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위기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예. 한국은행입니다. 네 네? 아 그렇습니다. 무슨 용건이죠?”
“여긴 치안국인데요.”
“네.”
“거 다름이 아니구 경찰 비상용 현금 인출건입니다. …… 알구 계십니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경찰 경비루 말이죠, 현금 5천만 원을 지금 곧 인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치안국장과 한국은행 총재 사이에 양해가 됐다길래, 지금 가면 인출될 수 있다 해서 전화루 문의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구요?”
“네, 전 아직 총재님에게서 그런 지시 받은 일없습니다.”
“실례지만 댁은 누구시요?”
“여기 책임잡니다.”
“그렇담 모르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상부에서 어떻게 양해가 됐는지 모릅니다만 전 아직 그런 지시 받은 일두 없구요. 물론 서류를 갖춰서 인출을 요구하신다면야 문젠 다릅니다만……”
“알았습니다. 그럼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한국은행과 전화로 실랑이를 하던 치안국 경리 책임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치안국장에게 달려갔다.
“저 국장님.”
“아, 뭐요?”
“한국은행보고 경찰 비상금을 인출하러 가두 좋으냐구 전활 걸었더니 실무 책임잔 그런 사실 모른다지 않습니까?”
“누가 그래?”
“국고 지출 책임자라구 하는데 성명은 안 댔습니다.”
“알았어! 시간이 없으니까 지금 곧 트럭을 가지구 가요! 내가 총재헌테 다시 전화 걸 테니까.”
“서류 없인 인출 거절할 텐데요.”
“무슨 소리 하구 있어! 비상 인출인데 서류가 무슨 서류야. 그런 건 추후 꾸며서 제출해두 늦지 않단 말이야. 잔소리 말구 시키는대루 해요!”
이렇게 해서 경찰 비상용 자금 5천만 원을 아무런 서식도 없이 비공식으로 인출한 치안국은 그 5천만 원을 27일 대구 수원으로 내려가는 경찰 피란 대열에 호송 남하시켰다. 그러나 피란 대열이 안양에 다다를 무렵 때마침 서울로 방송하러 올라오던 조병옥과 마주쳤다.
조병옥은 운전사에게,
“이봐, 저기 오는 거, 저거 경찰 아냐?”
“네, 경찰입니다.”
“망할 놈의 자식들! 국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놈들이 저희들끼리 먼저 도망쳐 옴 어떻게 해! 저 앞에다 차 세워! 오는 트럭 앞에다 세우란 말이야.”
조병옥은 피란 경찰 대열을 가로막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보게들! 자네들 서울에서 오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나 누군지 알겠나?”
“조병옥 박사님 모를 사람 어딨습니까?”
“그럼 자네들 차 옆에다 세워 놓구 여기 모이게. 이 앞에 모여 줘. 내 지금부터 중대한 소식을 제군들헌테 알려 주겠어. 자 어서들 모여.”
조병옥의 호통에 남하하던 경관들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널따란 길가 뜨락에 모여 섰다. 그들에게 조병옥은,
“뒷사람들은 잘 안 들릴 테니까 앞으루 바싹 나와요…… 그렇지! 음! 내가 여기서 제군들과 대열을 정지시킨 것은 다름이 아니올시다! 제군들은 나라와 국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고 치안을 담당하는 중대한 책임을 가진 사람이야 ─ 헌데 아무리 서울에 위기가 닥쳐왔다 해도 아직도 서울 시민 1백 50만 명이 남아 있는 이 마당에 치안 책임을 맡은 제군들이 총대를 꺼꾸루 메구 허둥지둥 먼저 도망쳐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거요! 정부가 제군에게 총과 장비를 줘서 국립경찰의 중책을 맡긴 것도 그런 겁니다. 치안을 맡아 달라고 제군들에게 사법권을 주고 권력을 맡긴 국민들이 엄연히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데 이런 무질서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거올시다. 더구나 여기서 내가 알리고 싶은 것은 오늘 동경에 있는 맥아더 장군이 한국을 돕겠다고 천명했고 그 때문에 처치 장군 지휘하에 서울 맥아더사령부 전방지휘소가 설치된다는 공식 전문이 왔다 그거야!”
