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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달진문학상 시모음
-2023년부터 18년 동안 이어오던 지역단위인 ‘김달진창원문학상’을 전국 단위인 ‘김달진문학상’에 통합
권수진 시인의 놀이터 - 각종문학상
https://naver.me/G1wU1aMc
제35회 김달진문학상 / 고두현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제35회 김달진문학상 / 김수복
의자의 봄날 / 김수복
노부부는 며칠째 오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목을 빼고 기다리던
직박구리 부부 근심이 많아졌다
눈앞 산수유나무들 늦게 일어나 안절부절이다
제34회 김달진문학상 / 강신형
찬란한 / 강신형
발가락 사이에서부터 꼼지락대던
검푸른 곰팡이가 목구멍 근처에서 허옇게
피어날 때쯤
그도 아니면 가을이 끝날 무렵
화단 들꽃 무덤 아래에서 무심코 보았던
버러지 한 마리의 이별 노래가 끝날 때쯤
한 시절 내내 입었던 외투와 속옷을 벗어
햇볕 좋은 바람결에 걸어 두고
또다시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오르게 되면
어쩜, 아름답게 빛났던 봄꽃 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몰라
썩어져 찬란한,
제34회 김달진문학상 / 장석원
곡산에서 대곡으로 / 장석원
철로에서 피 냄새가 솟는다
내가 지녔던 기척
박동이 느려진다
나를 죽이고 다른 나를 데려온다
사랑이 허물어진 자리에
꽃이 피어오르고, 잊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마른다, 면도로 나를 긁어내면
피 떨어질까, 내게는 흘릴 것이 없다
그날의 나, 비등점에 가까워진 너에게 말한다
자유의 다른 말, 잃을 것이 없다는 것 슬픔이 없다는 것 잊을 사람이 없다는 것
떠난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버림받았지만 나는, 그 사람을 버리지 않았다
거기 내가 쓰러져 있었다
무너질 수밖에 꿇을 수밖에
갈라진 살 때문에 쏟아진 피 때문에
나는 패했다
나는 전사가 아니다
내가 떠난 후에 무엇이 있을까 한 줌 빛 한 움큼 회한 뼛가루 남아 있을까 이후에 후회 후에 나는 얼룩질까
어둠 속 살과 뼈 선명하다
검은 날개를 펼치고 그 사람 돌아온다
제33회 김달진문학상 / 이현승
생일 소원 / 이현승
- 생일을 맞은 이태민으로부터
모든 생일은 엄마가 가장 아프고 가장 기뻤던 날이에요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건
그날 아픈 엄마가 후루룩 넘겼던 미역국을 먹는 거지요
저는 요리사가 되는 게 꿈입니다
저는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가 되고 싶었어요
저는 남자니까 아이를 낳을 수 없지만
누군가가 먹고 행복해지고 특별해지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스위치를 올리면 환하게 불이 켜지듯이
제가 만든 달콤한 케이크를 먹고 엄마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원을 빌 때,
하나만 빌어야 하니까 건강을 비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하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그걸 다 하루아침에 할 수가 없어서 가족이 되는 거지요
서로 좋아서 마주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표정을 짓다보면 닮아지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닮는 거 알죠?
사람을 닮게 하는 요리를 하고 싶어요
우리는 만나면 안녕? 하고 묻고
헤어질 땐 안녕, 하고 말해요
질문이고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 안녕이에요
엄마가 제 소원을 묻는다면 저는 부탁하고 싶어요
안녕해주세요. 안녕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안녕이 되고 싶어요
오늘은 열아홉 번째 생일입니다
맨날 그날이 그날인 날에는 특별한 것이 먹고 싶었는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평범한 미역국이 먹고 싶어요
제 생일에 미역국을 먹고 같이 생일이 되어주세요
가족이 되어주세요
이현승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문학동네시인선 160)
제32회 김달진문학상 / 이산하
악의 평범성 / 이산하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 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곽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 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다
창원시 김달진문학관 편 <제32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서정시학)
