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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 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 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여지도서(輿地圖書) 全羅道 珍島郡
壇廟
社稷壇。 在郡西三里。
文廟。 在鄕校, 郡北二里。
城隍祠。 在郡東五里。
厲壇。 在郡北三里。
鳳巖書院。 在郡東三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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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사우(珍島祠宇) ->진도(珍島) 사우(祠宇)
*연려실기술 서원 1814/2465
*진도는 지명이고 사우는 앞이 비었는데 봉암사우(鳳巖祠宇)라고 해야 함
봉암사(鳳巖祠) 조선 숙종(肅宗) 때 전라도 진도(珍島)에 건립한 사당.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남이성(南二星)ㆍ김수항(金壽恒) 등을 배향함.
1683 한국/조선후기 , 전라도/진도 , 유적/건물/사당
조병현(趙秉鉉) 1791년(정조 15)~1849년(헌종 15)
성재집(成齋集) 조병현(趙秉鉉)생년1791년(정조 15)몰년1849년(헌종 15)자경길(景吉)호성재(成齋), 우당(羽堂), 국재(菊齋)본관풍양(豐壤)특기사항이의철(李懿喆), 조두순(趙斗淳) 등과 교유
成齋集卷之十二 / 家狀 / 先府君家狀 中草未定本
趙得永 1762 1824 豐壤 德汝 日谷 文忠
헌종 | 1 | 1835 | 을미 | 道光 | 15 | 45 | 8월, 玉山書院에 가다. ○ 9월, 陶山書院에 가다. |
乙未五月享于珍島郡之鳳巖祠。祠卽蘇齋盧公守愼俎豆之院也。以府君杖屨之所。而忠孝正直。文章德業。一道士林之所咸稱而侑食焉。
순조 | 12 | 1812 | 임신 | 嘉慶 | 17 | 22 | 11월, 부친이 災異로 인해 朴宗慶을 疏斥하였다가 端川府로 유배되고 다시 珍島郡 金甲島로 移配되다. |
순조 | 13 | 1813 | 계유 | 嘉慶 | 18 | 23 | 3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순조 | 14 | 1814 | 갑술 | 嘉慶 | 19 | 24 | 윤2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6월, 磚洞으로 이사하다. |
순조 | 15 | 1815 | 을해 | 嘉慶 | 20 | 25 | 2월, 장남 趙龜夏가 태어나다. ○ 8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순조 | 16 | 1816 | 병자 | 嘉慶 | 21 | 26 | 3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典洞으로 이사하다. |
순조 | 17 | 1817 | 정축 | 嘉慶 | 22 | 27 | 4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7월, 차남 趙鳳夏가 태어나다. |
순조 | 18 | 1818 | 무인 | 嘉慶 | 23 | 28 | 2월, 금갑도에 가서 부친을 뵙다. ○ 8월, 부친이 풀려나 9월에 楊州 泉川 丙舍로 돌아오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전라도(全羅道)
진도사우(珍島祠宇) : 노수신(盧守愼)ㆍ이경여(李敬輿)ㆍ정홍익(鄭弘翼)ㆍ김수항(金壽恒)ㆍ남이성(南二星) 호는 의졸(宜拙), 예조 판서를 지냈다. ㆍ신명규(申命圭) 호는 적안(適安), 집의(執義)를 지냈다. ㆍ이민서(李敏叙)ㆍ조태채(趙泰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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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1728년(영조 4)~1799년(정조 23) 정부(定夫) 솔옹(率翁) 청풍(淸風) 문충(文忠)
순조 2 1802 임술 嘉慶 7 - 8월, 正祖 廟庭에 배향하다. ○ 楊州 靑龍洞에 사당을 세우다.
순조 7 1807 정묘 嘉慶 12 - 7월, 時派 계열의 玉堂에서 연명 차자를 올리고 三司가 합계하여 追律을 청하다. ○ 8월, 大臣의 賓廳啓辭에 따라 正祖의 廟庭에서 黜享하고 관직을 追奪하다. 형 金鍾厚에게도 追律을 가하다. ○ 9월, 배향된 羅州, 平海, 楊州의 書院을 철폐하도록 하다.
고종 3 1866 병인 同治 5 - 다시 正祖 廟庭에 배향되다.