경관들의 환호성이 올랐다. 조병옥은 더욱 신이 나서,
“그러니 미군이 참전하는 것도 물론이고 오늘 중으로 비행기며 대포가 와서 우리를 돕게 되었다 그거올시다. 이렇게 우방이 우리를 돕게 되는 이 마당에 있어서 치안 담당자인 제군이 서울을 버리고 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짓을 해서 후일 국민의 지탄을 받아두 아무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된다 그거야. 그러니 어서 서울에 재입성해서 경찰 본연의 임무에 돌아가길 바라는 바이올시다! 모두들 내 말 알았나!”
“네!”
질타와 격려와 반말과 경어가 뒤섞인 조병옥의 노상 연설에 경찰은 남하를 중단, 차 머리를 북으로 돌려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그날 밤을 각자 분담 지역에서 밤을 새운 경찰은 28일 새벽, 적 탱크가 미아리에 접근했다는 경비 전화와 함께 다시 동요, 대부분의 경찰 간부들은 미리 도망치고 겨우 중앙청을 비롯한 몇몇 경찰서에 말단 경찰을 남겨 놓은 채 혼란을 재연시키기 시작했다.
그날 새벽.
내무장관 백성욱에게 경찰 간부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각하! 미아리에 적 탱크가 침입했답니다. 이젠 각하두 자릴 뜨셔야겠습니다!”
“그게 확실한 정본가!”
“예, 성북서에서 걸려온 경비 전홥니다. 직접 돈암동으로 남하하는 것을 목격하구 걸어왔습니다.”
“음……”
27일 아침 7시의 소위 정부 요인 피란 열차를 타지 않고 서울에 남았던 유일한 국무위원 백성욱.
야포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도 야포탄이 중앙청 동편 광장에 낙하 유리창을 박살시키며 작렬하자 드디어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경찰 간부들은 어디 있나?”
“국장님 방에 있습니다.”
“그럼 모두들 철수하라구 해!”
“네.”
백성욱의 지시를 받은 경관은 곧 간부들에게 알렸다.
치안국 경무과 경리계 경감 이천구(李天九)는 누구보다 먼저 5천만 원이란 막대한 현찰이 실린 화물자동차로 뛰어갔다.
“아, 여보 김 순경!”
“네.”
“우리 계장 못 봤어?”
“경리 계장님 말입니까? 못 봤는데요. 전 쭈욱 여기 운전대에 앉아 있었습니다만 아까 잠깐 얼굴을 비치군 쭉 안 보였습니다.”
이때 과장이 나타났다. 이천구를 보더니 그 역시 계장을 찾는다.
“글쎄 계장님이 안 보입니다. 그래서 저두 찾구 있는 중입니다.”
“없어? 흥, 먼저 뺀 모양이군! 이봐 이 경감, 당신이 호송 책임 맡어. 알았어?”
“제가요?”
“호송 책임자가 달아났으니 할 수 없잖아. 맡아 줘요!”
“네, 명령이시라면 맡겠습니다만……”
“자, 출발!”
이렇게 해서 이천구는 난데없이 경찰 비상금 호송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들 경찰 철수부대가 중앙청을 떠났을 때는 새벽 2시 20분.
이들이 서울역에 다다랐을 때 한강교 폭파음을 들었다. 차 머리를 마포로 돌렸다. 그러나 마포에도 이미 적이 들어왔다는 헛소문에 질겁, 다시 차 머리를 돌려 서빙고로 향했다. 때마침 서빙고는 피란 군중으로 혼란의 도가니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중엔 라이트 대령 이하 59명의 KMAG요원들도 나룻배를 기다리느라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있다.
이천구는 낙심 천만이었다.
“이 주임, 차로 도강하긴 다 틀렸습니다. 돈 어떻게 하죠?”
김 순경이 재촉을 했다.