제31회 김달진문학상 / 나태주
어리신 어머니 / 나태주
어머니 돌아가시면 가슴속에
또 다른 어머니가 태어납니다
상가에 와서 어떤 시인이
위로해주고 간 말이다
어머니, 어머니, 살아계실 때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부디 제 마음속에 다시 태어나
어리신 어머니로 자라주세요
저와 함께 웃고 얘기하고
먼 나라 여행도 다니고 그래 주세요
나태주 시집 <어리신 어머니>(서정시학 시인선 168)
제30회 김달진문학상 / 곽효환
너는 / 곽효환
비에 젖은 통영에 가서 얼마간 머물고 싶다고 했다
너는
날이 춥고 바람 차다고 옷을 단단히 입으라고 했다
나는
바람을 갖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어렵다고
한꺼번에 울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조금씩 나누어 울었다고 이제
더 이상 소리 내어 울지 않기로 했다고
너는
젖은 나무껍질 냄새가
몸 구석구석에 배어 지워지지 않는다고
아직 잎새를 다 떨구지 못하고
우투커니 겨울을 맞는 나무 한 그루에
나, 라고 이름 붙였다고 했다
너는
미세먼지 가득한 연무에 싸인 겨울 도심 공원
걸음마다 마른 잎새가 바스락거리며 내려앉았다
멀리 왔다고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고
조금은 쓸쓸한 것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너는, 나는
많이 싸웠어야 했다
불확실한 위험과 시련에서
등 돌리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그 차오르는 말들을
그 세세한 기억들을
그 기적같은 감정을 지키기 위해
한때 가까웠던 우리는
더 많이 더 열렬하게 싸웠어야 했다
아무 데도 없으나 어디에도 있는
너라는 깊고 큰 구멍
곽효환 시집 <너는>(문학과지성사 시인선 517)
제29회 김달진문학상 / 신달자
우연이 아니다 / 신달자
북촌으로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할아버지 노방저고리 단추만 한 이 한옥도 우연이 아니다
나는 되돌아서서
다시 되돌아서서
느리게 느리게 북촌을 걸으며 되돌아서서
걸어온 내 생을 본다
산으로 둘러싸인 작을 마을 거창
가끔 하늘이 열리며 서울을 그리워하던 곳
어머니라는 말 친구라는 말 사랑이라는 말을 배운 일
그렇게 산에서 부산 바다로 다시 서울 한강으로
그게 어디 우연이겠는가
되돌아서서 바라보면 다 예쁘다
다시 돌아가진 않겠지만
결코 돌아가진 않겠지만
나는 지금
다시 되돌아서서
지난 시간들을 어루만진다
어루만지다가
노후의 계단을
시큼하게 본다
신달자 시집 <북촌>(민음의시 227)
제28회 김달진문학상 / 이건청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 이건청
곡마단이 왔을 때
말은 뒷마당 말뚝에 고삐가 묶여 있었다.
곡마단 사람들이 밥 먹으러 갈 때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쫒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묶여 있었다.
날이 저물고, 외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말은 그냥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곡마단 곡예사가 와서 고삐를 풀면
곡예사에 끌려 무대에 올라갔는데
말 잔등에 거꾸로 선 곡예사를 태우고
좁은 무대를 도는 것이 말의 일이었다.
크고 넓은 등허리 위에서 뛰어오르거나
무대로 뛰어내렸다가 휘익 몸을 날려
말 잔등에 올라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는데
곡예사는 채찍으로 말을 내리쳐
박수소리에 화답해 보였다.
곡예사가 떠나고 다른 곡예사가 와도
채찍을 들어 말을 내리쳤다.
말은 매를 맞으며 곡마단을 따라다녔다.
곡마단 사람들이 더러 떠나고
새 사람이 와도
말은 뒷마당에 묶여 있었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꼬리를 휘둘러 날것들을 쫒거나
조금씩 발을 옮겨놓기도 하면서
평생을 거기 그렇게 묶여 있을 것이었다.
이건청 저 <제28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서정시학)
제27회 김달진문학상 / 유안진
충만의 조건들 / 유안진
깜부기도 드문드문 도꼬마리 달개비도 섞였네
쥐도 뱀도 개구리 두꺼비도 들락거리네
숨었던가 새들도 날아오르네
꺾이고 쓰러진 보리대궁 사이사이
지나가는 댓바람이, 지나가는 들쥐가, 붙잡는 도꼬마리가
보릿대를 짓밟아, 꺾기도 하고 붙잡아 세우기도 하네
저런 것들이 우연이기만 할까
저렇게 더불어야 보리밭이 되는가
갑자기 먹구름 몰려와 폭우를 쏟아 붓네
보리누름에 비 오면 흉년 든다 들었는데
폭우가 더해져야 더 큰 충만이 되는가
안다는 건 오직 모를 뿐*이네
———
* 숭산선사의 산문집에서
유안진 시집 <숙맥노트>(서정시학 시인선 133)
제26회 김달진문학상 / 정현종
그림자에 불타다 / 정현종
1
버스 타고
근동 지방을 구불구불 가다가
드넓은 밀밭을 검게 태운
구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 그림자에 타서! 대지는
여기저기 검게 그을려 있었다.