夢梧金公年譜卷之二 / 年譜 / 夢梧金公年譜
二年壬戌。八月。配享正祖皇帝廟庭。
建祠于楊州靑龍洞。
卽公舊第。而已屬他人。士友爲之斂錢贖之。營建祠堂。妥公遺像。○珍島享于鳳巖書院。南海享于竹鳳書院。平海亦立祠宇以享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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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591책 (탈초본 32책) 영조 1년 4월 26일 계사 31/32 기사 1725년 雍正(淸/世宗) 3년
盧守愼 등 七賢의 祠宇에 賜額할 것과 趙泰采도 七賢의 院宇에서 腏食하게 할 것을 청하는 朴齊賢 등의 상소
○ 珍島幼學朴齊賢等疏曰, 伏以臣等所居之郡, 僻在海陬, 距京都千餘里, 蛟鰐與居, 螺蜯爲共, 王化隔遠, 氓俗蚩蚩, 大人君子之迹, 無緣而至焉。然朝之卿士大夫, 不幸而放逐者, 往往相望, 惟其地遠而惡, 故又必其當世淸名直節, 卓然高絶, 遭罹最酷者, 乃來此島。是以, 南土之窮荒僻陋, 莫如臣等之鄕, 而賢人蹤跡之多, 亦莫如臣等之鄕, 一境民士, 幸得以聞風覿德, 感發興起, 而臣等, 以遐遠之民, 亦能知君臣之義, 父子之倫, 而免爲禽獸夷狄之歸者, 實賴於此, 則其所以欽仰愛慕, 永世而不忘者, 爲如何哉? 臣等, 謹按
故相臣文簡公盧守愼, 以䆳學淸操, 觸忤乙巳權奸, 在謫十九年, 氣節彌厲,
故相臣文貞公李敬輿, 言論風節, 儀表一世, 曾以守經不撓, 栫棘多年, 及其還朝, 爲國碩輔,
故相臣文忠公金壽恒, 文章學識, 爲世模楷, 以觝排淫邪, 扶植綱常, 爲己任, 而卒罹慘禍,
故參判臣李敏迪, 以敬輿之子, 蔚有父風, 隨父謫所, 敎授島民, 人多化之。至若
故副提學臣鄭弘翼之抗疏昏朝,
故執義臣申命圭之振聲臺閣, 故
判書臣南二星之力扶名義, 皆以孤忠直道, 竄謫於此郡者也。嗚呼, 彼七賢之於臣土, 猶韓愈之於潮州, 蘇軾之於海南, 化鱗介之俗, 歸禮義之邦, 莫非其功, 故玆土民士, 相與創立祠宇, 尸祝而俎豆之, 蓋亦有年矣。第其遐裔事跡, 無由上達, 院楣題額, 尙欠恩賜, 數間突兀, 埋沒無光, 殊非所以聳動瞻聆, 風勵一方之意也。當今忠賢義烈之祠, 遍於八域, 而其最關於世敎者, 無不宣額而褒顯之, 如七賢臣者, 其遺風餘烈, 合在祀典, 而蕭條私享, 無異叢祠, 臣等竊悲之。且伏念
故相臣忠翼公趙泰采, 宏器遠度, 夙蒙聖考之知遇, 逮至辛丑, 冒犯危機, 贊定大策, 雖以是爲群凶所誣, 身陷大戮, 然于今宗社獲安, 東方日月, 依舊照朗者, 實賴其功, 而精忠大節, 可以追配前賢, 樹風百代矣。其始被竄, 實在臣土, 而終受後命於斯, 臣等每誦其冤淚先朝三老相, 悲歌中夜一孤臣之句, 未嘗不抆血相視也。方今聖上臨御, 察其忠貞雪其冤枉, 賜祭贈諡, 哀榮備至, 一國老庶, 孰不仰我殿下褒忠崇節之盛意, 而其在臣郡, 亦當與七賢臣者, 竝享一祠, 以寓一方尊慕之誠, 蓋先賢足跡之所到, 雖經一時杖屨之遊覽, 而猶有院享之設, 況此荷衣蘭佩之所, 翶翔靑楓, 物色依舊, 想其忠魂毅魄, 亦必往來乎其間, 則祀之是邦, 永久不替者, 豈非士林之公議, 而國家之盛典乎? 此臣等所以千里裹足, 齊聲仰籲於九閽之外者也。伏乞聖明, 俯賜察納,
特許故相臣趙泰采腏食於七賢院宇, 而仍命有司, 宣賜恩額, 使忠節諸臣, 無有少一之歎, 海隅章甫, 得免落莫之恨, 以爲一方激勵風化之地, 不勝幸甚。答曰, 省覽爾等之疏, 深嘉尊忠之意, 其令該曹, 卽速, 稟處。
영조 1년 을사(1725) 4월 26일(계사) 비가 옴
01-04-26[28] 노수신(盧守愼) 등 일곱 현신의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해 줄 것과 조태채(趙泰采)를 배향해 줄 것을 청하는 진도(珍島) 유학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
진도(珍島) 유학(幼學) 박제현(朴齊賢)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사는 군은 바닷가 구석에 치우쳐 있고 서울에서 1000여 리나 떨어져 있으며, 교룡과 악어와 함께 거주하고 소라와 방합(蚌蛤)과 같이 지냅니다. 임금의 교화와 멀리 동떨어져 있어 백성은 무지하며, 대인군자의 자취는 이곳에 이를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경사대부(卿士大夫) 가운데 불행히도 유배된 자들이 왕왕 이어졌는데, 지역이 멀고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또한 당세(當世)에 깨끗한 명성과 곧은 절개로 우뚝하게 뛰어나서 가장 참혹하게 화를 입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섬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남쪽 지역에서 신들의 고장만큼 궁벽한 곳이 없으나 현인의 자취 또한 신들의 고장만큼 많은 곳도 없으니, 경내의 백성과 선비들이 다행히도 그 유풍을 듣고 그 덕을 봄으로써 감동하고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신들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백성이지만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를 깨달아 금수와 이적(夷狄)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도 실로 여기에 힘입었습니다. 