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춘추)-195 春秋(춘추) 昭公 一篇(소공 일편)22
二十有二年春(이십유이년춘) 齊侯伐莒(제후벌거)
22년 봄, 제후(齊侯)가 거(莒)나라를 쳤다.
宋華亥向甯華定(송화해향녕화정)
송(宋)나라의 화해(華亥)·향녕(向甯)·화정(華定)이,
自宋南裏出奔楚(자송남리출분초)
송(宋)나라의 남리(南裏)에서 초(楚)나라로 망명했다.
大蒐於昌間(대수어창간)
창간(昌間)에서 크게 열병(閱兵)을 하였다.
夏四月乙丑(하사월을해) 天王崩(천왕붕)
여름 4월 을축(乙丑), 천왕(天王)이 붕(崩)했다.
六月(유월) 叔鞅如京師(숙앙여경사)
6월, 숙앙(叔鞅)이 경사(京師)에 가서,
葬景王(장경왕) 王室亂(왕실란)
경왕(景王)을 장사 지냈다. 왕실(王室)이 어지러워 졌다.
劉子單子以王猛居於皇(유자선자이왕맹거어황)
유자(劉子)와 선자(單子)가 왕맹(王猛)을 데리고 황(皇)에서 살았다.
秋(추) 劉子單子以王猛入於王城(유지선자이왕맹입어왕성)
가을, 유자(劉子)·선자(單子)가 왕맹(王猛)을 데리고 왕성(王城)에 들어갔다.
冬十月(동시월) 王子猛卒(왕자맹졸)
겨울 10월, 왕자(王子) 맹(猛)이 졸(卒)했다.
十有二月癸酉朔(시유이월계유삭) 日有食之(일유식지)
12월 계유삭(癸酉朔), 일식(日食)이 있었다.
해설; 22년봄 왕의 2월 갑자에 제(齊)나라의 북곽계(北郭啓)가 군대를 거느리고 거(莒)나라를 쳤다. 거자(莒子)가 대항해서 싸우려고 하자 원양목지(苑羊牧之)가 간하기를, "제(齊)나라의 장수는 낮은 신분의 인물입니다. 그 바라는 것이 큰 것은 아닙니다. 이 편이 몸을 낮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큰나라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됩니다"고 했지만, 듣지 않고 제나라 군대를 수여(壽餘)에서 쳐부셨다. 제후(齊侯)가 거(莒)나라를 쳤다. 거자(莒子)가 화평을 청하자, 제(齊) 나라에서는 사마조(司馬竈)가 거(莒)에가서 거자(莒子)의맹약에 입회하고, 거자(莒子)는 제(齊)나라에가서 제후(齊侯)의 맹약에 입회했다. 직문(稷門) 밖에서 맹약했다[성문 밖에서 맹약한 것은 거자(莒子)에게 창피를 주려는 것임]. 거(莒)나라 사람들은 이 일로 해서 그 제나라 임금을 크게 미워했다.
송공(宋公)과 화씨(華氏)와의 분쟁에 초(楚)나라가 개입하려고 했으므로,송(宋)나라 사람들은 이를 추방 했다. 기사(己巳)에 화해(華亥)·향녕(向寧)·화정(華定)·화추(華貙)·화등(橫)·황엄(皇奄)·상성(傷省)·장사평(臧士平)등이 초(楚)나라로 망명했다. 화추(華貙)이하 다섯사람은 경(卿)이 아니기 때문에,경문(經文)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송공(宋公)은 공손(公孫) 기(忌)를 대사마(大司馬)에, 변공(邊邛)을 대사도(大司徒)에, 악기(樂祁)를 사성(師聲)에, 중기(仲幾)를 좌사(左師)에 각각 임명했다.그리고 악대심(樂大心)으로 우사(右師)를삼고,악만(樂輓)을 대사구(大司寇)로 삼아서 나라의 사람들을 진정(鎭靜)시켰다.