2
욕망 - 구름 그림자
마음 - 구름 그림자
몸 - 구름 그림자에
일생은 그을려,
너 - 구름 그림자
나 - 구름 그림자
그 - 구름 그림자에
세계는 검게 그을려-
3
그 모든 너울을 걷어낸 뒤의
구름 자체를 나는 좋아하고
그리고
은유로서의 그림자에 불타는 바이오나
김달진문학상 운영위원회 편 <제26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서정시학)
제25회 김달진문학상 / 김남조
심장이 아프다 / 김남조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아픔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
그러나 심연의 연주여서
고요해야만 들린다고
심장이 이런 말도 한다
그리움과 회한과 궁핍과 고통 등이
사람의 일상이며
이것이 바수어져 물 되고
증류수 되기까지
아프고 아프면서 삶의 예물로
바쳐진다고
그리고 삶은 진실로
이만한 가치라고
김남조, 김진희 등저 <제25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시집>(서정시학)
제24회 김달진문학상 / 정일근
쉰 / 정일근
아침에 끓인 국이
저녁에 다 쉬어버렸다
냄비뚜껑을 열자
훅하고 쉰내가 덮친다
이 기습적인, 불가항력의 쉰내처럼
남자의 쉰이 온다
일상의 뒤편에서
총구를 겨누던 시간의 게릴라가
내 몸을 무장해제 시켜놓고
나이를 묻는다
이목구비 오장육부
나와 함께 사는 어느 것 하나
나이보다 뒤처져서
천천히 오지 않는다
냄비에 담긴 국을
다 쏟아버렸지만
사라지지 않는 쉰내
냄비를 씻고 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쉰내
이미 늦었다
나의 생은 부패를 시작했다
내 심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빠르게 빠르게.
정일근 등저 <제24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시집>(서정시학)
제23회 김달진 문학상
저물녘 / 장석남
- 모과의 일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장석남 시집 <젖은 눈>(문학동네포에지 044)
제22회 김달진문학상 / 오세영
원시 /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편집부 저 <제22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서정시학)
제21회 김달진문학상 / 홍신선
우연을 점 찍다 / 홍신선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 늦은 쪽방만 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렀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 꽃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 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陰戶)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 찍는가
* 『잡아함경』'맹구설화' 중에서
제20회 김달진문학상 /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 황동규
별을 보며 걸었다.
아파트 후문에서 마을버스를 내려
길을 건너려다 그냥 걸었다.
추위를 속에 감추려는 듯 상점들이 셔터들을 내렸다.
늦저녁에 잠깐 내리다 만 눈
지금도 흰 것 한두 깃 바람에 날리고 있다.
먼지는 잠시 잠잠해졌겠지.
얼마 만인가? 코트 여며 마음 조금 가다듬고
별을 보며 종점까지 한 정거를 걸었다.
마을버스 종점, 미니 광장 삼각형 한 변에
얼마 전까지 창밖에 가위와 칼들을
바로크 음악처럼 주렁주렁 달아놓던 철물점이 헐리고
농산물 센터 ‘밭으로 가자’가 들어섰다.
건물의 불 꺼지고 외등이 간판을 읽어준다.
건너편 변이 시작되는 곳에
막차로 오는 딸이나 남편을 기다리는 듯
흘끔흘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
키 크고 허리 약간 굽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무엇인가 외우고 있다.
그 옆에 아는 사이인 듯 서서
두 손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서리 가볍게 치다 만 것 같은 하늘에 저건 북두칠성,
저건 카시오페이아, 그리고 아 오리온,
다 낱별들로 뜯겨지지 않고 살아있었구나!
여자가 들릴까 말까 그러나 단호하게
‘이제 그만 죽어버릴 거야.’ 한다.
가로등이 슬쩍 비춰주는 파리한 얼굴,
살기(殺氣) 묻어 있지 않아 적이 마음 놓인다.
나도 속으로 ‘오기만 와바라!’를 몇 번 반복한다.
별 하나가 스르르 환해지며 묻는다.
‘그대들은 뭘 기다리지? 안 올지 모르는 사람?
어둠이 없는 세상? 먼지 가라앉은 세상?
어둠 속에서 먼지 몸 얼렸다 녹이면서 빛 내뿜는
혜성의 삶도 살맛일 텐데.’
누가 헛기침을 했던가.
옆에 누가 없었다면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뻔했다.
‘무언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에서
어둠이나 빛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별들이 스쿠버다이빙 수경(水鏡) 밖처럼 어른어른대다 멎었다.
이제 곧 막차가 올 것이다.
김달진문학상 운영위원회 편 <김달진문학상 수상작품집>(서정시학)
제19회 김달진문학상 / 신대철
바이칼 키스1 / 신대철
물살 그림자
투명한 물살 밑에 일렁이는
희미한 문살무늬 그림자
창호에 무슨 소리 어리듯 나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끝에 마른번개 스친 뒤 물은 금시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콧수염 달린 사내가 달려와 소매를 잡아 당겼다. 맨발의 해맑은 얼굴, 나는 망설이다가 그가 미는 대로 밀려갔다. 모래밭이 끝나는 산비탈 중턱 자작나무 사이에 노란 텐트가 열려 있었다. 젊은 여자가 밖을 내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물도 그림자도 깊어서? 나도 환하게 웃었다. 모두 바이칼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나도 두 사람 사이에서 막 태어났다고 하니 소리 내어 웃었다.
