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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삼전도의 굴욕)
삼전도비는 삼전도의 지명을 딴 것으로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큰나라 청 황제의 공과 덕을 기리는 비'인 셈입니다.
삼전도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년(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병자호란에서의 청 태종의 공적과 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입니다.
이 삼전도의 굴욕(병자국치)이라는 사건은 조선이 겪었던 2대국치중 하나입니다.
흔히 조선시대의 2대 국치(國恥 : 나라의 치욕))하면 바로 병자국치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경술국치 입니다.
병자국치는 1636년 병자년에 발발한 조선과 청나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고 경술국치는 1910년 8월29일 경술년의 국치라는 뜻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맺었던 강화조약의 내용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의 세자와 둘째왕자인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를 따라 청나라에 시행할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 : 공물)를 보낼 것 등.
(삼전도 비에 새겨진 석화입니다. 위에 앉아서 위엄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청의 황제 홍타시이고 아래에서 예를 취하고 절을 하고 있는 것은 조선의 인조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비를 만들고서 이런 이야기가 후에 전해집니다.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하니 나라의 존망이 이것에 의하여 판가름나는 것이다. (월의) 구천은 회계(會稽)에서 신첩(臣妾) 노릇을 하였으나 끝내는 吳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다. 후일에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으며,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간단히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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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심이여, 만물을 죽이기도 하시고 생육(生育)도 하시다.
오직 황제만이 이를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아울러 펴도다.
황제가 동방으로 정벌하시니 그 군사가 10만이라.
위세가 뇌성벽력처럼 천지를 진동하니, 군사가 범처럼 용맹하고 맹수처럼 날쌔어라.
서번(西蕃)의 궁발(窮髮)과 북락(北落)이 창을 잡고 앞에 달리니
그 위세 더욱 찬란하구나.
지극히 인자하신 황제께서 은혜로운 말씀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으시어 이미 엄숙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어라.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해서 스스로 재앙을 불렀구나.
황제의 밝은 가르침, 마치 자다가 깨어난 듯,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신민을 이끌고 귀순하도다.
위엄이 두려워서가 아닐세. 오직 덕에 의지함이라.
황제가 착하게 여기어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도다.
和한 안색과 기쁜 웃음으로 兵戈를 거두시었네.
무엇을 예물로 주셨는가. 경마(輕馬)와 경구(輕裘)를 주셨도다.
도성의 士女들이 모두 노래하여 황제의 은덕을 칭송하네.
우리 임금이 돌아옴은 황제의 은덕이라.
황제가 회군하여 우리 백성을 살리도다.
우리의 탕잔(蕩殘)함을 불쌍히 여기시어 농사를 권하시니,
국토는 옛날과 같이 되고 조정이 새로워졌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붙고 얼어붙은 풀뿌리에 다시 봄이 오도다.
한강 가에 우뚝 선 비석에 아로새긴 황제의 아름다운 공덕,
三韓에 영원토록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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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후(1913)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없어 다른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삼전도비를 주민들은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치욕스런 역사를 되새기자며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지어 올린 독립문의 존재를 기꺼이 용인한 것은 당시에 일본이었다.
진작에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조선총독부가 구태여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을 달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나아가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마자 그 등록대장의 첫머리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상으로 삼았다고 정해진다. 다시 세월이 흘러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의 숱한 고적유물들이 이른바 '보물'로 잇달아 지정이 되었을 때 이 삼전도비가 그 대열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때가 1935년 5월 24일이었고, 이름하여 보물 제164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사건이 지니고 있는 과정이나 여러가지를 알아보았고 외교의 과정이나 정세에 대한 인식, 국론에 중요성이 시사하는 것은 지금까지 너무도 많다고 볼수 있다.
이때 당시에 겪었던 수치는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당시에 인조의 삼전도에서의 예에서 전해지는 내용을 다시 한번 알아보면서 글을 마친다. ----------------------------------------------------------------------------------------------------------
인조는 청나라 황제인 홍타시의 앞에서 한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기를 세 번 반복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례를 올렸다.
