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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家 樂善齋 小考
儉不止陋 華不止奢
검소하지만 누추한데 이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운데 이르지 않았댜
다른 궁과는 달리
단청이 되 있지 않아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툇마루의 나무 조각과 낙선재의 문창호는
여성스럽고 섬세해 보이고
낙선재
보물 제1764호.
1847년(헌종 13)에 중건된 궁궐 내 사대부 주택형식의 건축물.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세워진 건물.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에 위치.
맨 좌측에 낙선재가 크게 자리 잡고 그 우측으로 석복헌과 수강재가 연이어져 있으며,
뒤편에는 화초, 석물, 꽃담 굴뚝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화계와
그 위의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이 위치해 있다.
이 건물들을 통틀어 樂善齋 라
낙선재 경내는 대략 8천여평으로 원래는 창경궁에 속했던 燕寢의 하나였다.
낙선재와 석복헌 후원의 수석도 아름답고
굴뚝과 꽃 담장이 있는 만월문은 청나라 풍이라 인상적이다
上凉亭에 올라가 보니 낙선재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정겹게 느껴진다.
고종대에 들어와서 중희당과 가까운 낙선재를 종종 편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특히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낙선재를 집무실로 정하고
대신들과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였다.
그 후 조선왕조 마지막 영친왕 이은이 1963년부터 1970년까지 살았으며,
1966년부터 1989년까지는 이방자 여사가 기거하였다.
낙선재는 연경당과 함께
궁궐 내에서 단청을 하지 않고
일반적인 주거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낙선재의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으로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
낙선재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둥 위 짜임은 간소한 초익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서쪽 끝 한 칸은 앞으로 돌출시켜 2칸 누마루를 두고 제일 뒤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 옆으로 2칸 대청이 있고 다시 2칸 온돌방을 두었으며 가장 동쪽 칸은 마루방이다.
가운데 4칸은 전퇴 부분을 개방해서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누마루 아래에서 아궁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에는
현대적인 느낌의 추상적인 문양이 장식되어 .
-얼음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어 빙렬(氷裂)문양.
장식 효과와 함께 화재를 경계하는 의미도 지닌다.
각종 창호의 무늬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실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원형문이 있다.
낙선재의 후원
장대석으로 쌓은 화계가 있고 괴석 등을 전시하였다.
또 벽돌로 문양을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은 아름다운 굴뚝.
화계 뒤로는 上凉亭과 書庫가 있고,
서쪽으로 소주합루와 만난다.
여기에 많은 양의 서화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낙선재 후원에서 소주합루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만월문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만월문은 벽돌로 쌓은 것으로 개구부가 원형이다.
조선 후기부터 궁궐에 등장하는 중국풍 요소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낙선재 정면과 마당.
왼쪽에 보이는 출입구가 정문이다.
마당 앞에 우물이 하나 보인다.
낙선재 정문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궁궐에서는 당연히 설치하는 것이고 주변 행랑채보다 한층 높인 대문
초기에는 종2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만 세울 수 있어서 지체높은 양반집의 상징이 되었는데
나중에는 웬만한 양반집들은 다 솟을대문을 세웠다.
처마를 살펴보자.
단순히 둥근 서까래 하나만 지붕을 받친 홑처마 지붕이다.
낙선재 안에서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중문은 다포식 처마이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통하는 중문.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 보다 훨씬 적음에도 불구하고
지붕 아래 처마는 다포식이다.
홑처마로 세우면 솟을대문의 지붕이 낮아져
담장 높이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므로
지붕을 높이기 위해 다포식으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정문 현판에 장락문이라고 되어 있다.
멀리 화계 위로 꽃담이 보이고 그 뒤로 상량정이 보인다.
상량정(上凉亭)은 평원루(平遠樓)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바끈 것이다.
육각형의 육모정으로 계자난간에 다포식 누각인데 돌기둥 위에 세워.
장락문
창덕궁에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이 낙선재,
다른 하나는 연경당 정문.
장락(長樂)
중국 전설에 나오는 것으로 불사약을 가진 선녀 서왕모가 살던 월궁(月宮)의 이름이다.