바이칼은 호수 이름이 아니라
피와 영혼의 이름이죠?
사내는 내말을 되받아 바이칼은 영혼의 눈빛이라고 신파조로 중얼거렸다. 우리 앉은 자리는 어느새 가설무대가 되었다. 근 내 코에 코 비비고 볼에 볼 비비고 느닷없이 온몸에 서릿발 첫 키스를 날렸다. 아무도 없었지만 물과 바람과 햇빛 속에서 비명소리가 울려왔다. 황폐한 내 몸속에 누가 또 있었던가? 바이칼 소년이? 온몸에 문살무늬 그림자 어른거리고 하늘엔 흰 구름 한 점 기웃거리다 흘러간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리두세 헤이부룰라
검붉은 노을이 꺼지는 저녁, 우리는 장작개비를 들고 구릉에 올랐다. 하늘을 향해 장작불을 피워 불길을 올렸다. 샤먼이 북을 치자 가슴에 묻힌 영혼들이 불려나온다. 빙 둘러서서 춤추며 노래한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이두세 헤이루불라, 맑혀진 영혼들 불길타고 하늘로 올라가고 몸 타고 태초의 어둠이 내려온다.
피부도 족속도 모르지만
우리의 푸른 불기운은
손에서 손으로 넘어간다.
빙글빙글 도는 춤 속에
바이칼 뜨거운 피가 흐른다.
신대철 시집 <바이칼 키스>(문학과지성 시인선 332
제18회 김달진문학상 / 엄원태
물방울 무덤 / 엄원태
아그배나무 잔가지마다
물방울들이 별무리처럼 맺혔다
맺혀 반짝이다가
미풍에도 하염없이 글썽인다
누군가 아그배 밑둥을 툭, 차면
한꺼번에 쟁강쟁강 소리 내며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저 글썽이는 것들에는
여지없는 유리 우주가 들어 있다
나는 저기서 표면장력처럼 널 만났다
하지만 너는 저 가지 끝끝마다 매달려
하염없이 글썽거리고 있다
언제까지고 글썽일 수밖에 없구나, 너는, 하면서
물방울에 가까이 다가가보면
저 안에 이미 알알이
수많은 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엄원태 시집 <물방울 무덤>(창비시선 272)
제17회 김달진문학상 / 조정권
떠도는 몸들, 몸 둘 데를 모르고 / 조정권
1
뉴욕 소호에서 飮酒死한 화가 정찬승이
그림한테 이혼당하고, 귀국전을 연 전시장을 다녀왔다.
그림은 한 점 보이지 않고
전시장 한가운데에
까페가 옮겨와 있다.
홍대에서 뜯어온 벽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생가에서 싣고 온 툇마루도 생생히 살아 있고
오그라진 화실 소파도 살아 있는
의자에 앉아 신문도 보고 낮잠도 자며
술 마시고 있다.
이게 신성한 전시장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객과 시민들과 잡담하며 술 마시며.
그림 한 점 걸지 않은 전시장에
세상 술 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인간 한 점.
미리 보여준 삶의 폐업전.
2
싸옹 빠울루 비엔날레 공동출품하기로 한
김구림은 석달 전부터 손톱을 기르고 있었다.
나는 염불 시를 같이 준비하고 있었다.
장 끌로드 엘로아의 염불음악*을 마음에 깔아놓고......
狂僧의 禪음악을 베낀
존 케이지의 7분 45초,
눈 퍼붓는 날 새벽 오대산 상원사 종소리
잡음으로 깨부수려고.
리허설 장소 공간사랑에서 망자를 위한
깽판 시를 내가 웅얼웅얼대면
함께
김구림이 대짜 손톱깎이로 손톱 깎는 소리를 내고
녹음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내가 이 시대의 치매, 계집 음부 더듬는 고승 흉내를 하며
실어증 환자처럼
생쑈를 할 때
김구림은 계동 바닥을 뒤지며
마른 뼈 날카롭게 부러지는 언 책받침을 찾아가지고 오고 있었다.
형님!
나 이 벙어리짓 때려치우고
내 산꼭대기 올라가 앉아 있겠소.
3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나이 나체에
인민복을 입히고 천안문 광장에서
원반을 던지는 模作像을 출품한
중국 조각가를 나는 잊고 있었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건
그걸 보고 와서
광화문 세종로 이순신 동상 철거하고
어깨에 화염방사기 멘 채
포신처럼 중화기를 들고 서 있는 반가사유상을 만들고 싶다던,
성대 국문과 친구.
