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욕과 욕가마리들
이동재
연일 차고 넘치는 가짜 뉴스와 망언으로 인해 욕보고 있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욕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하는 말”, 즉 ‘욕설’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국 한나라 때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욕辱’은 “자기 의사를 굽히어 남에게 복종하는 치욕”의 의미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밭 가는 시기를 놓치면 봉한 그 땅의 경계 안에서 죽였다失耕時於封畺上戮之也”고 한 것으로 보아서 ‘욕’이란 말은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든 후에 생긴 말이며, 봉토를 받은 제후나 사람이 농사 시기를 놓치면 그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권력자가 그들을 처벌하던 형벌과 연관된 말임을 알 수 있다. 진태하 교수도 그의 『상용한자常用漢字』 사전에서 ‘욕辱’자를 “‘별진 진辰’에 ‘법도 촌寸’을 합친 글자로, 농사철辰에 법도寸에 맞게 씨를 뿌리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대서 ‘욕’의 뜻으로 쓰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욕은 권력자가 제때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데서 비롯된 말로서 ‘오라질’이나 ‘젠장맞을’처럼 형벌과 관련된 말이었다. 즉 권력자가 잘못한 사람을 욕보이는 것이 욕이다. 처벌자의 입장에선 욕을 보이는 것이고, 피처벌자의 입장에선 욕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욕보소’나 ‘욕봤다’, ‘욕먹다’라고 말하는 것은 피처벌자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욕을 한다’라고 했을 땐 권력자가 ‘욕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욕’ 또한 의미의 확장이나 전의 과정을 밟아왔을 것이다. 욕이란 말이 처음엔 권력자가 행하는 형벌의 일종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차 의미가 확산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서 다양한 의미로 변화되어왔다. 이제 욕은 처벌이나 단순히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안겨주기 위한 말을 넘어서 누군가에겐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는 말이 되기도 하며, 또 누군가에겐 자존심의 표출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겐 부러움의 역설적 표현이 되기도 하며, 심지어는 친근감의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자신들의 고유한 언어나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나라는 많지만, 욕과 관련된 말이 없는 나라는 없다. 나라마다 욕의 표현은 조금씩 차이를 보일 수 있지만, 욕에 쓰이는 말들은 대개 성적인 금기나 배설물, 장애, 특정 동물과 관련된 말들과 관련이 깊다. 욕의 언어가 성적인 금기의 위반이나 비정상적인 상태 혹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과 관련이 깊다면 욕이 그 사회 윤리의 마지노선이란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욕이 정상이나 일반적인 윤리 너머의 그 무엇과 연관된 언어라면 의식의 그늘에 가려진 무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매일 욕보며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어떻게 하루라도 욕을 먹지 않을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 욕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상황에 따라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도 상대를 욕보이는 것일 수 있으니, 욕을 하기도 어렵지만, 전혀 안 하고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욕을 하는 인간을 덮어놓고 천박한 인간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욕이 그 인간의 천박한 품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적절한 욕은 한 인간의 높은 지적 수준과 윤리 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주위에 널려있는 욕가마리들에게 적절한 욕을 해주는 것은 모른 척 지나치거나 침묵하고 있는 인간들보다 훨씬 높은 윤리적 행동일 수 있다. 이때의 욕은 사회비평이요 대중비평이다.
천박한 욕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수많은 문학 작품 속의 욕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강제노동 나가서 신작로 닦으니/칼 찬 놈 소장이 들이닥친다”라거나, “테레비 연속극, 백 분 쇼, 지랄을 치더니/우리네 사랑방 간 곳이 없네”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민초들의 아리랑부터 “학생내조지學生乃早知 선생래불알先生來不謁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학생제미십學生諸未十”이라고 무례한 서당 훈장을 향해 읊어댄 김삿갓의 시와 최승자의 “오 개새끼/ 못 잊어!”나 이성복의 「어떤 싸움의 」 속의 부자간 욕설 등으로 시 속의 욕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작품 속의 욕은 상당히 정화된 욕이다. 오늘날 지금 이곳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인간들의 작태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이런 욕만으론 해소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대장동 개발 사업을 두고 벌어지는 정치인들과 이해당사자들의 비리 공방, 조폭 출신이 만든 조작된 증거물을 국정감사장에 버젓이 들고나와 설쳐대는 한 나라의 수도 경찰청장 출신의 국회의원, 쿠데타로 헌법을 짓밟은 전직 대통령을 찬양하는 민주공화국 대검찰청장 출신의 대선 후보, 기본적인 상식과 직업윤리도 갖추지 못한 그런 인간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위직에 오를 때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 같은 인사 제도나 교육시스템, 1년 내내 장르 불문하고 책 한 권 읽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인간들이 국민을 개, 돼지로나 여기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당당히 나서는 한심한 작태들, 수십억 원을 푼돈으로 여기며, 돈 먹은 놈들이 너도 돈을 먹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막무가내식으로 윽박지르는 국감장이나 대선 토론장과 제멋대로 왜곡된 기사로 도배된 언론 기사나 보도를 연일 보고 있으면 욕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느그들이 하는 말이 아가리로 하는 말이냐, 똥구멍으로 하는 말이냐! 똥구멍을 빼다가 아가리에 처박을 놈들! 모조리 똥물에 씻겨서 오줌에 튀길 놈들이다. 에∼라, 니에미 씹이다!’
이크, 욕을 한다는 것이 결국 칭찬을 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씹’이 곧 ‘신神’이기 때문이다. ’자는 원래 ‘’이었고, 갑골문을 보면 은 여자의 성기에 남자의 불알 혹은 자지가 들어가 있는 형상이니 ‘씹’이 곧 ‘신’이다. 인간 탄생의 과정 혹은 그 행위가 결국 신인 셈이다. 이래서 말이란 게 참으로 오묘하다.
기본 상식이나 윤리도 없고, 전문성도 의심되는 인간들,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악다구니들만 보다가 지나가던 할머니가 흙수저 출신의 모 정치인을 보고, “괜찮아, 살다 보면 욕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그나마 눈과 귀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저 욕가마리들의 무식과 염치없음보다 그 노인의 인정머리가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욕이 수렵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옮겨가던 시대, 제때 법도에 맞게 농사를 짓지 않는 인간들에 대한 처벌이었다면, 가짜 정보와 뉴스가 판을 치고 있는 지식정보화시대의 욕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며, 망언과 망동을 일삼는 사람이나 방송언론 및 정치인, 그리고 ‘전국의 대장동’ 관계자들과 그런 자들에게 빌붙어서 수십억 원의 푼돈을 얻어 쓰고 있는 자들을 향한 준엄한 심판의 언어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말인데, ‘니이미, 다 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