그러니 그 흠앙하고 애모하여 영원토록 잊지 못하는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고(故) 상신 문간공(文簡公) 노수신(盧守愼)은 심오한 학문과 맑은 절조로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권간(權奸)의 뜻을 거슬러 19년 동안 유배되었으나 기개와 절조를 더욱 가다듬었습니다. 고 상신 문정공(文貞公) 이경여(李敬輿)는 언론과 풍절(風節)이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흔들림 없이 정상적인 도리를 지키다가 여러 해 동안 천극(栫棘)되었으며, 조정에 돌아와서는 나라의 큰 보필지신(輔弼之臣)이 되었습니다.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은 문장과 학식이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사악한 자를 배척하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으나 끝내 참혹한 화를 당하였습니다. 고 참판 이민적(李敏迪)은 이경여의 아들로 아버지의 기풍을 많이 지니고 있었으며,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 와서 섬의 백성을 가르쳐 사람들이 많이 교화되었습니다. 혼조(昏朝 광해군(光海君))에 항소(抗疏)하였던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 대각에서 명성을 떨친 고 집의 신명규(申命圭), 명의(名義)를 힘껏 부식하였던 고 판서 남이성(南二星)은 모두 고충(孤忠)과 직도(直道)로 인하여 이 군에 유배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아, 저 일곱 현신과 신들의 고장과의 관계는 한유(韓愈)와 조주(潮州)의 관계나 소식(蘇軾)과 해남(海南)의 관계와 같으니, 미개한 풍속을 교화하여 예의의 고장으로 만든 것은 모두 그들의 공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의 백성과 선비들이 서로 더불어 사우(祠宇)를 창립하여 제사 지낸 지 또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먼 지방의 사정을 전하께 아뢸 방도가 없어 서원의 편액(扁額)을 아직 하사받지 못하여 우뚝하게 서 있는 몇 칸 건물이 매몰되어 빛을 잃었으니, 보고 듣는 이들을 고무하고 한 지방 사람들을 권면하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지금 충현(忠賢)한 이와 의열(義烈)한 이를 제사하는 사우가 팔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세상의 교화와 가장 관계되는 자들에게는 모두 편액을 하사하여 표창하였습니다. 일곱 현신과 같은 자들은 그들이 끼친 풍교(風敎)와 남긴 업적이 사전(祀典)에 두기에 적합한데, 현재는 쓸쓸하게 사사로이 향사하여 총사(叢祠)와 다를 것이 없으니 신들은 슬프게 생각합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고 상신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는 큰 기국(器局)과 원대한 도량으로 일찍이 성고(聖考)의 지우(知遇)를 입었으며, 신축년(1721, 경종1)에 이르러서는 위기를 무릅쓰고 대책(大策)을 도와 정하였습니다. 비록 이 때문에 흉악한 무리에게 무함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으나, 오늘날 종묘사직이 안정되고 동방의 해와 달이 예전처럼 밝게 비출 수 있는 것은 실로 그의 공에 힘입었으니, 그 순결한 충정과 큰 절의는 전대 현인에 뒤따라 배향하여 백세토록 풍교를 수립할 만합니다. 그가 처음 유배된 곳은 실로 신들의 고장이었으며, 끝내 이곳에서 후명(後命)을 받았습니다. 신들은 그가 원통한 눈물을 흘리며 부른 선조(先朝)의 세 늙은 상신에 대한 비가(悲歌) 중에 ‘밤에 한 외로운 신하가’라는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피눈물을 닦으며 서로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그의 충정(忠貞)을 살피고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제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추증하여 슬픔과 영광이 갖추 이르렀으니, 일국의 부로(父老)와 서민이라면 누군들 충신을 기리고 절의를 숭상하는 우리 전하의 성대한 뜻을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군에서도 응당 일곱 현신과 함께 동일한 사우에서 향사하여 한 지방 사람들의 존숭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기탁해야 합니다.