“글쎄 말이야…… 뭐 이 판국에 어떻게 운반해 간다는 것두 말이 안 되구…… 야단났어…… 자, 자 이거 간부들두 뿔뿔이 흩어졌으니 의논할 사람이 있어야지…… 허 참.”
이때 누군가 다가왔다.
“아 여보시오! 그거 치안국 차요?”
“예,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나 경비과 박 경감이오.”
“아 박 경감님! 저 여기 경리계 이 경감님이 계십니다.”
“어, 어디?”
“이 주임! 경비과 박 주임이 오셨습니다.”
“오 박 경감! 왜 늦었소!”
“마포 쪽에 갔다구 해서 갔더니 없잖아요. 그래서 아무래도 일루 간 것 같아 쫓아왔죠.”
“우리두 마포 가려다 적이 들어왔단 소리 듣구 찰 돌렸어요. 헌데 간부들은 어디 갔죠?”
“모르겠소! 나두 장관님을 경호했는데 도중에 엇갈리구 말았어요. 헌데 여보 이 경감! 오늘 장관에 장석윤(張錫潤) 씨가 임명됐다는 말이 있던데요. 아시오?”
“아뇨, 처음 듣소. 아 그래요! 그럼 한번 만나뵈었음 좋겠는데! 이 판국에 만날 수 있어야지.”
“만날 수 있어요.”
“어떻게?”
“여기 오는 도중 우연히 장 장관 만나뵙구 그런 얘기 들었죠.”
“아, 그럼 잘 됐어요. 어디 계신지 안내해 주시오.”
“이리 오시오.”
장석윤의 내무장관 임명설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발설되고 번진 것인지는 모른다. 그날 서빙고에 모였던 경관들은 모두가 장석윤이 새 장관이 된 것처럼 떠받들었다. 치안국 경리계 이천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경감은 이천구를 데리고 장석윤을 찾아갔다.
“저 각하, 이 친군 현재 치안국 경리계에 근무하고 있는 이천구 경감입니다.”
“이천굽니다.”
“오, 수고들 많네! 그래 날 찾아온 용건은 뭐지?”
“저, 다름 아니구 현재 전 경찰 비상용으로 사용할 현찰을 갖구 있습니다.”
“경찰 비상금을? 자네가?”
“네.”
“도대체 얼마나 되는데?”
“5천만 원입니다.”
“5천만 원이나? 호, 거 대금이군! 그래 지금 예까지 갖구 왔단 말인가?”
“예, 50명의 경찰 철수병력의 호송 아래 화물 자동차에 싣구 왔습니다. 찬 저기 세워 뒀습니다만!”
“흠! 거 대금인데…… 그런 대금을 와 진작 철수 안 시켰지? 백 장관이 여태 붙잡구 있었는가?”
“아닙니다. 장관님은 전혀 관여치 않았습니다.”
“좌우간 나헌테 맡기게!”
장석윤은 호기스럽게 경찰 비상금 5천만 원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했으나 사람 하나 제대로 건너기도 어려운 때다. 현금 5천만 원을 만재한 트럭이 쉽게 강을 건널 수는 없었던 것. 결국 장석윤은 KMAG 단장 숙사 앞에 이르러 현금 호송 경관들을 불러 세웠다.
“지금 이곳 형편을 살펴보니 자동차로 강을 건느기는 틀렸어. 그러니 부득이 여기서 해산하겠는데 나와 함께 남하할 사람들은 이리 나와! 더 앞으로…… 응…… 이봐, 자네 세어 보게.”
이천구는 인원을 정열시켜 번호를 불렀다. 이천구까지 합해 모두 8명이었다.
“그럼 저 자동차에 싼 현금들은 모두 나눠 가지게…… 가지란다구 자네들헌테 나눠주는 건 아냐! 알겠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갖구 가두룩!”
호송 책임자 이천구 이하 7명의 경관이 트럭에 올라가서 현금 부대를 뜯고 현찰을 나눠 가졌다. 한 사람이 얼마를 가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보따리에 싸고 잡낭 속에 쑤셔 넣은 것이다.
이윽고 가질만큼 가진 경관들이 다시 장석윤의 앞에 도열했다.
