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다. 논이라곤 눈을 씼고 찾아 봐도 없는 산골오지였고 게다가 산등성이 산들과 바위를 골라내 만든 조잡스런 계단식 밭에 보리나 조(좁쌀)를 심어 일년 때거리 농사를 짓던 빈촌이었다.
봄이 되면 우리 마을은 춘궁기로 곤란을 겪었다. 보리밥은 그나마 여유있는 사람 얘기였고 보통은 조밥을 먹었는데 그 좁쌀도 떨어져 갈 때 쯤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계절은 호시절이라 산과 들에 꽃이 피고 앵두나무의 앵두는 빠알갛게 익어갔다. 우리집엔 초가집 뒷마당과 돌담 대문 쪽에 커다란 앵두나무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초등학교 3학년 쯤 이었을게다. 그 해에는 나무가지가 끊어질만큼 많은 앵두가 열렸는데 어느날 아침 등교하는 나에게 엄마가 도시락을 주면서 오늘 도시락은 특별하니 맛있게 먹으라는 것이었다. 특별해봤자 꽁보리밥이겠거니 하고 점심 도시락을 열었는데 도시락이 온통 빨간 앵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새 좁쌀도 떨어져 새벽같이 일어난 엄마가 땅에 떨어진 앵두를 주어 도시락을 쌌던것이다.
창피했던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어 둔채로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다. 아이들의 놀리는 소리로 교실이 떠들석해지자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상황을 판단한 선생님은 '와~~~ 이 도시락 내꺼랑 바꿔먹자! 정말 맛있겠다!!'라며 동그란 3단 찬합도시락을 건내셨다. 1단에는 고등어조림 2단에는 계란말이 그리고 여러가지 반찬과 쌀밥! 나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개걸스럽게 도시락을 비웠다. 창피함보다는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음식의 유혹이 더 컸으리라! 먹으면서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선생님께서는 앵두를 하나 남김없이 드셨다. 도시락을 다 먹고 나서 분위기를 깨달은 나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날 집에 와서 도시락을 내던지며 엄마에게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도시락을 싸지 말지 왜 창피를 줘?" 엉엉 울면서 투정을 해 댔지만 엄마는 들은 둥 마는 둥 딴소리를 했다. '그래도 그 앵두 다 먹었네!'
나는 엄마가 밉고 신세가 서러워서 저녁 내내 울다 잠이 들었는데 엄마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에 깨어났다. 문틈으로 살짝 내다보니 내 도시락을 씼던 엄마는 옷고름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썩이셨다. 울고 계신것이었다. 찢어지는 가난에 삶이 미치도록 괴로워도 그 내색을 자식에게 보이지 않으시려고 울음마저 맘껏 울지 못하였으니 그 한이 오죽 하셨을까? 자식에게 앵두 도시락을 싸줄 형편에 당신은 그 앵두라도 배불리 드셨겠는가? 자기는 굶어도 자식은 굶기지 않겠다고 새벽 찬 바람에 앵두를 주웠을 엄마의 맘을 티끌만큼도 헤아릴 수 없는 나이였으니... 그 일은 두고두고 내 가슴 속의 한이 되어버렸다.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드셨을까? 그 해 몇일 후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셨다. 지겹도록 괴롭히던 가난과 가시밭 삶에서 해방이 되셨으니 소쩍새 울음따라 홀연히 떠나버리신 엄마는 오히려 더 행복하셨는지 모른다.
엄마는 가끔씩 나에게 장난처럼 물으셨다. '우리 강아지 나중에 크면 엄마 쌀밥에 소고기국 사줄거야' 아니면 보리밥에 된장국 사줄거야?' 그러면 나는 그게 무슨 뚯인지도 모르고 "쌀 밥에 소고기 국!"이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엄마는 뭐가 그리 좋으신지 연신 함박웃음을 짓곤 하셨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이 되었고 그때 나만한 아들을 키우는 나이가 되었다. 쌀밥에 소고기국이 지천인 세상이고 그 정도 음식은 서민들도 다 먹는 세상이 되었건만 그토록 먹고 싶어하셨던 엄마는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너무나 서럽고 눈물이 난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 지옥에 간다지만 세상엔 예외란 게 있으니 우리 엄마는 꼭 천국에서 뵙고싶다. 천국에는 진수성찬이 산더미 같이 있겠지만 그래도 꼭 내가 지은 쌀밥과 소고기국을 차려드리고 싶다. 그러면서 엄마가 밥 한톨 국물 한 수저까지 남김없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옆에서 한 없이 한 없이 지켜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