대개 선현의 족적이 이른 곳이라면 한때 지팡이를 짚고 유람했던 곳이라도 오히려 서원을 세워 향사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연잎으로 옷을 입고 난초로 띠를 두르고 계시던 이곳에 푸른 단풍 흩날리고 물색(物色)이 여전하니, 충성스럽고 의로운 넋 또한 틀림없이 그 사이에서 왕래하리라 생각됩니다. 이 지방에서 영원토록 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어찌 사림의 공의(公議)가 아니겠으며, 국가의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들은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달려와서 대궐 밖에서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들의 청을 굽어살펴 받아들여 고 상신 조태채를 일곱 현신의 원우에 배향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시고, 이어 유사에게 명하여 은혜로운 편액을 하사하도록 하여 충절을 지닌 신하들로 하여금 한 가지가 모자란다고 탄식하지 않도록 하고 바닷가의 유생들로 하여금 실망하여 한탄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한 지방이 풍화(風化)를 격려하는 장소로 삼도록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충신을 존경하는 뜻이 매우 가상하다. 해당 조(曹)로 하여금 속히 내게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D001] 한유(韓愈)와 …… 관계 : 당(唐)나라의 한유는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지어 불교를 비판하였다가 조주(潮州)로 폄적(貶謫)되었으며,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은 철종(哲宗) 대에 신법당(新法黨)의 탄핵을 받고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는데, 각각 그곳의 백성을 교화하였다. 《舊唐書 卷160 韓愈列傳》 《宋史 卷338 蘇軾列傳》[주-D002] 연잎으로 …… 이곳 :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 “강리와 벽지를 몸에 두르고, 가을 난초 꿰어서 허리에 차네……마름과 연잎 재단하여 저고리 만들고, 연꽃을 모아서 아래옷을 만드네.〔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노론 사대신 중 한 사람인 조태채(趙泰采)가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을 뜻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승현 (역)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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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적(李敏迪) (1625~1673)
조선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領議政)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 숙부인 이정여(李正輿)에게 출계하였고, 이이명(李頤命)의 생부임.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고, 저서로 《죽서집(竹西集)》이 있음.
이민서(李敏叙, 1633~1688), 본관은 전주, 자는 이중(彛仲), 호는 서하(西河)이다. 1652년(효종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73년(현종14) 2월 3일에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다가 세 번 사직상소를 올려 체차되어 교하로 왔다. 《承政院日記 顯宗 14年 2月 3日, 5月 22日》 죽서공(竹西公)은 이민적(李敏廸, 1625~1673)으로, 자는 혜중(惠仲), 호는 죽서(竹西)이니, 이민서(李敏叙)의 둘째 형이다. 1656년 별시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은 이조와 호조의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72년에 당인(黨人)으로 지목되어 송준길(宋浚吉) 등을 비호하다가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좌천되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 이민서가 이미 와서 살고 있는 교하로 와서 살았다. 《국역 현종실록 13년 6월 29일, 7월 8일》 《疏齋集 卷16 先考竹西府君行狀, 韓國文集叢刊 172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