고 스쳐 지나는 바람의 간지럼에도 웃음이 났다. 코끝에 닿는 풀잎 향기에서 고향을 만나 반가웠다. 어둠 저편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돈 둑 너머에서 봄밤을 노래하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긴 호흡으로 우리를 반겼다. 한참 동안 듣다가 돌아왔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 밤을 생각하게 된다.
청주에 머물던 시절 집주변이 논밭과 가까웠다. 조금 외곽인데도 시골처럼 조용하고 정다웠다. 논둑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면 무덤이 있었다. 어릴 때는 무덤을 지날 때면 괜히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다.
스무 살이 지나서였을까. 삶과 죽음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옆에는 연인이 있어서였는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묘지를 등받이 삼아 오래도록 앉아있기도 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순정한 마음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봄이었나.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논둑길을 자주 걸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지난 지 얼마 안 되던 때라 학생 운동은 극에 달했고 걸핏하면 휴강이 있던 1980년대 초반이었다. 묘지에 기대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지러운 사회현상들이 언제 멈추려나. 우리의 불투명한 어느 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묘지 속의 주인이 누구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묘지의 주인은 4·19의 어떤 장면 속에서 소리높여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묘지를 찾던 시절 묘지 일기를 써보는 건 어때? 하고 연인은 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청주의 생활을 마무리하던 봄. 4월 19일이면서 부활절이던 날 결혼을 했다. 4·19에 대해 얼만큼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 채 ‘4·19 정신으로 살자’며 장난인 듯 진지한 듯 말했던 것 같다. 묘지일지를 이야기하며 4·19를 떠올렸는데 4월 19일에 결혼을 한 건 우연이었을까. 칼 융이 말하던 무의식의 현상이 작용한 것이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가끔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여주에 사는 언니는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다던데.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리움도 소멸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애틋하고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