“자네들은 그 돈을 가지고 수원까지 가야 해. 수원 가면 경찰 연락처가 알려질 것이고 그리되면 거기서 합류하게 될 것이니까, 수원까지는 모두 개인 행동이야! 알겠나?”
이때 호송 책임자였던 이천구 경감이 장석윤에게 물었다.
“선생님, 아직두 트럭엔 많은 현찰이 남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처리하시구 가시겠습니까?”
“천상 어디다 숨겨 놓구 가는 수밖에 없지.”
“결국 그렇게 됨 버리구 가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구 트럭채루 강을 넘을 수도 없는 형편이구…… 좌우간 그 처린 나헌테 맡기게.”
이때 배를 구하러 갔던 박 경감이 헐레벌떡 장석윤에게 뛰어왔다.
“각하! 배를 얻어왔습니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군인들한테 빼앗길 것 같습니다! 어서 가십시다!”
“가만, 가더라두 저 현금 트럭을 어떻게 숨겨 놓구 가야지!”
장석윤은 말을 하다가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서 있는 이천구에게 빨리 가보라고 독촉을 했다. 그런 다음 박 경감에게 의논한다.
“여보게 트럭을 어떻게 감추지?”
“감춘다구 됩니까? 날이 새면 죄다 뒤질 텐데요?”
“그래두 감출대루 감취야지.”
“우선 포플라 나무루 위장이나 하죠. 그건 제가 할 테니까 각한 먼저 강가루 나가십시오.”
“아냐! 나 지켜보구 섰다가 자네허구 함께 가겠네.”
“그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결국 경찰 비상금 5천만 원은 그 몇 백분의 1도 건지지 못한 채 엉뚱한 사람의 책임 아래 엉뚱하게 처리되어 망실의 운명을 걷고 말았다. 후일 내무부 치안국은 이 망실 국고금 처리를 위해 국회의 동의까지 얻는 소동을 빚은 끝에 내무부 예산에서 반납 변상 처리되었다.
더구나 백성욱 다음 바통을 이은 것으로 피란 경찰들 사이에 유포된 장석윤 내무장관 임명설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로 끝나고 말았다.
이 무렵. 인도교 폭파로 차량 도강이 불가능하게 된 미 군사고문단 일행은 강폭이 좁은 서빙고로 집결하여 다시금 혼란을 빚었다.
“단장! 여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러다간 날이 새도 강을 건널까 말까 한데요.”
참모장 그린 우드는 이렇게 말을 해놓고 더욱 난감해졌다. 흡사 지옥과 같은 것이 바로 나루터 실정이었다.
“야단났군! 그렇다고 언제까지 막연하게 있을 수도 없잖아. 어떻게 해서든 우린 이 강을 넘어야 하오. 놈들의 교란 사격이 더욱더 치열한데 정말 이젠 지체할 수 없어.”
단장 대리 라이트는 태산 같은 걱정에 휩싸였다. 이때 어디선가 공포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뭐요 저건?”
“한국군이 군중들을 정리하나 봅니다.”
우드가 대답했다.
“이거 어떡허지? 정말 오도가도 못하게 됐군.”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는 게 확실하다면 여긴 어느 곳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목푭니다.”
“그러니까 탱크가 오기 전에 넘어야 한단 말이오!”
“가만 계십시오. 거기 감 제가 아는 한국군 장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드가 찾아간 강가엔 작전국 차장 이치업 대령이 제8연대 부연대장 이현진 중령의 도움으로 차량 운반용 나룻배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치업을 만난 우드는,
“오 커널 리! 잘 만났소. 좀 도와주시오. KMAG은 지금 아주 곤경에 빠졌어요.”
“곤경에 빠진 건 피차 일반이오. 헌데 혼자요, 커널?”
“아뇨, 단장 이하 59명이 오도가도 못하고 지금 저기 멍하니 서 있어요.”
“그럼 빨리 데려 오시오. 먼저 도강시켜 드릴 테니까.”
“오, 고맙습니다. 이 대령!”