이에 인조의 무릎이 까지고 이마에 선혈이 낭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머리로 땅바닥을 받을 때마다 배석한 청나라 관리들이 머리 부딪치는 소리가 작다며 더 세게 박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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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 비문의 전문내용(참고사항)
대청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께서는, 화의를 깨뜨린 것이 우리들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크게 노하시었다.
무위를 떨치시어 곧장 동으로 향하니 감히 항거할 자가 없더라.
그때 우리 임금이 남한산성에 깃들어 있어서 두려워하기를 봄날 살얼음을 밟듯 어두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는 것 같이 한 지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道의 군사가 연달아 무너지고 서북의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은신하여 멈칫거리며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성 안의 양식도 떨어져 가는데, 황제께서 대군을 이끌고 성에 육박하시니 서리 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것 같았고 화롯불이 기러기 털을 불사를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오직 살생하지 않는 것으로 위엄을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칙서를 내려 깨우치기를, ‘오라, 짐은 그대의 목숨을 보전하리라, 그렇지 않으면 도륙하리라’ 하셨고 융알다이(英俄兒大), 마푸다(馬福塔) 등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들고 왕래를 빈번히 하였다.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 모든 신하를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화호를 의탁한지 이미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이 되었다. 내가 혼미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상국(上國)의 정토(征討)를 불러 백성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차마 도륙하지 못하시고 이처럼 타이르시니, 내가 어찌 감히 그 뜻을 받들어 위로는 우리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아래로는 우리의 생령을 보존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셨다.
이에 대신들이 협찬(協贊)하여 드디어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軍前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서 어루만져 한번 보시매 마음을 탁 털어놓고 예물을 하사하는 은전을 베푸시니 그 은혜는 우리 임금을 시종하는 신하에게까지 골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니 곧 우리 임금을 서울로 돌려보내시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군오(軍伍)를 정돈하여 서쪽으로 돌아가시었다.
백성들을 위무하고, 농사를 권장하시어 원근(遠近)에 꿩, 새처럼 흩어졌던 자가 모두 제 자리로 돌아오게 하셨으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리오.
소방(小邦 ; 작은나라)이 上國에 죄를 지은 지 오래되었다. 기미년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이 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도우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 보내셨다. 은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큼에도 불구하고 소방이 미혹하여 깨닫지를 못했다.
정묘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장수에게 동정(東征)을 명하니 우리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해도로 피해 들어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윤허를 하시고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보시어 강토를 되돌려 주시고 강홍립 또한 돌려보내시었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왕래가 빈번하더니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일어나 소란을 선동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소방에서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언동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으셨다. 먼저 밝으신 가르침을 내려 우리를 달래시며 출정의 시기까지 알려주시고 타이르셨으니, 귓속말로 말해주고 면대하여 말해주는 것보다 더 간곡하시었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소방의 임금과 신하들이 죄는 피할 길이 없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또 일부 군사에게 명하여 강화도를 먼저 함락하시니 궁빈(宮嬪)․왕자 및 경사(卿士)의 가족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께서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從官)과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셨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소방의 군신 및 포로 권속들이 다시 옛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치는 겨울이 따듯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이 때맞춘 단비로 바뀌어, 이미 망한 나라가 보존되고 이미 끊어진 종묘사직이 다시 이어져 동녘 땅 수 천리가 모두 다시 살아나는 은택을 입어 용서를 받았다.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도 보기 드문 일이로다.
아아! 장하고 위대하도다. 한강의 상류 삼전도 남쪽은 바로 황제가 머무시던 곳이라. 단과 뜰이 남아 있어 우리 임금이 이에 공조(工曹)에 명을 내리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만들고 돌을 다듬어 비를 세웠다. 영원토록 남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천지의 조화와 함께 하시었음을 빛내고자 함이라. 어찌 유독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길이 의지할 일이겠는가. 먼 곳에 있으면서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이 또한 대조(大朝)의 어진 명성과 올바른 무위로 말미암은 것이로다.
천지의 웅대함과 해와 달의 밝음을 본떠서 그릴지라도 황제의 위대하신 공덕은 족히 그 만분의 일도 방불(彷佛)하게 하지 못하겠으므로 삼가 그 대략을 기록하고 (비문에) 새겨 말한다. |
첫댓글 애절한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
윤동주형께서 거울을 자주 닦는 까닭을 일러주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