이를 차용해 온 것은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이 오래 장수하기를 기원하기 때문이다.
낙선재
사각 기둥들이 단정하게 늘어선 것이 마치 엄격한 유교질서를 보는 듯 하다.
낙선재 현판의 글씨는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사람
낙선재 정면
왼쪽에 보이는 건물과 가운데 보이는 건물의 기단에 높이의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은 항상 기단을 먼저 세우는데
이는 습기를 막고 온돌의 영향도 있다.
기단의 고저는 신분 고저를 나타낸다.
주인은 당연히 종보다 기단이 높은 곳에서 산다.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은
평소 검소해 자신이 사랑한 경빈 김씨를 위해 이 낙선재를 지을 때
단청도 하지 않고 '궁'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채 낙선재를 지었다.
헌종이 후궁을 새로 맞으니
후궁이 된 경빈 김씨는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복을 내려주라고 석복헌도 지어주었다
나중에 수강재에 순원왕후 김씨가 기거함에 따라
가까이에서 할머니를 모시라는 뜻이었다.
현판에 '大院君章'이라는 落款이 새겨져 있다.
낙선재 樂善齋
낙선재는 조선 24대왕 憲宗의 사랑채이다.
헌종은 그의 어머니 神貞王后 趙氏의 평가대로
책을 좋아해서 서첩 등 진귀한 서적들을 이 낙선재에 가득했다고 한다.
낙선재의 현판도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의 글씨이고,
평원루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의 글씨이다.
보소당 寶蘇堂
창덕궁 보소당은 낙선재의 동쪽에 걸린 편액이며
소동파(蘇東坡)를 보배롭게 여기는 집이란 뜻
낙선재를 건립한 헌종의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청나라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이 소동파(蘇東坡)를 사모하여 보소재(寶蘇齋)라는 호를 사용.
옹방강과 최초로 만난 조선 문인은 박제가,제자인 김정희로 이어졌으며 추사 김정희 또한 같은 당호를 썼다.
수강재 壽康齋
헌종의 대왕대비이며
23대 순조의 妃인 順元王后 金氏를 위한 처소였다
낙선재 왼쪽 누마루 밑의 돌기둥 안쪽에 빈 공간이 있고
그 안벽에는 이런 문양이 있는데 궁금해한다.
이것은 온돌이므로 불이 나지 않도록 상징성을 가진 문양으로
이를 빙렬(氷列)이라고 한다.
돌기둥 위 누마루 나무 기둥이 조금 보이는데
그 옆으로도 낙양각을 설치하였으나 단청은 없다.
희정당 입구와 비교하면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한 지를 알 수 있다.
머름대 너머로
방안을 가로질러
건너편 방문 너머의 화계가 살며시 보인다.
한옥은 이런 풍경작용이 제일 큰 특징이다.
낙선재에서 승화루를 바라본다.
전돌을 잘 사용하여 질서정연한 담장과 굴뚝, 예쁜 쪽문까지 만들어 전통 건축의 묘미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굴뚝 위의 연와도 정말 장난감같이 예쁘고 귀엽다.
석복헌으로 들어가는 정문.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집인데
궁궐 안에 후궁을 위해 별도로 건축을 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것이다.
헌종이 얼마나 경빈 김씨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석복헌(錫福軒)
헌종이 총애하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
순종의 비 純貞孝皇后 尹氏가 1966년까지 생활하였다
석복헌이라는 뜻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헌(軒)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들이 많은데 이 말의 원래 뜻은 '높은 곳에 올라 의기양양하다'는 뜻이다.
석복헌은 낙선재를 지은 다음해인 헌종 14년(1848)에 경빈 김씨의 처소로 지었는데
헌종은 석복헌을 짓고 낙선재를 자신의 서재겸 사랑채로 사용하였다.
수강재.
수강 壽康
福 중의 으뜸인 장수와 강녕을 의미
이 건물은 헌종이 1848년(헌종 14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육순을 맞아 정조 9년(1785)에 지어진 것을
고쳐서 지어드린 곳이다.