“단 차량은 도강 안 돼요! 그건 미리 말씀드립니다.”
“찬 포기해도 좋습니다. 그 대신 무전차 1대만은 어떻게든 도강시켜 줘야겠어요. 그게 없음 도쿄하고 교신이 안 되니까요.”
“좋아요. 무전찬 도강시켜 드리죠.”
“아, 인제 살았군.”
“자, 빨리 합시다. 우드 대령.”
“네.”
드디어 KMAG 요원 59명은 무사히 한강을 건넜다. 이치업 대령, 이현진 중령, 그리고 여기자 마아가렛 히긴스도 무사히 건넜다. 육군본부 요원들과 도강장에 나왔던 국군들도 모두 강을 건넜다.
제5사단장 이응준 대령도 인도교와 광나루를 왔다갔다하다가 광나루에서 배로 도강을 했다. 그러나 한강 이북엔 아직도 많은 국군과 경찰이 도강을 못하고 적의 포위 속에 갇혀 있었다. 군경뿐 아니라 대다수 시민도 갇혀 있었다. 절망의 시간이 다가왔다. 엄청나게 잔인한 희망과 절망의 시차가 엄습한 서울 거리. 그 거리는 죽음의 거리로 변했다.
그러나 이런 변모를 모르는 임춘발 대전차포중대는 그때까지도 미아리에 버티고 있었다. 산발적인 박격포의 작렬음 속에서 이윽고 무더운 여름 햇빛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적은 또 후퇴했습니다.”
이 소위가 적정을 보고해 왔다.
“새끼들, 탱크병치군 모두 꼴뚜기 같은 놈들이군.”
임춘발이 내뱉듯이 말했다.
“단단히 질겁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봐. 헌데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어떡허지?”
“우군은 완전 철수한 것 같습니다.”
“철수? 글쎄 철순지 전진인지 똑똑힌 모르지만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 그것만은 확실해. 이 소위 지금 몇 시요?.”
“10시 15분전입니다.”
“음, 그래서 이렇게 후덥지근하군.”
임춘발과 이 소위가 적정이 뜸해진 틈을 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나이 칠순은 되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와, 유심히 바라보고 섰다. 한참 그렇게 훑어보던 노인은 그들이 어느 쪽 군인이냐고 물어왔다.
이 소위가 국군이라고 하자, 노인은,
“아니 왜들 엽때 여기 있소, 여기서 뭣들 하구 있느냐 말이야요.”
딱한 듯이 혀를 찼다.
“할아버지, 아무 말도 마시구 가십시오. 여기 계심 위험합니다. 대포알이 마구 날아와요!”
보다 못해 임춘발, 이필헌 등이 노인에게 빨리 자리를 피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노인은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란 소리 안 해두 가겠소만…… 보아하니 댁들 사정이 하두 딱해서 그러우.”
하였다. 이필헌이 노인을 귀찮다는 듯이 밀어내려는 것을 제지한 임춘발은,
“노인, 우리 사정이 딱하다니 뭐가 딱하단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딱하구 말구요. 댁들은 지금 아무것두 모르구 여길 지키구 있나 본데…… 난 지금 종로에서 오는 길이우.”
“그런데요?”
“아 글쎄 동대문으루 그 뭔가 전찬지 뭔지 하는 바위덩어리 같은 무쇠차허구 괴뢰군 놈들이 우우 쏟아져 들어오지 뭐유. 그리군 동네 빨갱이 놈들은 팔에다 완장을 차구설랑 만세다 뭐다 해서 지금 야단이에요.”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이 눈으로 보구 오는 길이라니까요.”
“이봐 이 소위, 대원을 데리고 지프루 얼른 사실 여불 확인하구 와!”
노인의 말은 심상치 않았다. 그제서야 임춘발은 사태의 심각함을 눈치챈 것이다. 이윽고 적정 정찰을 나갔던 척후 이 소위 일행이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어때?”
“저 노인의 말씀대룹니다. 시가는 대부분 철시했으나 벽마다 괴뢰들의 벽보가 나붙고 적색분자들이 날뛰고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음, 그럼 각 소대장 집합시켜!”