왕자(王子) 조(朝)와 그의 부(傅)인 빈기(賓起)는 모두 경왕(景王)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왕과 빈맹(賓孟: 賓起)은 다같이 왕자 조(朝)를 좋아해서 이를 태자(太子)로 세우려고 했다. 유헌공(劉獻公)의 세자(世子)인 백분(伯蚡)은 선목공(單穆公)을 섬기고 있었는데, 빈맹(賓孟)의 사람됨을 미워해서 이를 죽이려고 했다. 또 왕자(王子) 조(朝)의 말(言)속에는 반란을 일으킬 낌새가 들어 있다고 해서 이를 미워하고 또 제거할 뜻이 있었다. 여름 4월에 왕(天王)이 북산(北山)에서 사냥을 하면서 공경(公卿)들을 모두 따르게 하였다.장차 선자(單子)와 유자(劉子)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심질(心疾)을 얻어 을축(乙丑)에 영기씨(榮錡氏)의 집에서 붕(崩)했다. 무진(戊辰)에 유자(劉子) 지(摯)가 졸(卒)하고 자식이 없었는데, 선자(單子)가 유분(劉蚡)으로 뒤를 잇게하였다. 5월경진(庚辰)에 유분(劉蚡)은 왕(天王)을만나뵙고 이어서 빈맹(賓孟)을 쳐죽였으며, 왕자들과 선씨(單氏)에게 맹약했다[왕자(王子)들이 왕자(王子)조(朝)를 편들어서 난을일으키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정사(丁巳)에 경왕(景王)을 장사 지냈다. 왕자(王子) 조(朝)는 지난 날의 벼슬아치나 기술 관리로서 작록(爵祿)을 잃은자 및 영왕(靈王) 또는 경왕(景王)일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교(郊)·요(要)·전(餞)의 군대를 거느리고 유자(劉子: 劉蚡)를 추격했다. 임술(壬戌)에 유자(劉子)는 양(揚)으로 달아났다. 선자(單子)는 도왕[悼王: 왕자(王子)맹(孟)]을 장궁(莊宮)에서 맞이하여 돌아갔다. 왕자(王子) 환(還)이 밤에 왕(景王의 시체)을 빼앗아 장궁(莊宮)으로 돌아왔다. 계해(癸亥)에 선자(單子)가 달아 났다. 왕(景王)을 받들고 이를 추격했다. 영(領)에 이르러, 선자(單子)와 유자(劉子)의 사과를 받고 돌아오게 했다. 유자(劉子)는 영지(領地)인 유(劉)로 돌아갔으며, 선자(單子)는 재앙이 몸에 미칠것을 두려워하여 평치(平畤)로 달아 났다. 왕자들이 이를 추격했다. 선자(單子)는 환(還)·고(姑)·발(發)·약(弱)·종(鬷)·연(延)·정(定)·주(稠)등 여덟왕자[영왕(靈王)과경왕(景王)의 자손들임]를 죽였다. 왕자(王子) 조(朝)는 경(京)으로 달아 났다. 병인(丙寅)에 이를 쳤다.
유자(劉子)가 왕성(王城)으로 들어 갔다. 그러나 신미(辛未)에 공(鞏)의 간공(簡公)이 경(京)에서 패하고, 을해(乙亥)에 감(甘)의 평공(平公)이 또 패했다[왕자(王子)조(朝)에게 패한것임]. 노(魯)나라의 숙앙(叔鞅)이 경왕(景王)의 장례에 참석하고,경사(京師)에서 돌아와 왕실(王室)의난을 말하니, 민마보(閔馬父)가 말하기를, "조(朝)는 반드시 패하고야 말 것이다. 편드는 자가 모두 하늘의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다[구관(舊官)이나 기술 관리들의 실직한 사람들을 비유한 말]"고 했다.
노(魯)나라 소공(昭公) 15년에 진(晉)나라가 고(鼓)를 점령 하고 고자(鼓子를 종묘(宗廟)에 바치고 나서 곧 나라를 돌려 주었는데, 또 다시 선우(鮮虞)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다. 순오(荀吳)가 이를쳐서 멸하고 고자(鼓子) 원제(䳒鞮)를 데리고 돌아가서 섭타(涉佗)로 하여금 이를지키게 했다.
주(周)의 선자(單子)가 진(晉)나라에 급함을 알리려고 왕[왕자(王子)맹(孟)이 경왕(景王)의 뒤를이었음]을 모시고 평치(平畤)로 갔으며, 다시 포차(圃車)를 거쳐서 황(皇)에 머물렀다.
겨울10월 정사(丁巳)에, 진(晉)나라의 적담(籍談)·순력(荀躒)이 구주(九州)의 융[戎: 육혼(陸渾)의 융을 말함]과 초(焦)·하(瑕)·온(溫)·원(原)의 군대를 거느리고 왕(王)을 왕성(王城)으로 들여 보냈다.
겨울 10월에 왕자(王子) 맹(孟)이 졸(卒)했다. 정식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일이 없기 때문에, 경문(經文)에 붕(崩)이라는 표현을 쓰지 못했다. 살아 있을 때 왕이라는 호칭을 쓴것은 실지에 있어서 왕위의 계승자임을 밝힌 것이며, 죽은 뒤에 자(子)를 붙인 것은, 경왕(景王)이 붕(崩)하고 아직도 해를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축(己丑)에 경왕(敬王)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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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춘추)-195 春秋(춘추) 昭公 一篇(소공 일편)22
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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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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