단청을 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제23대 국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본관 안동)는
68세의 긴 생애 동안 두 번의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특별한 경력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안동 김씨는
순원왕후를 비롯해 헌종비 효현(孝顯)왕후와 철종비 철인(哲仁)왕후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효현왕후·철인왕후는 각각 김조근(金祖根)과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는데,
김조근은 김조순과 7촌간이고 김문근(金汶根)과는 8촌간이었다.
뒤에서 보듯이 이런 국혼은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연히 안동 김씨의 세력을 크게 팽창시켰다.
순원왕후의 왕실 생활은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녀는 가례를 올린 지 7년 만인 20세 때 효명(孝明)세자(1809년(순조 9) 8월 9일)를 낳았고, 그 뒤에도 명온(明溫. 1810년 10월)·복온(福溫. 1818년 10월)·덕온(德溫. 1822년 6월)공주를 계속 순산했다. 대군을 낳았다가(1820년 2월) 석 달 만에 사망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다복한 생활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40대 이후 개인적 슬픔이 연이어 닥쳤다.
1827년(순조 27) 2월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했지만 3년 뒤 세상을 떠났으며(1830년 5월), 2년 뒤에는 명온·복온공주가 거의 동시에 사망했다(1832년 6월과 5월). 2년 뒤에는 순조도 승하했고(1834년 11월), 막내 덕온공주도 1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1844년 5월).
그러니까 순원왕후는 남편과 자녀가 모두 자신보다 일찍 사망하는 깊은 인간적 슬픔을 겪은 것이다. 맏아들과 지아비를 잃었을 때 왕후의 나이는 45세였다.
두번의 수렴청정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19세기 중엽의 세도정치와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국어사적으로도 귀중한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순원왕후는 20여년을 더 살면서 두 번에 걸쳐 10년 동안 수렴청정을 시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청정은 1834년 11월 18일 헌종이 8세로 즉위하면서 시작해 7년 동안 시행되었다.1840년(헌종6) 12월까지
두 번째 청정은 1849년(헌종15) 6월 6일 헌종이 22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시작되었다. 61세의 대왕대비는 그날로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의 셋째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시킨 뒤 3년 동안 청정했다(1851년).
왕후의 청정은 몇 가지 특징과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된다.
-우선 정치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신하들과의 협력 관계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려고 했다. 그 까닭은, 스스로의 신중한 판단과 처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동 김씨는 물론 그들과 가까운 인물들이 이미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봉조하 남공철(南公轍), 영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 영의정 심상규(沈象奎)는 김조순의 오랜 지기였고, 김유근(金逌根. 판중추부사)·김난순(金蘭淳. 우참찬)·김이재(金履載. 이조판서) 등 안동 김씨의 중심 인물은 요직을 맡아 활발히 움직였다.
-다음으로 왕후는 세도정치의 여파 속에서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효명세자를 추숭(追崇-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을 칭호를 내림)하고 종묘를 확장해 순조와 익종을 세실(世室- 종묘의 정전(正殿)에 안치한 신위)로 모신 것은 그런 주요한 시책이다. 종묘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이때였다.
아울러 그녀는 안동 김씨 출신이었지만, 외척 가문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예컨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대표하는 인물인 김유근과 조만영을 어영대장과 호위대장에 번갈아 임명해 군권의 편중을 막았고, 이조판서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출신을 교대로 제수했다.
-왕후가 수렴청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현안은 민생이었다. 왕후는 자연재해 등으로 고통을 겪는 백성에게 조세를 탕감해 주고, 다른 지방의 곡식을 이용해 진휼(賑恤- 흉년을 당하여 가난한 백성을 도움)했으며, 부족한 재정은 내탕(內帑- 왕실 재정)으로 해결했다. 수령의 탐학을 적발하지 않는 대신은 강하게 질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은 세도정치에 있었다. 그런 구조적 폐단을 해결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시책은 부분적인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순원왕후는
1850년(철종 1) 국모로 임어(臨御)한 지 50년이 되었고, 그 한 해 뒤 두 번째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났다. 1857년(철종 8) 8월 4일 68세로 승하한 왕후는 인릉(仁陵.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에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수렴청정이라는 이례적 일이지만, 순원왕후는 적지 않은 정치적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 자취가 담겨 있는 주목할 만한 자료는 한글 편지다. 규장각에 57점을 비롯해 여러 개인들도 소장하고 있는 그 편지는 당시의 정치사뿐만 아니라 국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순원왕후, 이승희 옮김, [순원왕후의 한글편지 |
낙선재 후원 길
가는 길에 문 옆에 장식된 포도 무늬
다산(多産)을 상징한다.
