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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력이 좀 특이한 편이다. 예전에 어른들께 여쭈어본 결과 두세 살 때의 일들도 아주 자세히 기억하는 듯하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자면 그것도 정확하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그렇게 세부적으로 전부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추정컨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그렇게 피치 못하게 내가 기억하고 싶은 어떤 특정한 부분만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서 이미 지나가 버려 이제는 나로써도 어쩔 수 없는 저 수 많은 일들 중, 그래도 어떤 필연의 연유로 지금 내 인생의 기조가 되어버린 중요한 단서가 되는 어떤 일 몇 가지는, 아주 오래전에 형성되었던 풍경이지만, 왜 그런 것인지 잘 몰라도 정말 깜짝 놀랄 만한 매우 선명하고 디테일 높은 색으로 아직 나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고 글을 쓰는 데는 물론이고, 두껍고 거친 오늘과 그래도 아련한 미망의 내일을 살아나가는 나만의 방편을 구하는 데 매우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으며, 그것들은 또한 어떤 매우 특이한 방식의 이미지 형태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 글이나 생각과는 달리 세월 지나도 바래지지 않고 내 머릿속에서 늘 매우 강렬하고 선명한 빛을 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것들은 거의가 흑백이거나, 흑백에 몇 가지 이 세상 원색의 채색이 덧입혀진 그런 사진 같은 질감의 것들인데, 그것들은 말하자면 늘 모든 것들이 나를 휙휙 스쳐 지나가서 지난 후 생각해 보면 사물들의 윤곽이나 어렴풋이 떠오를 뿐, 세부적인 디테일은 다 지워지고 없는 물리를 지닌, 지금 이 현실 세상의 느낌과는 완연하게 다른,
말하자면 어느 순간 어떤 시공에 딱 고정이 된 채 대단하게 선명도가 높고 디테일을 거의 현미경에 가깝게 나타내어 나에게 지속적으로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서, 실제는 현실의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사물 앞에 멈추어 그 사물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의 그런 색상이나 디테일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
물론 아름다운 풍경들도 많이 있으나, 그렇지 않은 풍경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입장에서는 진솔하지 않은 풍경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풍경도, 또는 없어지지도 않을 풍경이므로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에 어떻게 대응하고 사는지 잘 몰라도, 나는 아름다운 것과 늘 동일한 시각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실정이다.
나는 어릴 때 돼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외할머니께서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안 듣는 나에게, 호랑이라던가 귀신 이야기를 하시며 무섭다고 얘기하셨지만,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는 나는 늘 나의 현실에서 자주 목도되던 돼지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웠다. 지금은 잠이 들어도 꿈을 잘 꾸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다 몸살이라도 나서 앓아누우면 꼭 그 꿈을 꾸게 된다.
신기한 것은, 그럴 때면 나는 아직도 그때처럼 두세 살 정도로 어리고, 세상은 통으로 좁고 긴 시골 돌담길 하나와 그 길 중간에 홀로 서 있는 내가 있는 풍경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협소한 길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생겨나 그림이 좀 언짢게 보이지만, 이것 또한 그 꿈속에서 진실이므로 꿈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한 피할 수가 없으며, 아직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 중 어느 것 하나도 피할 능력이 없는 나는, 그러므로 그 풍경을 오롯하게 직시하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도사리는 즈음, 이내 그 길 양쪽에서 자신의 변을 자신의 몸에 잔뜩 묻힌 사나운 돼지 두 마리가 등장해서 나를 어디로도 피할 수 없게 해 놓고 송곳니를 곧추세우며 식식거리며 걸어오다가, 점점 가속을 붙이며 양쪽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때쯤부터 나는 진땀을 흘리며 버둥거리기 시작하는데,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사실 그것마저도 붙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그리되지 않는다.
나중에 그 돼지들이 서로 교차하며 나를 사정없이 덮치고 지나갈 즈음, 으아아아~하고 참았던 비명이 터지는데, 그래도 이런 꿈은 잘 깨어지지 않아 한동안 내가 지르는 그 비명이 메아리치며 내 귀가 멍하도록 들리곤 했는데, 그즈음 나의 꿈 바깥에서 늘 나를 응시하거나 바라보고 계시던 외할아버님이나 외할머님, 어머님의 차갑고도 거친 손 같은 것이 깨지 못한 이쪽의 내 꿈속으로 쑥 들어와, 순간적으로 나를 빼내어 저쪽 현실로 데리고 나간다.
나는 처음에는 그 꿈에서 깨어나면서 다시 섬뜩한 찬물 묻은 거친 손들에 놀라 자지러지곤 했지만, 그러나 나중엔 그래도 그 차갑고 거친 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거듭 깨닫곤 했다. 외할아버님께서는 조그만 낡은 배 두 척을 가지신 선주 어른이셨는데, 딸만 셋을 두셨다. 이모 두 분이 먼저 시집을 가셔서 아직 자식을 보지 못하셨거나, 보셨는데도 또 딸을 보신 그 딱한 처지에서 내가 태어났다.