춘천에서 꼬치구이로 주저앉은 친구.
호텔에 납품할 곳 찾아 뻔질나게 서울 올라와 바삐
돌아가다 한잔 하게 되면
동상에 조선 갑옷 벗기고
인민복으로 갈아입히고 싶다고 떠들고 있다.
4
아, 해외로 떠돌다가, 떠돌아 돌다가,
국내로 망명한 생들!
국내망명자들.
5
발레리의 40년 고독 앞에
팔팔할 때 한 번, 고개 숙여봤으면 됐다.
더 이상 난 안 숙이련다.
대신, 문안차 홀아비 정병관 선생한테는
그 무덤 앞에 한번 머리를.
빠리 제8대학 도서관 사서
마른 빵과 커피로만 기숙하며
미술사 박사학위 딴 노인 학생.
누보 레알리슴의 화가들
극사실의 현실을 냉정하게 그린
리베라씨옹패들!
정년 5년 앞둔 연세로 이화여대에 모셔와 죽인.
한번도 술과 장미의 나날을 들어볼 시간을 안 준 세상.
한번 찾아가 뵀어야 했는데.
벽제에나 가야
계실까.
* 쟝 끌로드 엘로아(1938-)는 프랑스 작곡가. 한국 여행차 ‘공간’에 들린 이 현대음악가는 頭音을 이용해 새벽 예불 같은 음악을 들려주며 청중에게 드러눕든지 담배를 피든지 편한 자세로 들으라고 미리 설명을 했다.
6
본처한테 그림 다 빼앗기고
평창동 바위꼭대기에 세 살고 있는 김구림은.
미술사랑문화인협의회 같은 곳에 시간강사로 나가 운현궁 같은 곳이 핀
꽃에다 연지곤지 찍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고.
고승관은 맘 쫓겨 괴산으로 들어가
화양동계곡에 이십년간 돌탑 쌓으며
처박혀 나오질 않고.
나는
포크레인 이빨자국 박힌 채석산 실어다
버린 한탄강 하류
포천군 창수면에 글 쓸 집 최근 얻어놓았는데
가 있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골체 처박혀 떠돌던 목은 이색과 양사언 들이
詩會하던 창수면 金水亭
마음에 들여다놓았다가
내쫓아내고
다시 불러다놓고 기웃대고 있는데
가 있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정권 시집 <떠도는 몸들>(창비시선 246)
제16회 김달진문학상 / 조용미
검은 담즙 외 7편 / 조용미
가슴 속에서 검은 담즙이 분비되는 때가 있다 이때 몸속에는 꼬불꼬불 가늘고 긴 여러 갈래의 물길이 생겨난다 나뭇잎의 잎맥 같은 그 길들이 모여 검은 내, 黑河를 이루었다
黑河의 물줄기는 벼랑에서 모여 폭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가르며 옥양목 위에 떨어지는 먹물처럼 낙하한다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깃들이려 한 것이다 生의 단 한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 있다
쓸개물이 모여 生을 가르는 劍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들은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幻이 끝나고 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담즙이 모여 떨어지는 黑河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
지상에서 가장 헛된,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絶滅이다
조용미 시집 <당신의 아름다움>(문학과지성 시인선 538)
제15회 김달진문학상 / 장옥관
가오리 날아오르다 외 5편 / 장옥관
경주 남산 달밤에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아닌 밤중에 웬 가오리라니
뒤틀리고 꼬여 자라는 것이 남산 소나무들이어서
그 나무들 무릎뼈 펴서 등싯, 만월이다
그럴 즈음은 잡티하나 없는 고요의 대낮이 되어서는 꽃, 새, 바위의 내부가 훤히 다 들여다보이고 당신은 고요히 자신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때 귀 먹먹하고 숨 갑갑하다면 남산 일대가
바다로 바뀐 탓일 게다
항아리에 차오르는 달빛이 봉우리까지 담겨들면
산꼭대기에 납작 엎드려 있던 삼층석탑 옥개석이 주욱, 지느러미 펼치면서 저런, 저런 소리치며 등짝 검은 가오리 솟구친다
무겁게 어둠 눌려 덮은 오랜 자국이 저 희디흰 배때기여서
그 빛은 참 아뜩한 기쁨이 아닐 수 없겠다
달밤에 천 마리 가오리들이 날아다닌다
골짜기마다 코 떨어지고 목 사라진 돌부처