포도송이를 닮은 8자가 두번 겹쳐지는 8월 8일은
포도데이라고 합니다.
낙선재 뒤뜰의 花階
- 장대석으로 4~5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높이 1.5~2m의 연속무늬의 꽃담으로 뒷동산과 구분
- 제일 앞에 괴석분과 연지가 있다.
가운데 괴석분에는 삼신산을 의미하는 소영주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굴뚝, 괴석, 금사연지 등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운비옥립 雲飛玉立
운비옥립은 글자대로는 구름이 날고 옥이 서 있다는 뜻.
이 말은 원래 당나라 두보의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 방형수조에는 '금사연지'라 새겨져 있다.
琴史硯池
금사연지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역사책을 읽는 벼루 같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낙선재 본채의 바로 뒤에 소영주라는 石物이 있는데, 그 옆에 있는 네모난 돌 연못이다.
벼루처럼 네모지게 생겼으므로 벼루 연자 硯을 쓴 것이다.
소영주 小瀛洲
소영주는
작은 영주라는 뜻이다.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데, 영생 불사하는 신선들이 거주하며 불사약이 자란다는 전설상의
공간이다. 봉래는 금강산, 방장은 지리산, 영주는 한라산이라고 일컬어 왔다.
낙선재 본채의 바로 뒤에 있는 石物에 새겨진 글씨이다
.
궁궐 주련이 대표적인 곳은 창덕궁 연경당이라고 한다.
두번째가 낙선재다.
주련에는 한시로 되어 있어서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 당시 청나라와의 영향을 알 수 있으며
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平安竹每日報信 평안죽매일보신
無恙花四時賞春 무양화사시상춘
평안한 대나무는 매일 좋은 소식을 알려오고
탈 없는 꽃은 사시에 봄을 감상케 하네.
대나무와 꽃을 사랑하며 사는 아취(雅趣)를 표현했다.
대나무가 잘 자라는 것을 매일 확인할 수 있으며
꽃들도 늘 정원 가득피어 사계절 내내 봄같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평안죽은
당나라 단성식(段成式, 803?~863년) 9)의 『유양잡조(酉陽雜俎) 속집(續集)』에서 유래했다.
이위공(李衛公, 571~649년)이 북도(北都)의 수령으로 발령받았을 때 그 지방 동자사(童子寺)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길이가 수 척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이위공은 유독 이 대나무가 사랑스러워서
그 절의 승려에게 매일 대나무가 평안한지 물었다.
여기서 유래하여 대나무는 평안의 상징으로 쓰이기도 한다.
무양화는
평안죽과 대구를 맞추고자 만든 말로 후대 시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한다.
원나라 때 학자이자 시인인 사응방(謝應芳, 1295~1392년)의 칠언고시「寄饒州?陽縣唐生」 중에
“매화는 탈이 없고 대나무는 평안하니, 한 해 저물도록 근심 없어 깊은 골짜기를 생각하네.”라는 표현이 보인다.
萬年枝上花千朶 만년지상화천타
四海雲中月一鑑 사해운중월일감
만년 묵은 가지 위에 꽃 천 송이 피었고
사해의 구름 속에 달이 하나 비치네.
나라가 영원토록 융성하고 임금이 인정을 베풀어 주기를 기원한 시이다.
春留桃實三千歲(춘류도실삼천세)
秋見靈花八百年(추견영화팔백년)
봄은 삼천 년의 복숭아를 남기고
가을에는 팔백 년의 신령한 꽃을 보네.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이다.
