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억울했을까요
배우자와 함께 외출을 하는 날, 유리병에 물을 채워 제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물병을 꺼내 가져갑니다. 제가 신경쓸까봐 대신 가져간 거지요. 고마웠습니다.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병에 대한 모든 권리와 책임을 맡겼습니다. 밖에서 맛나는 식사도 하고 담소도 나누었습니다. 반나절의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저희는 물병을 두고 왔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뿔싸!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제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습니다. 무거운 물병도 아닌데 굳이 가져가더니 이 사달이 난 겁니다. 그냥 놔뒀으면 제가 어련히 챙겼을 텐데요. 배우자는 미안해하며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거리도 멀고, 짜증이 나 그만 두라고 했습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 할 수 있지요. 얼마 전엔 저도 플라스틱 물통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요.
곰곰이 되짚어보니 ‘남의 물병을 맡아줬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무책임하게 잃어버리다니’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문득, 산티아고 길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날, 작은 배낭을 안고 탔는데 배우자가 그걸 위에 짐 놓는 칸에 올려 주었습니다. 무겁지도 않은데 굳이 뭘 그러나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고 내린 겁니다. 그때도 배우자는 미안해하며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당황해서 나온 말일 뿐, 영영 가방을 찾을 순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맡아준다고 한 거야.’ 라며 날선 반응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방을 잃어버린 게 온전히 배우자의 잘못일까요? 저도 깜박 잊었으면서 배우자의 탓만
하는 게 과연 옳았던 걸까요? 저는 같은 상황에서 같은 언행을 마치 패턴처럼 반복하곤 합니다.
‘놀랐지? 할수 없지 뭐. 아끼는 물건인데 속상하긴 하네.’ 라며 부드럽게 말할수도 있었을 텐데요. 이런 제 모습을 보며, 저희 부부의 대화 습관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반복된 제 언행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실수와 허물을 무책임함으로 규정해 놓은 그 뿌리에는, ‘나는 끝까지 책임져야만 한다.’는 잘못된 신념이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보관하는 일처럼 어떤 책임을 맡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행동을 할 수 있냐는 거죠. 그냥 물병 하나를 실수로 잊어버렸을 뿐인데 중대한 일을 책임지지 못한 죄인으로 여긴 겁니다.
어릴 때부터 과도한 책임감을 느끼며 살았던 저의 그림자입니다. 실수와 무책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아내를 보면서 배우자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잃어버린 물병이 준 교훈을 되새기며, 새해부턴 잘못된 패턴을 고쳐보도록 애써볼 양입니다. 아울러 배우자의 실수와 허물을 눈감아 줄 수 있는 지혜도 청하면서요.
‘침묵하는 것, 남의 말과 행위와 생활을 보지 않을 줄 아는 것은 커다란 지혜다.’(십자가의 성 요한 「사랑에 대하여」)
첫댓글 좋은 글 고맙습니다
용기내어 인사드립니다. 좋은 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다른 글들도 읽는 중입니다. 감동이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