앉음새 고쳐 앉는 몸에
리기다소나무 같은 굵은 팔뚝이 툭, 툭 불거진다
장옥관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문학동네시인선 036)
제14회 김달진문학상 / 박정대
馬頭琴 켜는 밤 외 4편 / 박정대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몽골의 악사는 악기를 껴안고 말을 타듯 연주를 시작한다
장대한 기골의 악사가 연주하는 섬세한 음률, 장대함과 섬세함 사이에서 울려나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 모닥불 저 너머로 전생의 기억들이 바람처럼 달려가고, 연애는 말발굽처럼 아프게 온다
내 生의 첫 휴가를 나는 몽골로 왔다 폭죽처럼 화안하게 별빛을 매달고 있는 하늘
전생에서부터 나를 따라오던 시간이 지금 여기에 와서 멈추어 있다
풀잎의 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결이 인다 풀잎들의 숨결이 음악처럼 번진다
고요가 고요를 불러 또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내 그토록 오래 꿈꾸었던 사랑에 복무할 수 있다
대청산 자락 너머 시라무런 초원에 밤이 찾아왔다 한 무리의 隊商들처럼
어둠은 검푸른 초원의 말뚝 위에 고요와 별빛을 매어두고는 끝없이 이어지던 대낮의 백양나무 가로수와 구절초와 민들레의 시간을 밤의 마구간에 감춘다 은밀히 감추어지는 生들
나도 한 때는 武川을 꿈꾸지 않았던가 오랜 해방구인 우추안
고단한 꿈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이 地上을 넘어가서는 은밀히 쉬어가던 내 영혼의 비트 우추안
몽골 초원에 밤이 찾아와 내 걸어가는 길들이란 길들 모조리 몽골리안 루트가 되는 시간
꿈은 바람에 젖어 펄럭이고 펄럭이는 꿈의 갈피마다에 지상의 음유시인들은 그들의 고독한 노래를 악보로 적어 넣는다
밤이 깊었다
대초원의 촛불인 모닥불이 켜졌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 몽골의 밤하늘엔 별이 한없이 빛나는데 그리운 것들은 모두 어둠에 묻혀버렸는데 모닥불 너머 음악 소리가 가져다주던 그 아득한 옛날
아, 그 아득한 옛날에도 난 누군가를 사랑했던 걸까 그 어떤 음악을 연주했던 걸까
그러나 지금은 두꺼운 밤의 가죽부대에 흠집 같은 별들이 돋는 시간
地上의 서러운 풀밭 위를 오래도록 헤매던 상처들도 이제는 돌아와 눕는 밤
파오의 천창 너머론 맑고 푸른 밤이 시냇물처럼 흘러와 걸리는데 아 갈증처럼 여전히 멀리서 빛나는 사랑이여, 이곳에 와서도 너를 향해 목마른 내 숨결은 밤새 고요히 마두금을 켠다
몇 개의 전구 같은 추억을 별빛처럼 밝혀놓고 홀로 마두금을 켜는 밤
밤새 내 마음이 말발굽처럼 달려가 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몽골리안 루트
* 마두금-악기의 끝을 말머리 모양으로 만든, 두 개의 현을 가진 몽골의 전통 현악기.
박정대 시집 <그녀에서 영원까지>(문학동네 시인선 085)
제13회 김달진문학상 / 이정록
무덤에서 무를 꺼내다 외 4편 / 이정록
무덤에서 무를 꺼내다
무값이 똥값이라
밭 가운데에 무를 묻었다
겨울에만 생겼다 없어지는 무덤
봄이 될 때까지 수도 없이 도굴 당하는 무덤
절만 잘하면 무를 덤으로 조는 무덤 밭 한 가운데에
겨우내 절을 받는 헛묘 하나 눈맞고 있다 저 묘 속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얼마나 많이 머리를
들이미셨던가, 그 누가 시퍼렇게 살아 있기에
한 집안의 머리채를 모조리 다 잡아채는가
이정록 시집 <의자>(문학과지성 시인선 313)
제12회 김달진문학상 / 나희덕
엘리베이터 외 4편 / 나희덕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
병원 엘리베이터 타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육중한 몸집을 들이밀며 한 아주머니가 타고 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빽빽한 모판이 되어버렸다
11층, 9층, 7층, 5층……문이 열릴 때마다 조금씩 헐거워지는 모판.
갑자기 짝수층 엘리베이터에서 울음소리 들려온다
어젯밤 중환자실 앞에서 울던 그 가족들일까.