지시대로 각 소대장이 집합하자 임춘발은 그들에게 사태의 뒤바뀜을 설명했다.
“사태는 급변했소. 사태는 우리가 예측도 못 한 새 돌변했소. 지금 시내엔 적 탱크부대와 보병부대가 침투, 적색분자들의 호응을 받으며 시내를 배회한다는 정보에 접했소. 그러니 우리 중대는 중대 기로에 서게 된 거요. 각 소대장은 좋은 의견이 있으면 기탄 없이 말하시오.”
“어차피 철순 불가피하게 됐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젠 장빕니다. 장빌 어떻게 철수시키느냐가 문제겠습니다.”
“상부의 철수명령 없이 철수해두 될까요?”
옆에 선 동료 소대장이 걱정한다.
“아닙니다. 전 그 문젠 그다지 고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미아리 전방지휘소가 이미 철수한 이상 우리 행동은 모두 중대장님 재량에 일임된 거나 다름없다구 보기 때문입니다. 문젠 철수하는데 포 같은 중장비도 가지고 가느냐 안 가지고 가느냐의 양자 택일이 남았을 뿐입니다. 제 생각은 이상입니다.”
이 소위의 설득력 있는 의견을 듣던 임춘발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럼 내 결론 내리겠소. 철수를 명령하오. 제반 사태를 분석한 결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소. 그러니 무조건 철수하겠소. 단 우리 중대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장비도 함께 가지고 갈 것을 명령하오.”
미아리방어선에 남았던 국군 최후의 항전부대 임춘발 포병중대. 고립무원의 상황하에서도 침착과 담력을 잃지 않고 싸워 준 1백 63명의 대전차포 용사들, 이들이야말로 용사의 칭호를 받아 마땅한 젊은이 들이었다.
임춘발 중위는 계속 후퇴 시의 행군서열과 작전을 지시했다.
“제1선발대는 드리쿼터에 1개분대의 저격병을 탑재, 적을 경계하며 후속부대를 인도한다. 제1선발대 다음 서열은 나 중대장, 그리고 다음은 1소대, 2소대, 3소대의 순서, 그리고 마지막 후미 경계는 화기소대. 이상 순서로 행군하되 진로는 돈암동, 종로 4가, 을지로 4가를 거쳐 회현동, 서울역, 용산, 그리고 한강을 넘어 노량진역 광장에서 다음 지시를 한다. 시속은 50마일. 도중 적과 조우(遭遇)하면 명령 없이 저격하라. 이상.”
임춘발은 한강교 폭파음을 들었으나 그것이 인도교가 폭파되는 소린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부대 집결지를 노량진 역전으로 정했던 것이다.
6문의 포는 각 트럭에 집결됐다. 각종 장비도 남김없이 차에 실었다. 포탄 낙하 지점이 점점 가까와 왔다. 적의 교란사격은 사정없이 가해졌다. 그 속에서 전 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철수 준비를 진행시켰다.
“제1소대 준비 완료!”
“계2소대 준비 완료!”
“제3소대 준비 완료!”
철수 준비가 완료되자 임춘발은 이 소위를 지명, 선발 저격분대를 차출 지휘하게 했다. 전원 승차한다.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출발 신호만 남았다. 중대장 임춘발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그때까지도 언덕에 앉아 철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에게 다가갔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에게 임춘발은 거수경례를 하였다. 그 경례를 받는 노인의 눈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 몸 편히 안녕히 계십시오.”
“아, 이제 정말 떠나는구려.”
“네.”
“그래 인제 가면 또 서울루 올 수 있소? 언제께나 오겠수?”
“할아버지! 우린 꼭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구 기다리십시오.”
“암! 기다리구 말구, 내 죽지 않구 기다리겠수. 그러니 꼭 돌아와야 허우.”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임춘발은 울먹이는 듯한 노인과 작별을 하곤 곧 대원을 지휘, 미아리를 떠났다. 노인은 그들의 대열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 자리를 지키고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