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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일본 집회 3년 만에 진행되는것 같습니다. 이게 원래 중국 통역이나 영어 통역은 말이. 다 끝나야 되는데 한국어나 일본어는 어순이 같기 때문에 같이 나와요. 동시 통역만 하시다 보니까, 순차 통역을 해보세요.
오늘 첫 시간 본문을 가지고 이번 집회의 전체 주제라고 할수도 있고, 특히 이 시간 참석한 인터넷으로 생방송으로 하는 모든 분들에게 가장 제목이 되는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주제가 되는 말씀. 따라서 해봅시다. 삭게오를 찾으시는 예수님. 옆에 사람 축복 할까요? 당신은 이 시대에 삭게오입니다.
오늘 본문 읽다 보시면 세리장이고 부자인 삭게오가 나옵니다. 분명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 간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보고자 하여 왔을 텐데, 삭게오는 키도 작고, 또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서, 나가고자 하여도 나갈수 없는 상태 속에 있을때,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마침 돌무화가 나무가 있는 것을 보고 올라가게 됐죠.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다가 삭게오를 보고, 삭게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게오가 즐거워 하며 뛰어 내려 왔다고 했죠.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군 거립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려고 들어 갔더라. 삭게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영접하고 기뻐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내어놓겠습니다. 내가 남에게 뺐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그러면서 말씀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여러분 분명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자 하였는데, 왜 하필 키도 작고, 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이라고하는 삭게오, 예수님이 왜 그를 부르십니까? 삭게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성경은 한 삭게오 개인의 인생을 기록하기 위해서, 누가 복음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삭게오 개인 인생속에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일이 2천년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모든 인간속에 구원 하셨던 그 일을 삭게오에게 나타내셨던 겁니다. 그 말은 지금도 그 분은 동일하게 그 일을 나타내십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인생속에 확인 되는 것이 뭡니까?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렇죠? 그래서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인생이 잘 될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그러한 인생속에 하나님의 구원만 영원한 축복임이 믿어지길 축언 합니다. 바로 그 일이 구원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지나가는 우리 인생속에 과거에도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그 일은 주 예수의 날 까지 변함없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인생속에 이번 일본 집회 참석하신 여러분들과 함께 인터넷으로 생방속으로 은혜 받는 모든 분들 속에 삭게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게 바로 뭡니까? 주 예수의 구원의 은혜로다. 그러니까 삭게오가 기뻐하고 즐거워 한거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자기 재산의 절반을 내놓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심지어는 남에게 내가 잘못한것이 있다면 네배나 갚겠습니다. 이것이 정말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이 하신일로 바로 깨닫는 자들에 진정한 고백이요. 실제 변화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 하셨잖아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개인 여러분의 집 가정 속에 임하는 복된 시간이기를 축언 합니다.
제가 조금 인터넷 자료를 찾아 보니까, 일본 기독교 역사가 164년이 되더라고요. 물론 천주교가 더 먼저 들어왔지만, 개신교 역사만 놓고 본다면 한국 보다 25년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온 겁니다. 1859년에 복음 가진 개신교 신자가 이 땅을 밟았더라고요. 한국은 1884년 도에 처음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왔거든요. 일본 땅이 참 넓어요. 한반도 남북한 합친것 보다 두배가 넘으니까. 남한 땅만 하더라도 3.8배가 된다고 해요. 인구도 우리 한국은 오천만이 조금 넘지만, 일본은 일억 이천명 좌우가 되죠. 기독교 164년 동안 현재 일본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되냐. 얼마나 될것 같아요. 60만 밖에 안되요. 0.5% 안되는 거예요. 많은 분들이 한국 기독교 사를 말할때에 일본땅 보다 25년 뒤에 들어온건데도 통계가 정확한 통계가 아닙니다만, 천 이백만 명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데 지금은 더 많이 떨어졌겠죠. 그래서 한국 기독교사가 이렇게 짦은 역사 속에서 대 부흥을 이룬것은 순교자들의 피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많은 분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 기독교사를 보면 한국 보다 더 순교를 당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차입니까? 가만히 생각을 해봤습니다. 첫째로는 일본과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차이겠냐. 정확한 복음을 가지고 들어왔던지,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히 이 땅에 순교의 피가 한국 보다 더 많이 흘려졌는데, 전하는 자 때문에 복음이 제한을 받고, 그렇다면 복음은 능력이 없는 거죠. 그래서 제가 찾아보는 가운데 야수쿠니 신사 에 관계된 신이 800만 이래요. 그리고 잡신과 관계 된것이 200만 이고, 이 정도면 천만 신을 섬기는 땅이에요. 그럼 이건 다신론이라기 보다 범신론 국가가 아니겠나. 모든 것이 다 신인 거예요. 그래서 일본인들의 사고 의식 속에는 예수를 부인하는게 아니더라고요. 예수를 유일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거죠. 예수를 믿어도, 일본의 여러신 중에 조금더 뛰어난 신 이정도 겠죠. 그래서 제가 볼때는 참 이 땅이 어느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진짜 흑암이 덮여 있는 땅이다.