위 구절은 삼천 년 만에 익는다는 서왕모(西王母) 11)의 반도(蟠桃)를 가리키는데,
이 복숭아를 먹으면 장수한다고 하여 축수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아래 구절의 신령한 꽃은 불로초라고도 불리는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지초가 영화(靈華)가 된다.’<원전 5>는 말이 있고,
사람이 먹으면 팔백 년 동안 장수하는 종류가 있다고 한다.<원전 6>
瓦當文延年益壽와당문연년익수
銅盤銘富貴吉祥동반명부귀길상
와당에는 연년익수(延年益壽)라고 씌어 있고
동반에는 부귀길상(富貴吉祥)이라고 새겼다.
기와에는 장수하라는 뜻의 글을 써 놓았고 구리 쟁반에는 부귀와 복을 누리라
는 글을 새겨 놓았다는 뜻이다.
未央樹色春中見(미앙수색춘중견)
長樂鍾聲月下聞(장락종성월하문)
미앙궁(未央宮)의 나무 빛깔을 봄 햇살 속에 보고
장락궁(長樂宮)의 종소리를 달 아래 듣는다.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長樂宮)은 중국 한나라 때 고조(高祖, 기원전 247?~기원전 195년)가 장안에 지었다는 궁궐 이름이다. 이를 빌려옴으로써 창덕궁이 매우 훌륭한 궁궐이며, 한정당이 특히 고즈넉한 운치가 있음을 은유하였다.
이 구절은 당나라 시인인 이빈(李頻, (?~876년)의 칠언율시 「낙유원춘망(樂遊原春望)」<원전 7> 중에서 경련의 두 구절을 따온 것이다
雲裏帝城雙鳳闕(운리제성쌍봉궐)
雨中春樹萬人家(우중춘수만인가)
구름 속 도성에는 한 쌍의 봉궐(鳳闕) 13)이요,
빗속의 봄 숲에는 수많은 인가로다.
구름 속에 우뚝 솟은 궁궐의 모습과 봄비 내리는 중에 숲 속에 싸여 있는 평화로운 민가의 모습을 묘사했다. 한나라 때 궁궐은 높이가 20장(丈)이나 되었고 꼭대기에 구리로 만든 봉황을 설치했다고 한다.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 701~761 또는 699~759년) 14)의 「봉화성제 종봉래향흥경각도중 유춘우중 춘망지작 응제(奉和聖製 從蓬萊向興慶閣道中 留春雨中 春望之作 應制; 임금께서 지으신 「봉래궁에서 흥경궁을 가는 행각에서 봄비 속에 머물면서 봄날 경치를 바라보며」라는 작품에 화답하여 짓다)」<원전 8>에서 따온 구절이다.
제작 정보 : 경복궁의 함화당에는 위 구절만이 걸려 있고,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에는 두 구절이 다 걸려 있다. 왕유의 같은 시 중에서 함련(?輿逈出千門柳,閣道廻看上苑花)은 취한정(翠寒亭)의 주련으로 걸려 있다.
長樂鍾聲花外盡(장락종성화외진)
龍池柳色雨中深(용지유색우중심)
장락궁(長樂宮)의 종소리는 꽃 너머로 사라지고
용지(龍池) 15)의 버들 빛은 빗속에 더욱 짙다.
장락궁에 꽃이 만발하고 용지에 버들이 비에 젖어 더욱 푸르름을 묘사하여
궁중의 시절이 태평 무사함을 표현하였다.
이 시는 당나라 중기의 시인 전기(錢起, 722~780년) 16)의 칠언율시 「증궐하배사인(贈闕下裴舍人)<원전 9> 중에서 함련의 두 구절이다. 전기의 원래 시는, 궁중의 시절이 이토록 좋으나 자신은 십 년 동안이나 부(賦)를 지어 바치고도 임금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울적하게 지낸다는 내용이다. 속뜻은 벼슬에 대한 청탁을 내포하고 있다.
一庭花影三更月(일정화영삼경월)
千里松陰百道泉(천리송음백도천)
온 정원 꽃 그림자에 삼경의 달이 뜨고
천리의 소나무 그늘에 백 갈래 샘물이 흐르네.
삼경의 달이 온 정원의 꽃을 비추고, 하나의 샘물이 백 갈래로 퍼져 만물을 적셔 주듯
임금의 은택이 널리 퍼짐을 은유한 시이다.