당연히 내가 외할아버님의 지고지순한 첫 외손자였으며, 외할아버님 입장으로써는 그동안 참으로 희귀했던 옥동자임과 동시에 온 동네 어느 사람에게도 자랑거리인 금지옥엽이었다. 물론 그런 일 아니래도 뱃일이란 게 늘 술을 요구하는 법이라서 늘 술을 달고 사셨으나, 내가 태어난 후로는 배를 고기잡이 내 보내신 후 술을 조금 줄이시고 나를 업고 늘 주막과 바닷가를 오가곤 하셨다.
세상에서의 모든 평화로운 세월은 한순간일 뿐이며, 나머지 저 긴 세월은 한순간의 그런 평화를 바라며 헌신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외할아버지의 그런 행복도 참으로 잠시였다. 내가 4살이 되던 해에 잔잔하던 외할아버님 술병이 깊을 대로 깊어져 몸져눕게 되셨는데, 평생 단 한 번을 아파 드러누워 본 적 없는 분이 한 달의 병고 끝에, 마치 무슨 잊었던 일이 문득 생각나신 듯 어느 날 저녁 밥상 차릴 즈음 벌떡 일어나셔서, 나를 한 번 안아보시겠다고 어머님께 말씀하셨단다.
그 이야기를 어머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나는 상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경험하지도 않은 죽음이란 것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재적으로 어렴풋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늘 인자하시고 호방하셨던 외할아버님께 덥석 덥석 잘 안기고 하던 녀석이, 겁을 내어 그만 주춤주춤 게걸음으로 옆으로 기어가서 안기긴 안겼는데,(이 순간은 정말 아직도 너무나 선연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오, 죽음에 근접한 사람의 그 퀭한 눈빛 하며 허연 구레나룻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꺼칠한 몸이 어떤 촉감인지,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몸 여기저기를 매만지며 토닥거리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문득 잊고 있었던 어떤 중차대한 일이 그제야 생각나신 듯, 내일 아침 일찍 돼지를 사러 시장엘 가야 하니까, 오늘 저녁밥을 좀 먹어야겠다고 하신다.
외할아버님 손을 놓고 그 방을 나오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를 마지막으로 멀리 강 건너 건너다보시듯 바라보고 계시던 외할아버님의 그 애잔한 마지막 눈빛! 부엌에 가니까 외할머님, 어머님께서는 저승 밥이라며 엉엉 울면서 눈물로 밥을 지으셔서 한 상 가득 차려 외할아버님 방으로 가져 들어가시고,
외할아버님께서는 그런 급격하게 변하는 자신과 관련된 그 모든 일들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밥 한 그릇을 큰 고봉으로 맛나게 음미하시며 드신 후, 그리고 잠깐 눈 좀 붙이겠다고 말씀하시고 자리에 누우신 후, 그 길로 아직 눈을 뜨지 않으신다. 나의 이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렬했던 첫 기억의 풍경은, 바로 이렇게 외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그 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다음 내 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내 하얀 한복을 입고 팔다리를 둥둥 걷어 올린 덩치가 좀 작은 장정 네 사람이, 골목에서 외갓집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는 풍경이다. 그들은 네 다리를 새끼로 꽁꽁 묶은 살아있는 시커먼 돼지 한 마리의 다리 사이에 굵은 나무 막대기 두 개를 끼워 낑낑거리며 메고 와서는, 어잇샤, 하며 우물가에 철퍼덕 내려놓는다.
곧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덩치 큰 또 다른 한 장정이, 우물가에 숫돌을 세워놓고 무쇠로 된 커다란 부엌칼을 가져와 썩썩 가는 풍경이다. 그는 혹시나 자기 손이 베일까 잔뜩 긴장을 한 채, 시이 시이 소리를 내며 숫돌에 칼을 시퍼렇게 간다. 외할머니께서는 혹시나 내가 그런 풍경을 볼까 저어하시는 마음으로, 물 묻은 손을 치마에 닦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황급히 가렸지만, 그냥 보는 세상보다 가린 손 사이로 보이는 세상이 늘 더 선명한 법이다.
칼을 갈던 흰옷 입은 장정이 한두 번 칼의 날카로운 부분이 보이게 자신의 눈앞에 모아 세워 엄지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지르며 얼마나 예리한가를 가늠하더니,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우물가 옆에 있던 장독대로 가서는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는 큰 장독 뚜껑을 하나 들고 와서는, 돼지 멱 아래에 무슨 사형선고처럼 덜커덕, 소리가 나게 괴어놓는다.
