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쓰여진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
--------------------------------------------------------------
* 1945년 2월 16일 오늘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한 날입니다.
첫댓글 💌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이런 역설이 또 있을까요? 이 시를 읽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시인이라면 그가 쓴 시는 읽어볼 가치도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