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목뼈는 일곱 개, 내 목의 보호대 핀도 일곱 개
기린은 피가 몰리는 목이 있어 친친 하늘을 열고 닫고 감았지
나는 목 대신 허리가 자랐지 머리통은 작아지고
1억 4천만 년 전부터 기린은 죽지 않고
등뼈의 검은 벼락 무늬를 가지고 수렵 시대를 건너왔지
나의 자랑은 전진 마취를 건너왔다는 것
기린의 뿔에 빛과 물이 흐르는 동안
스르르 잠에 빠진 나는
죽으려고 하는 기린 꿈을 꾸었다
구덩이 파고 들어가는 듯했다
오후의 병실에는 나만 남았다
창 너머로 기린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바오바브나무가 있는 초원과 뿔을 두고 왔다
막, 사막을 지나왔던 것이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1.11.11. -
이병일 시인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 2007년 문학수첩 신인상 시 당선
-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 시 집 :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 개의 빛을 가진'
- 수 상 :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수주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이 작품은 '청노년 시'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입니다. 시인 노천명은 사람을 가리켜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저는 사슴이 아니라 '기린'을 보면 노천명 시인의 시 첫 구절이 떠오르면서 슬퍼지곤 합니다.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기린의 긴 목이 고고하면서도 처연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기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청소년기, '빛과 물' 그리고 '뿔'로 상징되는 높은 이상과 '구덩이 하고 들어가'고 싶은 잔인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바오바브나무가 있는 초원과 뿔을 두고' 길을 떠난 이 작품 속 기린은 인생이라는 뜨겁고 메마른 '사막'의 입구를 막 지나고 있는 듯합니다