그리고 그는, 그가 방금 갈았던 그 시퍼런 칼날을 서슴없이 돼지 멱에 갖다 댄다. 나머지 장정들이 달려들어 돼지의 몸통을 붙들고, 문득 칼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 내 마음속 깊이 엄습하였지만, 그 칼날은 내 눈앞에서 햇살에 빛을 번쩍 발하며 우선 그런 나의 어설픈 예감을 가장 먼저 가차 없이 베고 지나간 다음, 주저 없이 돼지의 대동맥을 끊어버린 후, 목뼈 어디쯤인가에서 덜컥, 그 진로가 잠시 막힌다.
그제야 멱이 따진 것을 알게 된 돼지가, 고고하고 청명한 하늘의 정적에 꾸에엑~ 하고 일갈하는 일련의 무시무시한 고함소리ㅡ 한순간 짜르르한 경련이 내 몸과 돼지의 몸을 동시에 훑고 지나가고, 울컥울컥 돼지 모가지의 대동맥 울혈로 솟구치는 저 생명의 정화수, 돼지는 한껏 그 사실을 부인하듯 온 힘을 다하여 머리를 흔들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붉디붉은 꽃 같은 피가 돼지 모가지에서 끊임없이 피어나 세상에 난 분분 날리기 시작한다.
오오, 보라. 대명천지 푸른 하늘에 붉디붉게 피어난 그 꽃잎 같은 피들이, 사방으로 날려 근처의 순결한 사람들 흰옷에 스며들고 마음에 스며들고, 그 꽃은 그리하여 그 돼지가 누운 한 마당 그 우주를 온통 다 붉게 물들이고 나서야, 서서히 잦아든다.
잦아들던 붉은 꽃잎 같던 순수의 피들이, 어느 한 순간부터 그 힘든 핌과 짐의 노역을 움찔움찔 동시에 치르며 땅속으로 스며들다가, 그 모두가 어느 한순간에 딱 멈추어버린 그 소슬한 풍경ㅡ 갑자기 진저리가 부르르 쳐지더니 찔끔, 오줌이 마려웠다.
희디흰 옷 곳곳에 자디잔 붉은 꽃잎 같은 피가 묻은 장정들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돼지가 이 세상에서 순간순간 힘을 빼는 만큼, 돼지에게서 서서히 손을 놓는다. 갑자기 여자들의 부산한 움직임ㅡ 마당 가에 걸어놓은 가마솥에서 아까부터 펄펄 끓던 물을 퍼와 돼지의 몸에 끼얹고,
칼을 든 장정이 내가 있는 이쪽을 쳐다보다가 싯누런 잇몸 드러내며 히쭉 웃더니, 다시 엎드려 숫돌에 칼을 간다. 그런 풍경 사이사이로 여자들이 꿈결처럼 부산하게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마당의 흰 천막 아래 상을 차린다. 잘 저며져 무럭무럭 김이 나는 돼지 생간 한 접시가 상 위에 놓이는 풍경을 마지막으로, 그 꿈은 끝난다.
우리 손자, 돼지 간이 사람한테 그리도 좋단다.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싫어하는데도 자꾸 내 입에 돼지의 간을 밀어 넣고, 나는 우물거리면서 또 묻는다. 외할머니, 외할머니 죽으면 또 돼지 잡아요? 아이고, 똑똑한 내 새끼ㅡ 오냐, 네가 원한다면 잡고 또 잡아야지.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돼지가 제일 무섭다. 듣고 배운 것들 중 어느 한 가지도 버리지 못하여 주체할 수 없이 방만해져 버린 생각들과, 그로 인해 뒤룩뒤룩한 기름기 가득한 사고들이 저들끼리 충돌하고, 그 충돌하는 알력들이 내 육신으로 밀려 올라와 필경은 저 돼지처럼 내 영육도 치욕스럽게 살찔 것이라는 그 예감이 무섭다.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그리고도 또 한참 후 저 돼지가 내 아이의 아이를 불러, 내가 죽으면 또 저 돼지를 잡을 거냐고 묻게 할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도인지 어느 누가 규명하기는 어렵겠지만, 결국은 노력해야 하리라.
각 개인이 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가장 합당한 소원대로 살아야 하며, 죽음에게 그 소원을 뺏기지 말고 죽음의 순간 너머까지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다가 가야만 하리라. 나는 나의 저러한 먼 기억으로부터 길어 올려 지금도 곧바로 현실로 튀어나올 것 같은 선명한 저런 기억들에 힘입어, 오늘도 나 자신의 나태를 나의 가장 크고 무서운 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소원은, 세상에 나의 이 보잘것없는 영육을 혼신 다해 다 바치고, 외할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처럼 퀭한 눈빛과 허연 구레나룻을 간직한 채 그렇게 이 세상을 하직하는 일이며, 그런 것보다 더 나은 어떤 다른 삶의 방도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는 일 따위는, 이제 나에게 그리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아닌 것이다. - 寫 위의 글을 참고하여 작성한 AI 이미지, 音 죤 에버크롬비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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