不知鳳沼霖初霽(부지봉소림초제)
但覺堯天日轉明(단각요천일전명)
봉소(鳳沼)에 장마가 막 개인 줄은 모르고
요천(堯天)에 해가 차츰 밝은 줄만 아네.
태평 시절을 맞아 모든 관료들의 문운(文運)이 융성해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요천은 요(堯) 임금이 하늘[天]의 명에 따라 훌륭한 정치를 폈다는 뜻에서
제왕의 성덕이나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용어로 굳었다. 즉 당대가 태평성대임을 의미한다.
봉소는 글자 그대로는 봉황 연못이지만
당나라 때는 황제의 명령을 하달하는 행정의 중추 기관인 중서성을 봉황지, 봉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곧 관료가 목표로 삼는 요직을 은유한 것이다.
당나라 전기의 칠언 율시 「樂遊原晴望上中書李侍郞)」<원전 10> 중에서 함련의 두 구절을 따 온 것이다.
원래의 시는 전기가 중서성의 관원으로 있는 이 시랑(侍郞)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것인데, 작자는 ‘이 시랑이 자신에게도 장마(고난)가 끝나고 밝은 세상이 펼쳐진 줄 모르고 다만 천하가 태평한 줄만 안다’고 하여
상대방이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국가의 안위에만 마음 씀을 칭찬하였다
1) 당호는 집의 이름, 혹은 집의 이름에서 따온 그 주인의 호이다.
2) 蘇軾, 옹방강에 대해서는 7-j-1 낙선재 주련을 참조.
3) 신위는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불린 조선후기의 뛰어난 문인.
4) 조두순은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 양주(楊州), 자원칠(元七), 호심암(心庵), 시호 문헌(文獻)이다.『헌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조선 후기의 외교 문서를 모은 『동문휘고』를 엮었다.
5) 康寧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 攸好德은 성품이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것,
考終命은 명대로 장수하고 편안히 죽는 것을 이른다.
6) 옹방강에 대해서는 7-j-1 낙선재 주련을 참조.
7) 홑처마는 서까래가 한 단으로 된 처마를 말한다.
8) 누마루는 다락마루라고도 하는데,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이다.
9) 단성식은 당나라말의 문인. 자는 가고(柯古). 궁중 비각(秘閣)의 책을 모두 읽어, 박학(博學)이라고 불렸다.
『 유양잡조』는 당시 괴이한 사건, 언어, 풍속 등을 기술한 책이다.
10) 이위공의 이름은 이정(李靖). 자는 약사(藥師). 당나라 개국공신으로 역사와 병법에 통달했다.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세에 이위공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1) 서왕모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女神)인데, 불사의 약을 가진 선녀로 전해진다.
12) 이 주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7-j-1 낙선재의 주련 참조.
13) 봉궐은 궁궐의 문 또는 궁궐을 이르는 말.
중국 한나라 때에 궁궐의 문 위에 구리로 만든 봉황을 장식한데서 유래한다.
14) 왕유의 자는 마힐(摩詰).
당 격변기에 관직을 맡았다가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고 자연에 은거해 많은 시와 그림을 남겼는데,
그림은 현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동기창에 의해 남종 문인화의 창시자로 추앙받았다. 시집 『왕우승집(王右丞集)』이 있다.
15) 용지는 용의 연못으로, 당나라 현종(玄宗, 685~762년)이 흥경궁(興慶宮)에 만든 연못 이름이다.
봉지(鳳池, 봉황 연못)와 같은 의미로 쓰여 중서성(中書省)을 가리키기도 한다.
16) 전기의 자는 중문(仲文)이며 절강성 출생.
자연을 제재로 삼은 온화한 시를 많이 썼으며 특히 오언율시에 뛰어났다.
17) 우 임금·요 임금은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임금들이다.
요·순의 시대는 가장 이상적인 태평성대로 미화되어 왔다.
18) 삼춘은 봄의 석달을 뜻하며 맹춘(孟春), 중춘(仲春),계춘(季春)으로 나뉜다.
19) 삼삼와는 여섯모 움집이라는 뜻이며 귀한서적을 보관했을것으로 추측한다.
20) 사분합문은 문짝이 넷으로되어 좌우와 위아래로 여닫는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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