모판 위의 삶을 실은 홀수층 엘리베이터와
칠성판 위의 죽음을 실은 짝수층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야 만난다. 울며 떨어지지 않으려는 가족들과
짝수층 엘리베이터에 실린 죽음을
홀수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흰 헝겊으로 들씌워진 한 사람만이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 남고, 문이 닫히고,
잠시 후 B1에 불이 들어온다, 그 사이에
홀수층 엘리베이터 안에는 다시 사람들이 채워진다
더 들어가요, 같이 좀 탑시다……아우성이 채워지고, 문이 닫히고,
빽빽해진 모판은 비워지기 위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1층, 3층, 5층, 7층, 9층, 11층……
삶과 죽음을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잠시도 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입으로 들어갈 밥과 국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밥과 국을 삼키지 못할 육체를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병든 손을 잡으려는 수많은 손들을
엘리베이터는 나른다, 더 이상 병든 손조차 잡을 수 없는 손들을
나희덕 시집 <마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 시인선 442)
제11회 김달진문학상 / 문인수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외 4편 / 문인수
지라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 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
문인수 <그립다는 말의 긴 말>(서정시학 시인선 112)
제10회 김달진문학상 / 최정례
3분 자동 세차장에서 외 4편 / 최정례
소낙비 쏟아지는 게 좋아 소낙비 속에 물레방아간 같은 소낙비
매맞는 움막 같은 수숫단 같은 수숫단을 비집고 들어가는 3분 자동
세차장이
라디오를 끄고 기어를 중립에 놓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라는 주
문을 외는 거야 중립 브레이크 중립 브레이크 레이크 이크
병든 도깨비처럼 황소 뱃속*에 세들고 싶었지
“황소님 주인님 방 한 칸 빌려주세요 애는 낳았는데 한겨울에 어
디로 이사를 가란 말인가요 며칠만이라도 더“
기습결혼을 했었지 황소 뱃속 같은 곳에서 아이를 낳고 아파트가
당첨됐으나 허물어지고 길길이 뛰고 난리치고 아무나 붙잡고 사정
했지만
“초록이 켜지면 출발하시오”
나가라는군 초록불이 켜지면 방을 빼라는군 빗자루와 비누걸레
는 늘 협박하지 옷 입고 샤워하다 3분 만에 밀려나는군 아무리 방
망이로 땅을 쳐도 끄덕하지 않는 나라 이상한 나라
*이상(理想)의 동화 「황소와 도깨비」에서
최정례 시집 <빛그물>(창비시선 451)
제9회 김달진문학상 / 남진우
타오르는 책 외 4편 / 남진우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웅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물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남진우 시집 <타오르는 책>(문학과지성 시인선 244
제8회 김달진문학상 / 고진하
즈므 마을1 외 5편 / 고진하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 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을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녁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모은다
즈므 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어딘 내 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뜬 별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 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 즈므 마을 : <저무는 마을>에서 유래된,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
고진하 시집 <야생의 위로>(시작시인선 0346)
제7회 김달진문학상 / 송수권
쪽빛 외 6편 / 송수권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때늦은 숨비기꽃 몇 송이 막 피어나고
신신한 아침 햇빛 입을 대다
기절한다
아무도 없다
내가 앉은 자리
무심히 조약돌을 던지면
팽팽한 수평선이 입을 벌리고
바다는 서슬진 유리처럼 퍼어런
금이 선다
아무도 없다
저 물 밖 물쟁이로 떠돌다 온 세월
이젠 떠나지 않으리라
내 영혼 속에 잠든 바다
쪽빛 물발로 깨워서 당신의 이름
뜨겁게 부르리라
송수권 시집 <허공에 거적을 펴다>(지혜사랑 시인선 111)
제6회 김달진문학상 / 이문재
타워 크레인-고독한 산책자의 몽상·7 외 4편 / 이문재
나의 눈이 가는 길, 서울에선 없다, 서울이 수시로 내 눈을 끌어당길 뿐이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 아니다, 그러하니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잠 안쪽에서도 두 눈 뜨고 있어야 하느니
내 눈이 먼저 가 닿아 내가 불려가는길, 사라졌다,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겁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안구 패여나간 나는 말할 뻔한다, 뻥 뚫려 허당인 내 두 눈구멍 속으로 서울은 24시간 형광을 불밝혀 놓는다, 의안은 울지 않느니
내 정수리 위에 거대한 타원 크레인 하나 박혀 있다, 엔진 끄지 않는다, 몸속의 엘리베이터도 멈추지 않고 오르내리느니
내 안에 서울이 죄다 들어와 있구나, 아,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것들이, 어,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는 것들이, 저 분명한 것들이
이문재 시집 <혼자의 넓이>(창비시선 459)
제5회 김달진문학상 / 송재학
감은사에 가다 외 5편 / 송재학
감은사는 없다 감포 바다가 눈 높이까지 밀려와도 감은사 스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들을 쌓아 놓은 두 개 석탑이 감은사를 변명한다 지도에도 감은사로 적혀 있고 길을 물어보면 모두 아 감은사 말이지요, 감탄한다 시커먼 찰주까지 남아 있는 감은사 탑과 탑의 균열은 감은사의 부재와 더불어 꽃핀 현호색을 에워싼다
저 연보라빛 현호색을 가로질러 감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절은 늘 가파르다 계단과 회랑과 높은 천장의 가파름은 삶과 절의 경계인 것 현호색은 감은사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보라빛인 양 내 속에서 번진다
그곳에 감은사가 있어야 하는지 저녁 예불 소리를 듣거나 석등의 불빛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몇 백 년 동안 감은사는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감은사에서 바다까지 수로의 기록과 석탑을 찾았다 내가 감은사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밀어닥칠 해일의 기미와 내 마음을 본뜬 수줍은 현호색 무더기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감은사에서 너무 지체했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이나 바람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도 한다
송재학 시집 <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시인선 003)
제4회 김달진문학상 / 이하석
가야산 외 5편 / 이하석
계류와 더불어 칭얼대며 내가 숨긴 길. 동굴의 숲가엔
엘레지꽃들이 고개숙인 채 나의 그림자를 응시한다.