두번째는 그런 흑암에 덮힌 일본사람속에 마귀는 신관이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천만 귀신을 섬기니까. 천만 신 중에 그 중에 하나 뿐인데 그 중에 어떻게 사람들 속에 이 복음이 정말 인생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역사 할수 있겠습니까. 제가 볼때는 이 땅에 복음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이전에 이땅을 완전히 종교의 흑암으로 완전히 귀신 국가로 덮어 버린 겁니다. 그런 만큼은 일본 사람들 속에 이 종교관이 너무 복잡하고 단순치 않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네가지 밭에 비유의 말씀이 나오잖아요. 하나는 길가 밭, 사람들이 하도 밟고 지나다니다 보니 길이 단단해 진 길가 밭, 두번째는 흙이 얕은 돌밭, 씨가 뿌려지니까 뿌리를 내리는데 햇빛이 나면서 뿌리를 깊게 내릴수 없는 만큼 말라서 타죽는 겁니다. 세번째 밭은 가시떨기 밭입니다. 여러가지 잡동사니가 뿌려져 있는 거죠. 거기에 씨가 떨어지니까. 뿌리를 내리긴 내려요. 잘하긴 잘하는데, 영향을 다른것에 뺐어 가는 겁니다. 잘하긴 잘하는데 열매를 맺을수 없는 겁니다. 앞서 말씀 드린 길가 밭, 흙이 얕은 돌밭, 또 가시 떨기 밭, 이건 어느나라 어느 민족 속에 다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일본 땅은 가시떨기 밭에 현장이 아니겠나.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일본도 갈수록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복음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떤 사람들에게도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정말로 역사가 일어나면, 길가 밭도 갈아 엎어지게 되어있고, 흙이 얇은 돌, 돌짝도 걷어내어 던져지게 되어있고 뿐만 아니라 가시 떨기도 뽑히고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 백배 육십배 삼십배 결실을 맺을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본 집회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예정된 시간 속에 시간 마다 삭게오를 찾으시는 예수님, 내가 삭게오가 되어야지 그런거 말고, 복음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지만, 사실 우리와 상관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수 밖에 없는 은혜를 받는 가운데 삭게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런 은혜가 임하시는 시간되길 축복 합니다. 그것이 이번 집회 뿐만 아니라 평생 그러한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 볼것이 무엇입니까?
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로다. 도대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삭게오에게, 삭게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기뻐 뛰며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는데, 오늘 이 집이 구원이 임하였다.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길래, 우리 요한 복음 1장 12절에 영접 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 영접 많이 시켜 봤죠? 복음을 전하고 또 그런 과정도 필요하겠죠. 영접 시킬때 정말 하나님이 삭게오에게, 나타내셨던,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손이다. 어떻게 계속 그 이후에도 영접 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 아브라함이 됐으니까. 그 사실을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의 축복만 받으면 될까요?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저를 부르실때 소명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태어났고, 기독교와 상관없는 우상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살다 보니 제일 기분 나쁜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더라고요. 세상과 맞지 않는 모습 속에서 기분 나빴던것 같아요. 나에게 너무나 미련하게 보였고, 그런 만큼 미친 사람들 처럼 느껴진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종교, 불교는 내가 믿지 않아도 내가 만일 종교를 믿는다면 불교쪽이 가깝지 않을까? 그런데 인생이 살아 보려고하는데 안 살아지더라고요. 어느 정도냐 인생을 어느날 정신 차려 보니까, 사는게 죽는것 만도 못하더라고요. 그런 만큼은 유일한 내 인생의 피난 처가 죽음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인생을 좌절한 인생이라고 하잖아요. 무너진 인생이죠. 그때 저의 생각 속에 떠 오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어렸을때 과자얻어 먹기 위해서 교회 가서 들었던 말씀인데 나는 몰랐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의 좌절 속에서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나를 부르신 겁니다.
참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나니까, 정말 인생이 새 하늘과 새 땅이더라고요. 이런 인생이 있었구나.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내 안에 풍성하게 누려지는 만큼은 진짜 다 만물이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무엇이 바껴지고 좋아지고 그런데 아니고, 내가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겁니다. 그런 만큼 이 본문 말씀의 삭게오. 제가 삭게오가 됐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그때 저의 인생이 예수께서 삭게오의 집에 임하시고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그래서 저는 아브라함이 누군지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데, 그냥 믿어지더라고요. 그 이후 지금 몇년째 예수를 믿고있습니까? 48년째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한 2-30년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은 확신 했고요.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었고요. 그런데 몇십년 믿으면서도 참 믿는 내 인생을 보며 살아가는 내 인생을 볼때에, 분명 하나님이 나를 구원으로 불러내셨을때, 그때는 그 구원의 감격이 충만 했던 만큼은 그때가 가장 맞는것 같았고, 그 외에도 더 잘 알고 믿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속일수가 없잖아요. 여러분 내가 믿는건 중요한게 아니에요. 이걸 하나님이 몇십년 동안 믿으면서도, 나는 믿는다고 하는데, 믿고 인생을 산다고 사는데, 속일수 없는 사실로 계속 나타내주고 있는데도 정말 내가 혼돈 했었구나. 그래서 가끔 가다 그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 복음은 속지 않습니다. 그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능력인 만큼은 믿는 자들의 인생도 속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도 몇십년 동안 헤맸던 과정, 저는 이제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내게 선을 이루셨구나. 저는 이것을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또 여러분의 인생속에 이미 하셨고,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아야 하는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때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든요. 사도 바울이 얼마나 이 사실을 잘 증거해 줍니까. 혈통적 자손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요. 믿음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3장29절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받는 복을 우리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 나는 헤맸는데, 그런데 헤맸는줄 몰랐죠. 지금도 안 헤매는게 아니라, 지금도 헤매는것을 알아요. 그런데 그 분은 한번도 안 헤매셨더라고요. 그런 만큼 항상 그 분은 내 인생속에 부르심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내 인생속에 항상 변함없이 나타내셨더라고요. 오늘 구원이 이집에 임하였으니.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로다. 아멘.
일본 동경 집회 1강중.
첫댓글 소중한 녹취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