그 짧은 생애들의 외롭고 강렬한 눈길 따돌리며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조릿대숲이 앙칼지게 울며 열린다. 큰바람이 내 욕망을 뒤집느라 웅성거린다.
아직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바람의 칼날이 조각하다 부러뜨린 나무가지 끝에
간밤에 눈이 얼리고 간 내 꿈이 싹트고, 산정에서
뒤엉키는 내 마음의 사나운 구름.
이하석 시집 <상응>(서정시학 시인선 107)
제3회 김달진문학상 / 김명인
가을에 외 7편 / 김명인
모감주* 숲길로 올라가니
잎사귀들이여, 너덜너덜 낡아서 너희들이
염주소리를 내는구나, 나는 아직 애증의 빚 벗지 못해
무성한 초록 귀떼기마다 퍼어런
잎새들의 생생한 바람소리를 달고 있다
그러니, 이 빚 탕감받도록
아직은 저 채색의 시간 속에 나를 놓아다오
세월은 누가 만드는 돌무덤을 지나느냐, 흐벅지게
참꽃들이 기어오르던 능선 끝에는
벌써 잎지운 굴참 한 그루
늙은 길은 산맥으로 휘어지거나 들판으로 비워지거나
다만 억새 뜻 없는 바람무늬로 일렁이거나
김명인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 시인선 516)
제2회 김달진문학상 / 이준관
가을 떡갈나무숲 외 5편 / 이준관
떡갈나무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婚禮,
그 눈분신 날개짓소리 들리 듯 한데,
텃새만 남아
山 아래 콩밭에 뿌려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 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山짐승이 혀로 핥아보다가, 뒤에 오는
제 새끼를 위해 남겨 놓았을까? 그 순한 山짐승의
젖꼭지처럼 까맣다.
나는 떡갈나무에게 외롭다고 쓸쓸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러자 떡갈나무는 슬픔으로 부은 내 발등에
잎을 떨군다. 내 마지막 손이야. 뺨에 대 봐,
조금 따뜻해질거야, 잎을 떨군다.
이준관 시집 <천국의 계단>(서정시학 시인선 104)
제1회 김달진문학상 / 박태일
「명지 물끝」 연작 외 / 박태일
「명지 물끝·5」
꼬리 문드러진 준치가 희게 솟다 가라앉았다 장어발이 통발 멀리 드문드문 갈잎이 되받아 주는 청둥오리 울음소리 마지막 찌 끝에 몸을 얹고 물가 곤한 물거품처럼 홀로 밀리면 겨울은 늘 낯선 마을 첫골목이었다.
명지 물끝.6
산 하나 산에 떠밀려 와 물밑으로 내려선다 쇠기러기 꾸룩 꾸룩 그새로 어깨 짚고 따음표처럼 돋았다 저녁 물마을 낮은 데 낮은 길은 멀리 빗발로 그치고 쥐불 식은 잿빛 두렁 태삼아 태삼아 하얀 당파 씹으시며 어머니 날 부르는.
명지 끝물.7
날개짓 푸른 하늘 꿈꾼다 건너 산자락 재실 낮은 골짝 다시 돌아보며 웃을 때 발 끝에 닿았다 달아나는 털게 달랑게 차운 손 호호 갈잎 젖히며 스며도 함께 쉴 곳 어디에도 없지 잊어버리자 가슴 가운데를 지르는 바람 한 끝 물오리 고개 묻은 모래등 멀리 따로 길을 닦고 터를 이루어 사람들 마을로 가는 모든 지름길을 지워버린다 잊지 말자.
명지 끝물.8
물 곳곳 마을 곳곳 눈 내린다 포실포실 보스랑 눈 아침에 앞서고 뒤서며 빈 터마다
가라앉는 모래무덤 하나 둘 어허 넘자 어허 넘어 들에서 물로 하늘 밖으로 내 목젖 마른자리 발톱을 세워 훌훌이 날아가는 붉은 물떼새.
박태일 시집 <풀나라>(문학과지성 시인선 263)
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시를 만나게되서
즐거운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